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노나라의 첫 번째 비밀, 천자의 춤
공자께서 계씨 집안의 일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덟 줄로 뜰에서 춤을 추게 하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하지 못하겠는가.
孔子謂季氏 八佾 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八佾 1장
사마천의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선조를 송나라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혹자는 이 기록에 근거하여 공자의 선조가 송나라 사람이고 송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은나라의 후예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므로 공자는 송나라 문화의 대변자로 살았던 것처럼 주장한다. 물론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주장을 정당화하려면 논어를 부정해야 한다는 데 있다. 논어를 부정하고 그려낸 공자의 모습이 있다면 글쎄 그걸 공자라 할 수 있을라나.
공자가 태어나 살았던 나라는 노나라이며 부모의 나라도 노나라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에도 공자가 노양공 12년 경자일에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맹자에는 부모의 나라를 떠나는 공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노나라는 무왕의 아들이자 성왕의 숙부이며 주나라의 예악을 정비했다고 전해지는 희단姬旦, 곧 주공의 맏아들 백금이 봉해진 제후국이다. 논어에는 당시 노나라의 상황이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몇 가지 있는데 나는 이것을 노나라의 삼대의혹이라 부른다.
첫 번째 의혹은 팔일편 첫 문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노나라에서 팔일무를 추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공자는 계씨의 집안에서 팔일무를 추는 것을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 본래 팔일무는 팔일 곧 여덟 줄로 열을 지어 총 64명이 추는 춤으로 천자국에서만 출 수 있고 제후국은 36명인 육일무, 대부는 16명인 사일무를 추는 것이 예법에 맞는 것인데 계씨는 천자는 커녕 제후도 아닌 대부였으니 참람치고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게다가 노나라는 계씨가 팔일무를 추기 이전에 이미 제후국으로서 천자만이 할 수 있는 팔일무를 거행했으니 그 자체가 이미 예법에 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계씨가 노나라 공족의 참람을 본받아서 자신의 뜰에서 팔일무를 추었다고 해도 크게 그르지 않을 터이다.
혹자는 성왕을 보좌하여 주나라 문물을 정비한 주공의 공이 워낙 컸기 때문에 성왕이 주공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노나라에 은전을 베푼 것이라고 하나 주공이 스스로 만든 예악의 규칙을 스스로 깨뜨리는 예외를 인정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러니 북송의 정이는 주나라의 성왕이 노나라에 팔일무를 추도록 허락한 것과 노나라의 제후 백금이 받아들인 것이 모두 옳지 않다고 지적한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이 또한 그런 모순점을 지적하기만 했지 왜 그런 모순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는지 그 원인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 원인이 뭔지는 잠시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그와 비슷한 모순을 몇 가지 더 들어보자.
15. 두 번째 비밀, 천자의 노래
노나라의 삼가것들이 옹시를 노래하면서 제사를 마쳤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제사를 돕는 이가 제후들인데 천자의 모습이 거룩하다고 하니 이 시의 내용이 어찌 삼가의 집에서 부를 수 있는 것이겠는가?
三家者 以雍徹 子曰 相維辟公 天子穆穆 奚取於三家之堂:八佾 2장
옹雍은 시경 주송의 편 이름으로 일종의 찬송가인데 이 송시頌詩의 내용에는 “제후들이 제사를 돕는데 천자의 모습이 거룩하다.”는 내용의 가사가 포함되어 있다. 공자가 비판한 말처럼 일개 제후국의 대부인 삼가에서 취할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만약 노나라에서는 본래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삼가가 어디에서 본받아서 그런 참월의 행위를 저질렀겠는가.
본래 송頌이란 노래하는 대상의 훌륭한 인격을 칭송하는 시의 장르로 시경의 주송, 상송, 노송을 삼송이라 하여 송가의 으뜸으로 친다.
후대의 송가 중 대표적인 글을 들라면 『고문진보』에 실려 있는 원결의 「대당중흥송」을 들 수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송가로 알려져 있는 이 노래는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으로 황폐해진 당나라를 헌종의 아들 숙종이 수습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는데 막상 범성대를 비롯한 후세의 다른 시인들은 이 송가를 당나라 황제의 난정을 풍자하는 풍자시로 해석하고 있다.
「대당중흥송」의 본문에서 작자인 원결은 “성대한 덕이 마치 산처럼 높고 태양처럼 떠오르니 만복을 가슴에 품었다盛德之興 山高日昇 萬福是膺”고 노래했는데, 범성대가 이르길 “본래 송이란 제왕의 아름다운 덕을 칭송하는 것인데 원결은 춘추의 필법으로 말을 완곡하게 하여 비웃는 뜻을 간직했는데 후세의 문장가들이 그 뜻을 드러내 밝혔으니 이 비에 새겨진 글은 송가가 아니라 죄상을 기록한 문서일 뿐이다.”고 했다. 임금을 두고 떠오르는 태양으로 표현한 송시는 적어도 문인들에게는 풍자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 대목이랄 수밖에.
