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마치 북극성처럼
덕으로 다스리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북극성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뭇 별들이 북극성을 싸고도는 것과 같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
하늘의 지도리와 삶의 중심
논어의 두 번째 편인 위정편의 첫 문장은 ‘무위無爲의 정치’에 관한 공자의 비유가 잘 표현되어 있다. 북극성은 정확히 말하면 북극성이 있는 자리, 곧 하늘의 지도리를 뜻하며 德은 삶의 중심을 말한다. 삶의 중심을 얻은 자, 곧 왕자는 천하에 거칠 것이 없으리라仁者 無敵於天下는 말은 맹자가 이어서 했다. 곧 덕이 훌륭한 사람이 정치를 하면 백성들이 그 사람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행정 명령이나 사법 명령 따위의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진다는 뜻이다. 바로 다음 문장에 나오는 “행정 명령과 사법 명령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피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이 없어지며 덕과 예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스스로 찾아온다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고 한 말처럼 공자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정치는 물리적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지는 무위의 정치였다.
흔히 무위라는 말은 노자나 장자 등 이른바 도가사상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실상 무위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는 문헌은 노자나 장자가 아니라 논어다. 바로 위령공 편에 “무위로 천하를 다스린 사람은 순임금일 것이다. 대체 무엇을 했던가. 자신을 공손히 하고 남쪽만 바라보았을 따름이다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라고 한 데서 무위의 가장 오래된 용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학자들은 위의 문장은 논어의 다른 부분에 나타나는 사상과 맞지 않으므로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논어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만약 그렇다면 같은 내용을 비유로 표현하고 있는 위정편의 이 문장도 함께 삭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삭제하다보면 그런 사람들에게 논어는 단 한 줄만 남아 있게 되지 않을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기술하는 자가 확실하고 명료하며 모순이 전혀 없는 완벽한 공자상을 그려낼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확신은 자료가 갖는 모호성을 외면하거나 진실을 희생할 때만 가능하다. 논어의 기록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완벽한 공자를 재현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겸손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고전을 살펴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른 개의 바퀴살과 하나의 곡
노자 제 11장에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곡轂을 싸고 도니 곡의 빈 틈을 만나서 수레의 쓰임이 있게 된다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車之用”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노자의 이 문장을 볼 때마다 논어 위정편의 첫 문장을 떠올린다. 동일한 문화적 맥락에서 비롯된 동일한 사유양식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우선 노자에 기록된 단 한 개의 곡은 위정편의 북극성과 같다. 그리고 서른 개의 바퀴살은 뭇 별들과 같고 노자의 無는 북극성이 놓인 위치와 같다. 심지어 공일곡共一轂의 共은 중성공지衆星共之의 共과 글자까지 같다. 모든 바퀴살이 하나의 곡을 싸고도는 것과 모든 별들이 하나의 별 북극성을 싸고도는 것,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한 사람을 향해 바라보는 것은 완벽하게 일치하는 하나의 그림이다. 수레가 굴러가고 하늘이 운행되고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 이 모든 것들의 중심에 있는 것, 그것이 도이다. 그 도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 덕이다. 맷돌이나 문짝의 지도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장자는 그런 상상을 해 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지도리를 도道라고 표현하면서 “지도리가 원의 중심에 놓이면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樞始得其環中 以應无窮”고 말한 적이 있다.
간혹 고전을 읽다보면 이처럼 전혀 다른 성격의 문헌으로 알려진 책들에서 글의 내용이 정확하게 서로 오버랩되는 경우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우연히 같은 비유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의 머리에 떠올랐을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노자를 엮은 사람은 논어를 읽어보았음이 틀림없다.
