15. 사람이고서 인仁하지 못하면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고서 仁하지 못하면 예는 어디에 쓸 것이며 악은 어디에 쓰겠는가!”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八佾 3장
팔일편에는 대체로 예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팔일무도 그렇고 체제사도 그렇고 계씨가 지냈다는 태산의 여제旅祭가 그렇다. 하지만 팔일편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오히려 예를 이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데 있다. 예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예를 넘어서 있는 다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 다른 가치란 바로 이 문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仁이다. 만약 인하지 못하면 예악이 모두 쓸모가 없다는 것이 이 문장의 뜻이다.
그렇다면 인이 무엇인가? 질문하기를 좋아했던 공문의 제자들이 가장 빈번히 물었던 질문이 바로 인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제자들 중에서 학업능력이 비교적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받았던 樊遲 같은 제자도 인에 대해서만은 세 번이나 물었다. 그 때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 인이라고 대답했다. 곧 인은 어디까지나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또 중궁이 물었을 때에는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내가 싫으면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말이야말로 고금의 진리가 아닌가. 심지어 말이 많았던 제자 사마우가 인에 대해 여쭙자 공자는 어진 사람仁者은 말을 적게 한다訒고 가르친 적도 있다. 아마 주변에 있던 다른 제자들은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仁과 訒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또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안연이 공자에게 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다. 그 때 공자는 나의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사욕은 자신만을 위한 배타적인 욕망을 지칭하며 예는 그 반대인 공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인은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발휘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만 보아서는 공자가 말한 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도리어 거꾸로 무엇이 인이 아닌지 곧 어떤 행위가 불인에 해당하는지를 알아보는 우회적인 접근이 이런 경우에 필요하다.
논어에는 공자가 제자를 불인하다고 질책한 경우가 단 한 번 나온다. 제자들의 능력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설사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대답해 주곤 했던 공자가 제자를 불인하다고 질책한 것은 공문에서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어느 날 말재주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던 재아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삼년상은 너무 기니 일 년만 치르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흰 쌀밥을 먹으며 따뜻한 비단 옷 입고 호의호식하는 것이 네 마음에 편안하냐”고. 그런데 평소부터 태도가 삐딱했던 재여가(재여는 낮잠을 자다가 공자에게 심한 꾸지람을 들은 일도 있었다) 눈치도 없이 편안하다고 대답하자 공자는 네가 편안하면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이는 결코 재여가 옳다고 인정해 준 것이 아니다.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서 이를 오늘날 표현대로 옳기면 “정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라”는 뜻일 것이다. 재여가 나간 다음 공자는 그가 불인하다고 탄식했다.
‘네 마음대로 해라’는 말은 어찌 생각해보면 가르치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탁월한 교육자로 칭송 받는 공자가 이렇게까지 심하게 얘기한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앞서도 얘기했듯이 ‘인’이라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이다. 불인을 행하고서 그것이 편안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도대체가 안 되는 일이다. 그 기본조차 부정하는 어리석을 앞에 두고 공자는 더이상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을 법도 하다.
이 일을 기준으로 인이 무엇인지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슬픔을 느끼면 인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인이다. 또 그런 상황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 불인이다.
맹자는 측은지심을 인의 시작이라고 했다. 측은지심의 은은 고통을 뜻한다. 탁월한 지적이다. 맹자의 말처럼 인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종의 감각이며 그 중에서도 아픔을 느끼는 통각에 가깝다. 이를테면 옆에 있던 사람이 손가락을 다쳤을 때 내가 그 아픔을 느끼는 것이 인이요 느끼지 못하는 것이 불인이다. 하등의 생물일수록 이런 감각이 뒤떨어져 있다. 이를테면 물고기는 대뇌의 피질이 극히 적기 때문에 이런 통각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그 때문에 머리를 제외한 온 몸의 살이 발라내어져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 또 식물의 경우는 그나마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감각이 가장 발달된 존재이다. 그 때문에 생리적으로도 고통에 가장 민감하다. 송대의 유학자 정이는 의서의 내용을 빌어 사지가 마비되어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상태를 사체가 불인하다手足痿痹 謂之四體不仁고 표현했다. 곧 사지가 중풍에 걸려 마비되면 손가락을 찔러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데 그것이 바로 불인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인은 통한다는 뜻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이 바로 불인한 사람이다.