이 나라에서도 ‘민족의 태양’으로 일컬어지는 독재자가 있었는데 문제는 그게 풍자가 아니라는 점에 이 나라 현대사의 비극성이 있다.
아무튼 노나라의 삼가는 천자의 춤만 추었던 것이 아니라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천자의 노래까지 불렀다. 노래의 가사를 글로 옮기면 시에 해당하니 삼가는 그야말로 시·예·악을 모두 천자의 것을 사용한 총체적인 참람종합선물셋트를 질렀다 할 수 있다.
내 생각에 그들은 이 시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맹자는 “군자는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친 것을 부끄러워 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했는데 걸맞지 않은 내용으로 어떤 사람을 칭송하는 행위는 아첨조차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말이 아닐까.
또 아무튼 이 기록을 보면 노나라에서 천자의 노래를 불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6. 세 번째 비밀, 천자의 제사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체제사를 지낼 때 강신례를 올린 뒤부터는 내 보고 싶지 않다.
子曰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八佾 10장
세 번째 의혹은 노나라에서 교제와 체제를 지냈다는 사실이다. 교제는 하늘에 지내는 제사로 천자가 아니면 지낼 수 없고 체제는 시조가 태어난 유래까지 거슬러 올라가 시조의 조상까지 제사를 지내는 제례로 이 또한 천자만이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불왕불체不王不禘(왕노릇하지 않는 자는 체제를 지내지 못함)의 법도라 한다. 그런데 논어에는 체제와 관한 언급이 두 번이나 나온다.
한번은 팔일편의 10장에서 공자가 체제에서 관례를 지낸 뒤에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 대목이고 또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체제에 관해 묻자 공자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 다음 그것을 아는 이는 천하를 손바닥 보는 것처럼 쉽게 다스릴 것或問禘之說 子曰 不知也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이라고 말한 대목이다. 공자는 정말 몰라서 모르겠다고 한 것일까? 그리고 체제의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 천하를 쉽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또 어찌하여 스스로 노나라에서 교제와 체제를 지내는 것을 비례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관람하기까지 했던가?
혹자는 공자가 노나라의 체제사가 예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고 싶어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는데 만약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보지 않을 일이지 하필이면 강신례를 올린 뒤부터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겠는가. 물론 주희 같은 주석가는 노나라의 체제사가 본래 실례한 것이고 그 중에서도 강신례를 지낸 뒤에는 실례한 가운데 더더욱 실례한 경우이기 때문에 공자가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풀이했지만 그 또한 강신례 이전의 체제사를 관람했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 것은 아니다.
교제와 체제는 분명 천자의 예악으로 주나라의 법도를 기준으로 따지면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무리한 일들이 다른 나라도 아닌 예악을 숭상하는 노나라에서 무더기로 일어났을까. 그리고 예를 누구보다 중시했던 공자가 어째서 삼가의 비례는 비난하면서 노나라의 비례는 비난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어떤 사람이 체제사의 구체적인 내용禘之說을 묻자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대답하지 않았던 공자는 그 비밀을 알고 있었나보다.
예기의 기록에 따르면 노나라의 체제사는 성왕이 노나라의 시조인 주공의 공로가 크다 하여 주공의 맏아들이자 노나라에 책봉되었던 백금에게 특별히 허락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주공이 안배한 것이다. 주공은 주나라의 예악을 제정한 사람이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스스로 제정한 주례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노나라에 안배한 것일까? 예기 예운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은 그 실마리를 찾는데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내가 주나라의 도를 살펴보니 유왕과 여왕이 해쳤다. 그러니 내가 노나라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我觀周道 幽厲傷之 吾舍魯何適矣” 이 기록을 보면 결국 당시에는 주나라에는 이미 주나라의 도가 사라졌고 노나라에는 주나라의 도가 보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노나라 소공 2년에 진나라의 한선자가 노나라에 와서 노나라의 문물을 살펴보고는 “주례가 모조리 노나라에 보존되어 있다. 내 이제 비로소 주공의 덕과 주나라가 천하의 왕이 된 까닭을 알겠다二年春 晉侯使韓宣子來聘 且告爲政 而來見 禮也 觀書於大史氏 見易象與魯春秋 曰 周禮盡在魯矣 吾乃今知周公之德與周之所以王也”고 한 것을 보아도 주나라의 예가 노나라의 문화에 얼마나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노나라 문화를 이야기하는 기록들이 한결 같이 주나라 문물이 노나라에 보존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노나라에서 주나라 천자국의 예악이 시행되었던 것은 결코 성왕의 잘못된 정책이나 후세의 참람한 행위로 빚어진 우연이 아니다. 내가 생각건대 주나라의 문화가 노나라에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주공이라는 인물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던 문화 보존책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주공이 어떤 인물인가? 문왕과 함께 주역의 작자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주역은 바로 주나라의 역이다. 