10. 시가 사라진 시대
시경 삼백편을 한 마디 말로 표현한다면 생각에 부정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
시경 삼백 편
공자는 시의 애호가였을 뿐만 아니라 예악의 전문가였다. 오죽했으면 제나라에서 순임금이 작곡했다는 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했겠는가.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에는 “본래 삼천 여 편의 시가 있었는데 공자가 중복되는 것을 빼고 삼백오 편을 모아서 모두 악기로 연주하고 노래로 불렀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편찬된 문헌이 바로 시경이다. 물론 현재 전해지는 시경이 과연 공자가 직접 편집했다는 바로 그 책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아무튼 논어의 기록을 살펴보면 공자가 시서詩書로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은 분명한데 당시 공자의 문하에서도 시를 읽고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자공이나 자하 같은 제자가 시를 이야기 하면 마치 지기를 얻은 듯 뛸 듯이 기뻐했던 공자가 아니던가. 게다가 오죽하면 이런 탄식까지 했을까.
“어린 제자들은 어찌하여 시를 배우지 않는가. 시를 익히면 자신의 감흥을 일으킬 수 있고, 사물을 감상할 수 있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고, 올바른 방법으로 원망할 수 있다. 또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길 수 있고 멀리는 군주를 섬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와 짐승들과 초목의 이름도 많이 알게 된다小子何莫學夫詩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陽貨>”
시를 익히면 감흥을 일으키는 정서적 차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물을 감상하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으며 원망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어버이를 섬기고 임금을 모시는 방법도 알게 된다. 게다가 조수초목의 명칭도 많이 알게 되는 덤까지 따라 온다. 한 마디로 시를 통해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시를 가까이 하지 않으니 공자가 안타까워 하며 탄식할 만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맹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왕자의 자취가 종식되자 시가 사라졌고 시가 사라진 뒤에 춘추가 지어졌다王者之迹熄而詩亡 詩亡然後春秋作《孟子離婁下》”
공자처럼 시를 읽지 않는다고 탄식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시가 사라졌다고 죽음을 선언하고 있다. 시가 사라지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맹자가 “시가 사라졌다.”고 말한 것은 문학 장르로서의 시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시의 정치적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곧 시가 더 이상 현실을 말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시가 사라졌다고 표현한 것이다.
진시황제 시절, 유가사상을 국가 최대의 적으로 간주했던 이사李斯는 유가의 시서를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이고비금(以古非今)을 들었다. 곧 유가의 시서는 옛 것을 가지고 지금의 정치를 비난하므로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가 제대로 보긴 봤다. 그런데 만약 시가 그런 기능을 상실했다면?
불태울 가치조차 없다.
요즘 우리들의 삶을 들여다봐도 시의 기능이 상실된 지 이미 오래인 듯하다. 이제 시는 소수의 문인과 그들의 작품을 읽는 특별한 사람들에만 설득력을 가지는 제한된 매체로 왜소해지고 말았다. 혹자는 이런 현상을 두고 독자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말하는데 누구도 시를 통해 세상사를 말하지 않는 상황에서 독자의 수준이 어떻게 높아질 수 있을까.
공자는 “생각이 부정한 자는 시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했고, 다산은 “어지러운 시국을 가슴아파하고 퇴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은 것은 시가 아니며, 진실을 찬미하고 허위를 풍자하며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고 했다.
11. 배움에 뜻을 둔 이래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자신을 세웠으며 마흔에 의심하지 않았으며 쉰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에 귀가 순해졌으며 일흔에 마음대로 하고 싶은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열이요 또 다섯에...
초미니 회고록이라 할 만한 공자의 이 말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나이를 이야기할 때마다 인용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심지어 남송의 섭적은 『습학기언』에서 공자가 어떻게 자신이 칠십대에 죽을지 미리 알고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었겠느냐며 기록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 또 『공자, 그 인간과 신화』라는 역저를 남긴 미국의 H.G. 크릴 같은 학자는 이 글은 자화자찬이 너무 심하므로 절대 공자의 말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의 견해가 적절한 것은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경우는 지금도 많으며, 누구나 자신을 칭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백이나 한유의 글처럼 고래로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는 글 중에 명문이 많다는 사실은 그들도 잘 알았을 터인데...
하지만 이 글을 공자의 자화자찬으로 인정하면서 에둘러 공자를 비판하는 장자의 글은 꽤나 재미있다. 『장자』의 「천운」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공자의 나이가 쉰하고도 하나가 되었는데도 아직 참다운 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남쪽으로 가서 노담을 만났다. 노담이 말했다.
