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여색처럼 좋아하라
자하가 말했다. 어진 사람을 여색처럼 좋아하고 부모를 섬길 때 제 힘을 다할 줄 알고 임금을 모실 때 제 몸을 바칠 줄 알며 벗들과 사귈 때 말마다 믿을 만하면 비록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 이를 것이다.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음식과 남녀의 욕망
자하는 공자보다 44세가 어렸으니 증삼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그의 성은 복卜이고 이름이 상商, 자가 하夏이다. 그런데 상商과 하夏는 모두 중국 고대의 왕조 이름이니 자하는 꽤나 거창한 이름과 자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으로 치면 ‘대한이’나 ‘한국이’ 정도의 이름이다. 아마도 자하는 고대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자하는 공자 문하에서는 자유子游와 함께 문학의 거장으로 손꼽혔던 제자이다. 그만큼 세련된 표현에 능통했을 법한데 여기서는 그런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질박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으니 문文을 여기餘技로 여겼던 공문의 제자다운 말이라 해도 좋겠다. 그런데 첫마디가 이상하다. 현현賢賢이야 어진 사람을 어진 사람으로 존경한다는 뜻으로 존현尊賢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하필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존경하라니 문학으로 이름난 자하의 표현치곤 비유가 너무 적나라하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남자가 여자를 따르고 여자가 남자를 따르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그런가.
하긴 자하만 그랬던 게 아니다. 공자도 덕 있는 사람을 여색처럼 좋아하라(호덕여호색好德如好色)고 했지 않은가. 현賢과 덕德은 같은 뜻으로 쓰이며 모두 덕을 가진 훌륭한 사람, 현자를 말한다. 『논어』에는 「자한」편에 이어 「위령공」편에도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걸 보면 공자도 자주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납득이 간다. 공자 또한 이처럼 직설적인 표현을 즐겨 쓴 바에야 자하의 이 말을 새삼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으니까. 게다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한다는 뜻인 호선오악好善惡惡을 각각 여오악취如惡惡臭 여호호색如好好色이라고 한 말도 『대학』에 나오는 걸로 보아 고대 중국인들의 기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역시 호색, 아름다운 여인이란 결론이 나온다. 하긴 『예기』에도 사람의 가장 큰 욕망은 음식과 남녀에 있다고 했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 바뀌었을 리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망국의 군주들은 늘 여색과 짝을 이루었고 건국의 명군들은 늘 현자와 짝을 이루었다는 사실도 새겨볼 만하다.
이어지는 내용은 힘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고 몸 바쳐서 임금을 모시란 이야기이니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언이유신言而有信이란 말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신信’임을 보너스로 알 수 있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믿는 ‘불언이신不言而信’보다는 못하지만 언이유신言而有信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불언이신不言而信의 경지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모름지기 남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고민하지 말고 믿을 만하게 행동할 일이다.
자식을 잃고 실명한 제자
자하는 문학으로 저명했지만 행복한 삶을 누렸던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의 자식을 잃는 불행을 겪었기 때문이다. 『예기』에는 그가 자신의 자식을 잃고 슬피 곡한 나머지 실명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른바 곡자상명哭子喪明이다. 이를 두고 증삼과 후세의 학자들이 자하를 비판했지만 자식 잃은 슬픔이 신체의 반란으로 나타난 불행을 비판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심한 듯하다.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자. 『예기』 「단궁상」편의 기록은 이렇다.
자하가 자식을 잃고 나서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증자가 조문하러 갔다. 증자가 “나는 들으니 벗이 실명하면 곡한다고 했습니다.”하고 곡하자, 자하도 따라서 곡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시여! 저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증자가 노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상이여. 당신에게 어찌 죄가 없다 하겠습니까? 나와 당신은 함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사이에서 선생님을 섬기다가 나중에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물러나 서하 물가에서 늙어갈 때 서하의 사람들이 당신을 공자인가 의심하게 했으니 그게 첫 번째 죄입니다. 또 당신의 어버이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백성들에게 상례를 잘 치렀다는 소문이 들리지 않았으니 그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또 당신의 자식을 잃고 자신의 눈을 잃었으니 이게 세 번째 죄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에게 죄가 없다하겠습니까?” 자하가 지팡이를 던지고 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무리들을 떠나 외로이 산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고 했다.
자하가 죄를 지었건 말건 그게 불행을 당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뿐더러 열거한 사실들을 과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게 마치 큰 죄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자하의 곡자상명哭子喪明이 지나쳤다면 증삼의 질책은 도를 넘어 무례에 가까운 행동이다. 이래서 『예기』의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다. 그런데 『논어』 「안연」편에는 형을 잃게 된 상황에 처한 공자의 제자 사마우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있는데 나만 없게 되었구나!”하고 탄식하자, 자하는 이렇게 말해준 적이 있다. “저는 들으니 ‘살고 죽는 일은 천명에 달려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군자가 공경하면서 과실을 저지르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할 때 공손한 태도를 지켜 예를 갖추면 사해 안의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될 것이니 군자가 어찌 형제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이렇게 태연히 말하던 자하에게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 자식을 잃는 슬픔이 닥친 것이다. 그러니 호명중이 “자하가 이런 점을 알았으면서도 자식의 죽음에 곡을 하여 실명하였으니 사랑에 가려 이치에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말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증삼과 호명중의 태도를 납득하기 어렵다. 모름지기 다른 사람의 큰 불행 앞에서는 말을 아껴야 하는 법이다.