인仁 : 다른 존재의 고통을 느끼는 힘
1993년 어느 여름날, 중국 호북성에서 학자들이 밤잠을 설칠 만한 일대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전국시대 초나라의 공동묘지였던 곽점촌의 어느 무덤에서 대량의 죽간이 출토된 것이다. 학자들은 이 죽간을 통해 지금부터 2,400년 전의 문자를 생생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죽간에는 인(仁)자가 사뭇 달리 씌어져 있었다. 신身자가 위에 있고 심心자가 아래에 있는 모양인 것이다. 이 글자의 뜻을 정확히 알려면 더 오래된 갑골문자의 신身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갑골문의 신身자는 사람을 뜻하는 인人자에 배가 불룩 나온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곧 임신한 여성의 몸을 그린 것이다. 이 모양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인’은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몸에 깃들어 있는 또 다른 생명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 마음은 아마도, 아이 덕분에 자신이 뭔가 이득을 얻을 것이라는 계산된 마음은 결코 아닐 것이다. 글자의 모양대로 보면 그 마음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일 테니 말이다. 뱃속의 아이가 발로 차고 주먹으로 칠 때마다 몸이 직접 느끼는 마음이다.
함께 출토된 문헌에는 또 다른 모양의 ‘인仁’자가 있는데 위에 인人자가 있고 아래에 심心자가 있는 모양이다. ‘사람의 마음’ 또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후한시대의 《설문해자》라는 책에는 천千자가 위에 있고 심心자가 아래에 있는 모양으로 ‘인仁’을 표기하고 있다. 천千은 천 명의 사람을 나타낸 글자이다. 곧 인은 천 명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때의 천千은 산술적인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천 명이면 천 명이, 만 명이면 만 명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니 이런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일 터이다.
이 인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가장 강조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공자다. 그런데 공자는 인에 대해 말할 때마다 모두 다르게 이야기했다.
예를 들어 번지라는 제자가 인이 무엇이냐고 여쭙자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고 가르쳐주었고,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나의 욕심을 이기고 남을 배려하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 인克己復禮爲仁이라 대답했다. 또 중궁에게는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仁’고 일러주었다. 심지어 늘 말이 많아서 꾸지람을 들었던 사마우가 인에 대해 묻자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인仁者 其言也 訒’이라고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공자가 이렇게 여러 갈래로 이야기한 인을 하나로 묶어 핵심을 보여준 사람은 맹자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순간을 가정한 ‘유자입정孺子入井’의 비유를 들어, 사람은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맹자는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목도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일단 불쌍히 여기고 가슴아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때 측은의 ‘측惻’은 상대와 나를 동일시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은隱’은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다. 맹자는 이 측은지심이 인의 실마리라고 말하는가 하면 때로는 측은지심이 바로 인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혹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상황을 가정하고 모든 사람에게 측은지심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맹자가 인간을 너무 좋은 쪽으로만 보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도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이를 테면 지하철구내에서 사람이 철로에 떨어진 순간 어떤 사람이 번개처럼 뛰어들어 구해낸 일이 있었다. 사람을 구하는 짧은 순간, 그에겐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다. 맹자가 보기에 이런 행동은 모두 타인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인의 발현이다. 설사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늘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며, 그 근거는 인간이 유달리 다른 존재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데 있다.
