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상을 새롭게 하는 법
옛것을 익혀서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옛것으로 목욕하고, 온溫과 신新
이 문장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지금까지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그렇게 읽어서는 지식을 넘어 스승의 역할을 강조하는 다음의 구절이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저 옛것이나 새것을 많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이해하는 핵심은 온溫 한 글자에 달려 있다. 溫은 본래 사람이 목욕하는 모습을 그린 상형문자(昷)이다. 목욕의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고대의 중국인들은 신新자로 표현했다. 하나라를 쳐부수고 상나라를 세웠던 혁명의 군주 탕임금이 그랬고, 초나라가 망했다고 멱라수에 몸을 던졌던 굴원이 그랬다.
대학에 의하면 일찍이 목욕 마니아였던 고대의 탕임금은 자신의 목욕통에 이렇게 새겨두었다고 한다.
만약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질 것이다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湯은 본래 뜨거운 음식을 뜻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목욕하는 목욕탕을 뜻하기도 한다. 아마도 탕湯임금은 목욕마니아였으리라. 그는 목욕을 일종의 세례의식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중국학자는 우리나라에 와서 대중목욕탕大衆沐浴湯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보고 탕湯자는 먹는 음식이나 뜨거운 물을 뜻하는데 한국에서는 대중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느냐며 대소했다고 한다. 다 고전을 잘 안 읽어서 생긴 그릇된 농일 뿐이다. 물론 쓸 데 없이 한자를 남발한 것도 칭찬할 일은 못 되지만.
탕임금은 물로 목욕하는 취미를 가졌나 본데 공자는 옛 고전의 향기로 목욕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던 사람이다. 믿음을 가지고 옛것을 좋아했다는 표현(신이호고信而好古)에서 옛것에 흠뻑 젖어 자신을 새롭게 하고자 했던 공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온溫과 신新이 절묘하게 대응하고 있는 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목욕을 해서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것처럼 고전을 읽어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자기 수양의 과정을 올바른 스승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공자의 뜻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새로워지는 것은 옛것이 아니라 나다. 마치 목욕을 하고 나면 몸이 깨끗해지는 것처럼.
13. 채울 수 없는 큰 그릇, 군자
군자는 채울 수 없는 그릇이다.
子曰 君子不器
그릇의 용도
불기不器라는 두 글자의 해석을 둘러싸고 수많은 이설이 나왔지만 대부분의 주석가나 번역가들은 불기不器의 불不자가 용언을 부정하는 말임을 간과한 듯하다. 논어 첫 번째 문장의 불역군자호의 군자를 용언을 부정하는 표현으로 쓰이는 아닐 불不자 때문에 ‘군자답다’고 번역해야 하는 것처럼 여기의 기器자도 용언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릇은 무엇인가를 채우는 도구이므로 그릇의 기능을 기준으로 풀이하면 ‘채우는 것’이다. 따라서 불기는 불성지기不盛之器의 줄임말로 채울 수 없는 그릇, 곧 큰 그릇이라는 뜻이다.
『노자』 제41장에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의 대기大器가 바로 군자君子다. 그릇이 크면 대기大器라 하고 사람이 크면 대인大人이라 하는데 대인은 논어뿐 아니라 중국의 수많은 고전에서 군자와 동격으로 쓰이는 말이 아닌가.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성成은 그냥 이룬다는 뜻이 아니라 그릇에 익은 곡식을 담는다는 뜻인 성盛자로 읽어야 한다. 노자 해당구절의 앞뒤에는 비슷한 표현으로 대방무우大方無隅, 대음희성大音希聲, 대상무형大象無形라는 구절이 같이 나온다. 대방무우는 커다란 네모는 모퉁이가 없다는 뜻이고 대음희성은 커다란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고 대상무형은 커다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커다란 네모란 변의 길이가 무한인 네모를 말한다. 무한의 변을 아무리 따라 가봤자 모퉁이를 만날 수 없다. 곧 모퉁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의 길이가 무한인 네모가 가장 커다란 네모란 뜻이다.