9. 절차탁마와 고왕지래
자공이 물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는 일이 없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다면 어떻습니까?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좋기는 하나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함만 못하다. 자공이 말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끊은 듯 간 듯, 쪼은 듯, 갈아낸 듯 하다고 한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 듯합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사는 비로소 함께 시를 말할 만하구나. 지나간 것을 일러 주었더니 올 것을 미리 아는구나!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았던 제자
자공子貢이 등장했다. 자공은 성이 단목端木, 이름이 사賜, 자는 공貢이다. 사賜는 내려준다는 뜻이고 공貢은 바친다는 뜻이니 이름과 자가 상반된 뜻을 지니고 있다. 아마 자공은 윗사람에게 바친 것도 많고 아랫사람에게 하사한 것도 많았던 모양이다. 이름에도 그가 부자였다는 사실이 엿보인다. 그는 노나라, 위나라, 제나라의 재상을 역임할 만큼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사기』에 의하면 그는 고국 노나라가 제나라의 침략을 받을 위기에 놓였을 때 세 치 혀로 제나라의 실권자 진항陳恒을 설득해서 노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만 아니라 천하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적도 있다. 그러니 사마천이 그를 두고 예리한 구변으로 말을 잘했다는 뜻으로 이구교사利口巧辭라고 표현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위衛나라 출신으로 공자보다 31세가 어렸는데 공문에서는 가장 출세한 제자였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그가 스스로 가난했을 때에는 남에게 아첨한 적이 없었고 부자가 되어서도 교만하게 굴지 않는다고 자부하면서 공자에게 스스로 평가를 물은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부유하고 말 잘하는 이 다재다능한 이 제자가 늘 흡족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은근히 그를 견제할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이런 적이 있다.
자공이 걸핏하면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자 공자는 그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너와 안회를 비교하면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느냐?”
탁월한 교육자로 알려진 공자가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면서 우열을 가리는 대단히 비교육적인 방식을 채택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게 자공이라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자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어찌 안회와 견주겠습니까? 안회는 한 가지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한 가지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알 뿐입니다.”
이처럼 공자가 자공을 견제할 때 들고 나오는 건 늘 나이어린 제자 안회였다. 안회는 공자보다 나이가 40세 어렸으니 자공보다도 아홉 살이 어린 제자였다. 만약 자공이 어리석은 제자였다면 공자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삐졌을 것이지만 자공은 역시 뛰어난 제자였다. 나이 어린 후배와의 비교를 기분 나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안회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에 꼭 맞는 표현인 한 가지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뜻인 문일지십聞一知十이라는 표현으로 위로는 스승을 만족시키고 아래로는 후배를 만족시켰지 않은가. 그만 못하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할 만큼 뛰어난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여기서도 공자는 자공의 자부에 대해 안회를 내세운다. 자공이 이룬 성과, 곧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할 때 교만하지 않는 것은 물론 훌륭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수준에 머무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안연이다. 안회야말로 밥 한 그릇의 즐거움과 물 한 그릇의 기쁨을 누린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부유하면서 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딱히 공문에서 지적하기 어렵다. 이 대화 이후의 자공이 바로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닐까.
자공은 공자의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절차탁마의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니 공자가 더불어 시를 말할 만하다고 감탄하면서 지나간 것을 일러주었더니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것을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왕지래告往知來라고 칭찬할 밖에.
불행한 적중
자공의 말재주는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한 번은 자공이 노나라에 벼슬할 때의 일이다. 이웃 주나라의 군주와 노나라의 군주가 서로 만나는 장소에 자공이 참관했던 모양이다. 행사가 끝나고 나서 자공은 “두 나라 군주에게 모두 사망의 조짐이 있다.”고 악담 비슷한 말을 했다. 과연 얼마 있다가 주나라 군주가 죽었다. 그리고 얼마 후 노나라 군주도 죽었다. 아마 두 군주 모두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일 터인데 사람들은 자공이 예언한 것이 맞아 떨어졌다고 술렁거렸다. 이를 들은 공자가 한 마디 했다.
“자공은 불행히도 말을 하면 자주 적중한다. 그것이 바로 자공으로 하여금 말을 많이 하게 했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마 말 잘하는 사람을 극단적으로 싫어했던 공자였기에 제자의 그런 경솔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자공은 공문에서는 재아와 함께 가장 말을 잘한 사람으로 꼽혔지만 재아나 다른 제자들처럼 자신의 말재주를 이용하여 핑계 대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 많았다는 점은 내내 마음에 걸린다. 특히 평범한 말도 자공의 입을 거치면 현란할 정도로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공자는 인을 설명하면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고 간단하게 말했는데, 이게 자공의 입을 거치면 “내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압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억압함이 없고자 합니다(我不欲人之加諸我也 我亦欲無加諸人也).”라는 식으로 바뀐다. 쉬운 말을 어렵게 바꾸는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다 할 만하다. 그런데 현란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문법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전혀 무리가 없는 문장이라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이와 비슷한 말장난은 장자와 혜시 정도나 되어야 상대가 될까.
하지만 자공은 그래도 자신의 스승 공자를 높이는 일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맹자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묘역을 6년 동안 지킨 것도 자공이었다. 한 번은 자공의 제자 진자금이 자공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께서 공손하게 자신을 낮추신 것이겠지요. 공자라 한들 어찌 선생보다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자공이 이렇게 대답했다.
“군자는 말 한 마디로 지혜롭다고 인정받기도 하고 말 한 마디로 어리석다고 평가받기도 하니 말은 삼가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선생님 공자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은 마치 사다리를 타고 하늘을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선생께서 나라를 얻으신다면 이른바 백성들로 하여금 서게 하면 백성들이 바로 서고 백성들을 인도하면 백성들이 따라가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면 사방에서 백성들이 찾아오며 백성들을 움직이며 서로 화합하여 선생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백성들이 함께 사는 것을 영예로 여기고 선생께서 돌아가시면 백성들이 슬퍼할 것이니 어떻게 미칠 수 있겠느냐?”
하늘과 같은 존재와 함께 살았던 자공은 행복한 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