16. 의義 : 가장 중요한 것을 나누는 것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천하에 살면서 꼭 해야 할 일이나 절대 하지 않는 일이 따로 없고 의를 따를 뿐이다!”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里仁 4章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
子曰 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 里仁 16章
*孟子曰 大人者 言不必信 行不必果 惟義所在: 離婁下 11章
고대중국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물건이 무엇일까? 글자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양羊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가치를 의미하는 글자인 미美자, 선善자, 행幸자에는 모두 양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엇일까? 바로 커다란 양이었다.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글자인 美자는 커다란 양을 그린 글자[羊+大]이기 때문이다. 왜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양이 크면 더 많은 사람이 나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가치 또한 양과 관련이 있다. 바로 선善자가 양을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는 뜻[羊+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운을 나타내는 글자인 행幸자 또한 美자와 마찬가지로 큰 양[大+羊]을 뜻한다. 그리고 정의를 뜻하는 의義자 또한 창이나 칼 따위의 날카로운 물건으로 양 고기를 썰어내는 모습을 그린 글자[羊+我]다.
일찍이 공자는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고 말한 적이 있다. ‘義’는 군자가 추구하는 가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인이 추구하는 ‘利’는 다 자란 벼 이삭을 칼로 잘라내는 모양을 그린 글자로 기본적으로 탈취한다는 뜻이 있다. 결국 공자는 “군자는 중요한 물건을 골고루 나누는 義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소인은 중요한 물건을 홀로 독차지하거나 빼앗는 利라는 가치를 추구한다.”고 말한 셈이다.
공자의 뒤를 이어 인의를 주장한 맹자는 양나라 혜왕이 “어떻게 우리나라를 이利롭게 해줄 거냐?” 고 묻자 “利를 추구하면 결국에는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게 된다.” 고 말했다. 인간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적 욕망의 부정적 측면을 간취한 말이다. 맹자에 따르면 의는 때로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 그는 생生과 의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목숨生’을 버리고 ‘의’를 택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 요리와 곰발바닥 요리가 있을 때 둘 다 먹을 수 없다면 더 귀한 곰발바닥 요리를 선택하는 것처럼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 130권 중에서 절반 이상인 70권이 열전이다. 여기서 사마천은 열전의 맨 마지막편인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 곧 利를 성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사마천이 이들의 이야기를 맨 마지막에 배치한 까닭이 무엇일까?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서열 중에서 ‘利’는 맨 마지막에 위치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이’가 없는 세상은 잠시도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사마천은 그 위에 수많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열전의 첫 번째에는 어떤 가치가 놓여 있는가? 그것이 바로 의義다. 첫 번째 편 〈백이숙제열전〉에는 의라는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알다시피 그들은 굶어 죽었다. 사마천은 역사를 이루어가는 수많은 가치 중에서 의가 으뜸이라고 본 것이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사마천의 이야기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두 ‘의’라는 가치를 이야기하면서 정반대편에 ‘이利’라는 가치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가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면 ‘의’는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다. 흔히 맹자가 강조한 오륜의 하나인 ‘군신유의君臣有義’라는 말 때문에 의가 권력자에 충성하는 것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맹자가 강조한 의는 권력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권력보다 상위에 있는 개념이다. 의라는 가치의 정확한 뜻을 알려면 《맹자》를 읽어 보아야 한다.
맹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기인 사마천의 《사기》 <맹자열전>은 겨우 137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맹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충분하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맹자는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깨우친 뒤에 양나라와 제나라의 임금을 만나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모두 맹자의 주장이 현실과 맞지 않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모든 나라가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빼앗는 것을 추구했는데 맹자는 끝내 도덕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맹자는 당시 제후들이 요구에 따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맹자는 당시 제후들의 질문에 엉뚱한 이야기를 했단 말인가.
그렇다. 다음의 대화를 보자.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훌륭한 신하란 어떤 사람입니까?”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훌륭한 신하는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말립니다. 그런데 세 번 말렸는데 듣지 않으면 임금을 바꿔버립니다.”