주역의 기본정신은 주역본의의 작자인 주희도 말하는 것처럼 무왕불복無往不復이다. 무왕불복은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다. 곧 세상사 모든 일은 왔다가 가고 갔다가 온다. 마치 사계절이 갈마드는 것처럼. 따라서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고 한 번 세워진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고래로 수많은 흥망이 있었지만 그 원칙만은 고금을 통하여 변함이 없다. 그런 원칙을 스스로 세웠던 주공이 주나라만은 영원할 것이라고 억측했을 리가 없다. 천자국 주나라는 은나라를 물리적인 힘으로 쳐부수고 세운 하드웨어이다. 하드웨어는 내구연한이 지나면 반드시 망가질 수밖에 없다. 왕조라는 하드웨어는 동서를 막론하고 천년을 넘기지 못했다. 지금도 수많은 나라의 국가에 들어 있는 “영원하라.”는 말은 그런 하드웨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표현일 뿐이다. 다른 여러 나라가 망한 것처럼 주나라도 반드시 망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공의 고민은 여기에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왕조 자체가 망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비록 왕조가 망하더라도 왕조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문물을 보존할 수 있다면 언제든 다시 주나라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주나라의 영토나 백성들, 그리고 주나라에 대한 충성을 보장하는 봉건제도가 하드웨어라면 주나라의 문물은 소프트웨어에 해당한다. 만약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주나라 문물을 손상없이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하드웨어가 망가졌다 하더라도 언제라도 다시 복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 주공은 지금껏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국가보존 프로젝트를 마련했고 그것은 백업장치에 안전하게 보존되었다. 그게 바로 노나라이다.
주공은 그런 문명보존책을 광범위하게 시행했다. 주나라의 문물만 보존한 것이 아니라 하나라의 후손을 기나라에 보내고 은나라의 후예들을 송나라에 보내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하면서 살 수 있게 했다. 하나라의 후손을 기나라에 책봉한 것은 하나라를 멸망시킨 은왕조에 의해 시행된 것이 아니라 주공에 의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이런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이처럼 주공으로 인해 세 벌의 고대 문화가 보존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주나라 보존 프로젝트는 공자의 주나라 문화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함께 이후 수천년 동안 그의 저술로 전해지는 『주례』를 예악의 전범으로 받들게 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7. 주공周公이 되리라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주나라는 앞선 두 나라를 거울삼았으니 빛나는 문물을 이루었다. 나는 주나라를 따를 것이다.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八佾 14장
일찍이 장자는 유가를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으로 규정했다. 내성외왕이란 내면의 덕을 기준으로 말하면 성인이고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왕위를 차지한 자라는 뜻이다. 사실 요임금에서 시작하여 순·우·탕·문·무를 성인으로 칭송하는 유가는 스스로 왕이 되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이다. 하지만 왕조라는 하드웨어를 구축하기 위한 무력이라는 수단을 가지지 않은 공자가 스스로 군주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어떤 사람을 모델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공자를 두고 은나라의 후예로 탕임금의 15대손이라느니 왕대밭에 왕대가 났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하지만 공자 스스로 주공을 꿈에 본 적이 오래되었다고 탄식하는 걸로 보아 공자는 은나라의 성인이나 요순이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바로 주공과 같이 되는 걸 이상으로 삼았다.
왜 하필 주공일까? 주공은 무왕의 아우이자 성왕의 숙부로서 실제 주나라의 창업을 주도한 인물이며 앞서도 말한 것처럼 주나라 문물의 창안자였다. 그가 이전의 성인들과 다른 점은 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공자는 다른 모든 문화영웅들을 제쳐두고 주공이 되기를 꿈꾸었던 것이다. 아니 어찌 공자만 그랬겠는가. 이후의 모든 유가 지식인들은 모두 주공과 같은 지위에 오르기를 바랬다. 스스로 내성외왕의 성인이 될 수 없는 유가지식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현재의 군왕(外王)을 성인(內聖)으로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성왕이 주공을 인정했던 정도에 상응하는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간혹 그 꿈을 이룬 인물이 나타났으니 중국의 경우 제갈공명이나 왕안석,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조광조와 정약용 정도가 한 때나마 그런 지위에 올랐다고 할 만하다.
팔일편 14장에 해당하는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공자는 주공이 창안한 주나라 문물은 그 이전 두 왕조의 문물을 거울삼아 재구성한 것으로 이전 시대의 문화를 폐기하거나 말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창조적 계승으로 보고 있다. 물론 당시 천하의 사람들이 주나라의 예를 따르고 있었다는 문화의 대중성과 호환성을 중시한 것도 공자가 주 문화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로 인해 공자는 “만약 나를 등용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를 만들겠다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陽貨」”고 까지 했던 것이다.