“어서 오시오. 공선생. 나는 진작부터 그대가 북방의 현자라는 말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도를 터득했겠지요?”
“나는 아직 도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도를 예악에서 찾으려 했는데 5년이 지나도 터득하지 못했고, 음양의 이치에서 찾으려 했지만 십이년이 지나도록 도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으니 호학의 공자는 아마도 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노담에게 물었음이 틀림없다. 노담은 이렇게 대답했다.
“도가 다른 사람에게 바칠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임금이나 어버이에게 올리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며, 도가 남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형제에게 말해주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며, 도가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그것을 자손들에게 주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도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하기사 장저와 걸닉 같은 은자들은 공자에게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루터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곳에 대한 상징적 비유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바쁜 사람 붙잡고 물었기로서니 듣는 입장에서는 고약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과연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알기는 알았던가?
「천운」편의 작자가 굳이 쉰하고 또 한 살을 말한 것으로 보아 『장자』의 이 대목은 분명 『논어』에 나온 공자의 회고록을 풍자한 것이 틀림없다. 곧 쉰에 천명을 알았다고 한 대목을 도를 알았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구체적으로는 천명이 음양의 이치를 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예악에서 5년 동안 도를 찾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자가 서른에 자신을 세웠다고 했을 때의 ‘立’자는 예악을 익혀서 상황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꼭 맞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고 뜻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물론 「천운」편의 작자가 보기에 도는 예악이나 음양의 이치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천운」편의 작자는 공자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오십에 천명을 알기는커녕 쉰 한 살이 되어서도 도를 알지 못해서 노담을 찾아서 도가 뭔지 물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오래된 전설의 진위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더라도 「천운」편의 작자가 이 회고록을 제대로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일찍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고 말한 공자가 바라던 도는 애초에 누구에게서 전해 듣는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2. 세상을 새롭게 하는 법
옛것을 익혀서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옛것으로 목욕하고, 溫과 新
이 문장의 ‘溫故知新’은 지금까지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그렇게 읽어서는 지식을 넘어 스승의 역할을 강조하는 다음의 구절이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저 옛것이나 새것을 많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이해하는 핵심은 溫 한 글자에 달려 있다. 溫은 본래 사람이 목욕하는 모습을 그린 상형문자昷이다. 목욕의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고대의 중국인들은 新자로 표현했다. 하나라를 쳐부수고 상나라를 세웠던 혁명의 군주 탕임금이 그랬고, 초나라가 망했다고 멱라수에 몸을 던졌던 굴원이 그랬다.
대학에 의하면 일찍이 목욕 마니아였던 고대의 탕임금은 자신의 목욕통에 이렇게 새겨두었다고 한다.
만약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질 것이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湯은 본래 뜨거운 음식을 뜻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목욕하는 목욕탕을 뜻하기도 한다. 아마도 湯임금은 목욕마니아였으리라. 그는 목욕을 일종의 세례의식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중국학자는 우리나라에 와서 大衆沐浴湯(대중목욕탕)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보고 湯자는 먹는 음식이나 뜨거운 물을 뜻하는데 한국에서는 대중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느냐며 대소했다고 한다. 다 고전을 잘 안 읽어서 생긴 그릇된 농일 뿐이다. 물론 쓸 데 없이 한자를 남발한 것도 칭찬할 일은 못 되지만.
탕임금은 물로 목욕하는 취미를 가졌나 본데 공자는 옛 고전의 향기로 목욕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던 사람이다. 믿음을 가지고 옛것을 좋아했다는 표현信而好古에서 옛것에 흠뻑 젖어 자신을 새롭게 하고자 했던 공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溫과 新이 절묘하게 대응하고 있는 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목욕을 해서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것처럼 고전을 읽어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자기 수양의 과정을 올바른 스승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공자의 뜻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새로워지는 것은 옛것이 아니라 나다. 마치 목욕을 하고 나면 몸이 깨끗해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