맹자의 대화는 대체로 이와 같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맹자는 양나라 혜왕이 어떻게 자신의 나라를 이롭게 해주겠느냐고 물었을 때도 오직 인의가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맹자》 개권벽두에 나오는 대목으로 이 주장은 《맹자》가 끝날 때까지 한결 같은 어조로 이어진다. 이익을 버리고 인의를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맹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양나라 혜왕이 맹자를 자신의 화려한 별궁으로 초대했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혜왕의 별궁은 울창한 숲 속에 있었는데 높고 화려한 누대 아래에 깊은 연못이 펼쳐져 있었다. 맹자가 도착해 보니 못가에는 백조와 기러기가 느긋하게 날아오르고 고라니와 사슴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혜왕은 그런 자신의 수집품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 같은 현자도 이런 걸 즐깁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현자라야 이런 걸 즐길 수 있습니다. 당신 같은 자들은 이런 걸 가지고 있어도 즐기지 못합니다.”
“...”
매번 이런 식이다. 불온하다 못해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 때문에 《맹자》는 후대에도 금서로 지목당해 탄압받은 적이 많다. 역사에 기록된 가장 엽기적인 맹자 탄압 사건은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일어났다. 탄압의 주인공은 무한의 권력자였던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다. 어느 날 그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치며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이 늙은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당장 이 자의 신주를 사당에서 내치고 책을 불태워라.”
그는 무슨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일까? 짐작하는 대로 그는 《맹자》를 읽고 있었다. 어떤 대목이 그를 그렇게 광분하게 했을까? “임금이 신하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君之視臣 如土芥 則臣視君 如寇讎”고 한 대목!
그가 보기엔 그런 말은 신하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명령을 내린 뒤 그는 이 문제로 간하는 자가 있으면 대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경고했다. 형벌에 ‘대’자가 붙으면 ‘죽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시 전당(錢唐)이라는 신하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간했다. 주원장이 죽이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
“신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
주원장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황제가 되고나서도 족히 5만 명은 죽인 잔인한 자다. 게다가 자신이 비천한 시절 절에서 머리 깎고 청소한 이력이 부끄러웠던 걸까. 자신의 빛나는 머리를 풍자한다고 하여 모든 문서에 ‘광光’자를 쓰지 못하게 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전당은 죽을 각오를 하고 맹자의 복권을 주청했다. 어쩐 일인지 사람을 밥 먹듯이 죽이던 주원장도 전당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전당을 처벌하지 않았다. 또 얼마 후 그의 간언을 따라 맹자를 공자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도록 허락하였다. 목숨을 걸고 간했던 전당은 그가 바라던 대로 세상을 떠난 뒤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어 명조가 망할 때까지 제사를 받아먹었으니 죽음을 당하지 않고도 영예를 길이 누렸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주원장은 끝내 맹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당 같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하는데 《맹자》를 불태우거나 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한림학사였던 유삼오劉三吾를 불러서 맹자 다이제스트, 곧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게 했다. 《맹자》에 있는 글 중 내용이 불온하다 싶은 부분을 삭제하고 검열판을 만든 것이다.
유삼오는 모두 260장인 《맹자》 중 88개장을 삭제하고 172개장만 남겨두었는데 글자 수로 치면 거의 절반 이상을 삭제한 것이다. 어떤 대목을 삭제했을까? 맹자가 폭군을 비난하는 대목은 모두 삭제했다. 물론 맹자가 백성이 존귀하다고 한 대목도 삭제했다. 인의를 강조하는 대목, 왕도를 말하는 대목도 삭제하고, 혁명을 말하는 대목은 당연히 삭제했다.
절대 권력을 원했던 주원장이 맹자를 탄압한 것은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적절했다 할 것이다. 최소한 맹자가 절대 권력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제대로 알았다는 뜻이니. 하지만 고전을 제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일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 책이 반드시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삭제된 내용이야말로 권력자들이 두려워한 《맹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두려워한 《맹자》를 읽고 싶다면 《맹자절문》에서 삭제된 맹자의 글을 가려 뽑아 읽을 일이다. 삭제된 부분에서 맹자가 가장 강조했던 가치는 의다. 나누기를 원치 않는 권력자들에게는 불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