주역 비否괘의 구오九五효사에 이르기를 “망할까 망할까 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떨기로 자라는 뽕나무에 매인 것처럼 편안할 것其亡其亡 繫于苞桑”이라고 했는데 천하가 꽉 막힌 때를 맞이했던 공자는 주역 비괘의 효사를 읽으면서 주공을 생각했던 것일까.
18. 덕德으로 배부른 사람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덕을 품고 소인은 땅을 품는다. 군자는 형벌을 생각하고 소인은 혜택을 생각한다.
子曰 君子 懷德 小人 懷土 君子 懷刑 小人 懷惠:里仁 11장
덕德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탁월성이다. 이 덕이 충만한 사람들을 가장 잘 표현한 글을 들라면 아무래도 『장자』를 빼놓을 수 없다. 『장자』의 다섯 번째 편이름은 덕충부德充符다. 덕충부란 덕충지부德充之符, 곧 그 사람의 덕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표시해주는 부호符號라는 뜻이다. 곧 참으로 도道를 체득한 인물이 자신의 수준 높은 내면성에 부합하는 형상을 갖춘다는 뜻이다. 덕이 충만한 인물에 부합하는 형상이란 오히려 형상에 구애되지 않는 것, 형상을 초월한 형상이다.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덕이 뛰어나면 형체는 잊어버리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니 이것을 두고 참으로 잊어버렸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내면의 가치를 저버리고 외형을 꾸미는 행위를 풍자한 말이다. 장자의 말대로라면 외형의 아름다움과 덕은 반비례한다. 그 때문에 장자에 등장하는 현인들은 신체적 결손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 신체의 결손이 덕의 충만을 표시하는 일종의 부호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덕의 충만을 배부름으로 표현한 기록이 있다. 빵으로 배부른 것이 아니라 덕으로 배부른 사람에 관한 기록이다. 덕이 충만한 사람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이 표현은 3,000년 전의 시를 모아놓은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의 시에 나온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이미 술에 취하고 또 덕으로 배부르니
군자여! 영원토록 너에게 큰 복이 있기를 바라노라.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마지막의 ‘경복景福’은 ‘큰 복’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경복궁景福宮의 ‘경복’이 바로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나는 이 시가 좋아서 친한 사람들이 결혼할 때면 축의금 봉투에 종종 이 ‘개이경복介爾景福’ 네 글자를 써서 건네주곤 한다. 아무래도 이 시의 내용이 결혼식에 참석해서 술을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한 상태에서 지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아무튼 이 시의 뜻은 군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인데 그 아름다움을 덕으로 표현한 것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그 덕을 먹는 것으로 비유한 것은 문화사적으로도 참 특이한 경우라 할 것이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하거니와 고대의 중국인들은 덕만 있으면 배부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기사 언젠가 어느 식당에서 시경의 바로 이 구절 ‘기포이덕旣飽以德’이라고 쓰인 족자를 보고 주인장의 식견에 감탄한 적이 있다. 모름지기 식당에서 덕으로도 배부를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덕으로 배부른 것이 반드시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기』에는 덕으로 배부른 사람에 대한 까다로운 규정이 있다. 천자는 한 숟갈 먹고 제후는 두 숟갈 먹고 대부와 사士는 세 숟갈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아야 한다天子一食 諸侯再 大夫士三 이미 덕으로 배부르기 때문에 음식을 더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다. 천자는 덕이 가장 많기 때문에 한 숟갈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상대적으로 덕이 적은 제후는 두 숟갈, 대부는 세 숟갈... 잘못 덕으로 배부른 체 하다가는 굶기 십상인 거다.
이 규정대로라면 제후가 한 숟갈 먹고 숟갈을 놓거나 대부가 두 숟갈 먹고 숟갈 놓으면 스스로 자신의 윗사람보다 덕이 더 많다고 표를 내는 행위이기 때문에 각각 천자와 제후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는 셈이다. 그런데 같은 『예기』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막상 천자는 하루에 네 끼를 먹었고 제후는 세 끼, 서민들은 옹손饔飱이라고 해서 하루에 두 끼만 먹었다. 뭔가 기만당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혹시 헛배가 부른 거였나?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다.
하지만 궁핍한 시절에 음식을 남기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그런 행위가 배고픔의 다른 표현이면서 동시에 배고픔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넘어서기 위한 일종의 문화적 행위로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문화적 행위가 배부른 자들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덕으로 충만한 사람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다. 만약 음식물로 배부른 자들이 거짓으로 그런 행위를 한다면 돌아올 반응은 뻔하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