또 들리지 않는 소리가 가장 큰 소리이며 한 눈에 볼 수 없는 무한의 크기를 가진 것이 가장 큰 모양인 것처럼 채울 수 없는 그릇이 가장 큰 그릇일 수밖에 없다. 무우無隅, 희성希聲, 무형無形은 모두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만성晩成도 채울 수 없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만晩자는 당연히 무無자나 희希자와 같이 용언을 부정하는 표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자의 이 글귀들을 이해하고 나면 논어가 제대로 보인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 ‘큰 그릇은 채울 수 없다’는 뜻인 것처럼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군자는 채울 수 없는 큰 그릇’, 그릇을 넘어선 커다란 그릇이다.
14. 죽은 자를 위한 끔찍한 사랑 비比
군자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지만 패거리를 짓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짓지만 다른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지는 않는다.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죽은 자를 위한 사랑
진자거가 위나라에서 죽었는데 그 아내와 가신이 순장할 사람을 의논했다. 이미 진자거의 아우인 진자항을 순장하기로 결정한 다음 진자항이 들어오자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이 병들면 아래에서 봉양할 사람이 없으니 아랫사람을 순장해서 주인님을 모시도록 해야한다.” 진자항은 이렇게 대답했다. “순장은 예에 맞지 않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형님이 병드신다면 마땅히 봉양해야 할 이로 누가 아내와 가신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순장을 하지 말자면 그만두겠지만 어쩔 수 없이 꼭 순장을 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들 두 사람이 순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두 사람은 당연히 아무 말이 없었다. 막상 자신들이 순장 당해야 한다고 하니 꼬리를 내릴 수밖에. 『禮記』 「檀弓」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자항은 논어에 진자금으로 나오는데 공자의 제자라 하기도 하고 자공의 제자라고도 한다. 아무튼 이 이야기에 나오는 순장은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를 가까이서 모시던 아내나 시종을 함께 파묻는 야만적 의식이다. 사람 모양을 본 딴 인형을 파묻는 행위도 불인한 짓이라고 비난했던 공자이기에 산 사람을 생매장하는 순장 같은 행위를 격렬하게 비난했음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소인의 행동이 바로 그러하다는 것이 이 문장의 뜻이다.
周자는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지낸다.’는 뜻으로 군자의 사귐을 나타내는 글자인데 경지 정리가 잘 된 농토를 뜻하는 田자와 입을 뜻하는 口자(사실은 公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벼이삭을 뜻하는 禾자와 입을 뜻하는 口자가 합쳐진 글자인 和자가 벼이삭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周자도 수확된 농작물을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는 분배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래서 周는 周密, 親密의 뜻으로 쓰인다. 모름지기 사람사이의 친밀함이란 먹을 것을 나누어 먹으면서 생기기 마련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런데 比자는 阿比의 뜻으로 阿黨과 마찬가지로 패거리를 짓는다는 뜻이다. 比자의 匕는 人자를 거꾸로 놓은 모양으로 죽은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化자는 살아 있는 사람인 人이 죽은 사람인 匕로 변화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상형문자로 죽을 死자와 같이 쓰인다. 그런데 比자는 죽은 사람인 匕자가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바로 殉葬의 뜻이다. 순장이란 고대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과 관계가 가까운 사람들을 같이 매장했던 악습 중의 악습이다. 앞에서 예로 든 진자항의 고사는 그런 악습이 어떤 식으로 저질러졌고 어떤 식으로 사라졌는지 보여주는 일례이다. 아무튼 평범해 보이는 比자 뒤에 숨어 있는 뜻은 아주 끔찍하다. 比 또한 사랑은 사랑이지만 죽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산 사람을 매장함으로써 확인하는 방식의 사랑이다. 소인들의 사랑은 바로 그런 사랑이다. 그런 사랑 속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다.
부하의 종기를 직접 빨아주는 의도된 행위로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부하의 충성을 얻었던 오기吳起의 사랑도 그런 종류가 아닐까. 오기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물론 “부하를 자식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랑하고서도 이용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랑은 건방진 자식과 같아서 쓸모가 없다.”고 말했던 손자孫子의 사랑 또한 나을 것이 없다. 다 끔찍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