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이비들의 행진
말을 교묘하게 꾸며대고 얼굴색을 착하게 꾸며대는 자 치고 어진 사람이 드물다.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말 납신납신 잘하고 남의 비위 잘 맞추는 사람 중에 사람다운 사람 없습디다.
- 최남선, 『소년논어』 -
사이비들의 행진
맹자에는 공자가 사이비似而非를 미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이비란 문자 그대로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 공자는 사람을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오직 어진 사람이라야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 게 인자仁者라는 뜻이다. 그리고 공자는 상당히 자아가 강한 인물이다. 절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논어』에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을 미워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면 공자가 미워했다는 사이비는 어떤 사람들일까? 『논어』에서 찾아본다면 바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교언과 영색을 일삼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교언巧言은 말을 교묘하게 꾸며댄다는 뜻으로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오도하는 태도나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 또 영색令色의 영은 착하게 꾸민다는 뜻으로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얼굴빛을 착하게 꾸미거나 그런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목적이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인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인한 사람이 드물다고 표현한 것은 그래도 많이 봐준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인한 경우는 절대 없다. 송대의 정이程頤도 절대 없다는 뜻으로 절무絶無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에 딴죽을 건 사람이 조선의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정이가 “교언영색하는 사람은 절대 인한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을 두고 “간혹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사람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좋은 의미의 세련된 표현이 모두 부정적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 위해 풀이한 것으로 짐작되지만, 본문의 맥락을 놓친 견해이다. 정약용이 틀렸다고 이상해 할 것은 전혀 없다. 훌륭한 학자라고 늘 맞는 말만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늘 맞는 말만 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단 한 마디도 못하는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하나마나한 말만 하게 된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양가지설兩可之說
춘추시대 정鄭나라에 등석鄧析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뛰어난 변론술로 이름이 높았다. 질 수밖에 없는 재판도 그가 변론을 담당하면 항상 이겼다. 그 때문에 백성들은 송사가 일어나면 맨 먼저 그에게로 달려가서 자문을 구하곤 했다. 장사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정나라의 유수洧水가 범람하여 어느 부자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런데 그 부자의 시체를 어느 사람이 건져올렸다. 부자의 유족들이 시신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하자 그 사람은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다. 악어 같은 사람이다. 그러자 유족들은 등석에게 달려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등석은 간단하게 “기다려라.”고 말했다. 유족들이 “기다리면 시신이 썩을 텐데요?”하자, 등석은 “썩으면 더 좋다. 당신들이 아니면 아무도 그 시체를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값은 점점 떨어질 것이다.”고 말해주었다. 유족들이 그 말을 따르자 이제 다급해진 것은 시체를 건져 올린 사람이다. 악어의 심성을 가진 그도 등석을 찾아가서 상의했다. 그러자 등석은 또 이렇게 말했다. ““기다려라.” 시체를 건져올린 자가 “기다리면 시신이 썩을텐데요?”하자, 등석은 “썩으면 더 좋다. 그 사람들은 당신에게서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시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값은 점점 올라갈 것이다.”고 말해주었다. 이게 이른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는 역딜레마인 양가지설兩可之說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충분히 상상해 보실 수 있겠지요. 모르긴 몰라도 시신은 썩어가고 두 집안은 원수가 되었기 십상이다. 하지만 등석은 두 사람 몫의 상담료를 챙겼을 게다.
그는 재판을 변론할 때마다 보수를 받았는데 큰 재판일 경우에는 겉옷 한 벌을 받았고 작은 재판일 경우에는 속옷 한 벌씩을 대가로 받았다. 장사가 너무 잘 돼서 부자가 되자 그의 문하에는 변론술을 배워 그처럼 돈을 벌려는 제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모였다. 그 결과 정나라에는 그와 같은 변론가들이 넘쳐났다. 정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하여 자고 나면 시비가 바뀌었다. 결국 정나라의 재상이었던 자산子産은 등석을 잡아 죽이고 만다. 훗날의 학자들은 유가나 도가를 막론하고 이렇게 말한다. 자산이 등석을 죽였지만 그것은 자산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며, 또 죽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순자와 열자의 말이다.
공자의 역딜레마
춘추전국시대에는 등석과 같은 변론가들이 많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런 변론술을 좋은 데 이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등석처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진실을 가리는 궤변을 늘어놓은 사람들도 많았다. 공자는 이 같은 자들을 소인이라고 부르며 극도로 미워했다. 이 문장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교언은 바로 등석과 같은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을 뜻하는데 『여씨춘추』에서는 등석의 그런 주장을 양가지설兩可之說이라고 표현했다. 어진 사람은 국가를 다스릴 것을 생각하지 어지럽힐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또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어주기 위해 노력하지 이간질 하여 서로 미워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仁이다. 그런데 말을 교묘하게 꾸며대고 얼굴색을 착하게 꾸미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그 때문에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돈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자가 미워할 만도 하다. 하지만 공자는 돈을 위해 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논어에 나오는 표현은 대단히 담백하며 복잡한 논리도 구사되지 않는다. 말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뿐(사 달이이의辭達而已矣)이라고 하는가 하면 문장을 여기餘技라 하여 효제를 실천하고 시간이 남을 때 익히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유가에서 수사학修辭學이 발달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 이유를 찾자면 아마 『논어』의 이 구절도 한몫했을 것이다.
공자는 백성들과 백성들 간의 연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전체공동체도 강해진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도록 정치를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상앙 같은 법가학자들은 반대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의 연대가 강해지면 나라가 약해지고 백성들의 연대가 약해지면 나라가 강해진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백성들을 이간시키는데 골몰한다. 지금도 자본가들이 노동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하고 있는 이간책, 그리고 한 명이라도 죄를 지으면 집단 전체를 처벌하는 연좌제, 또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그 사람을 처벌하는 불고지죄 따위는 대부분 상앙 같은 법가 사상가들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대표적인 악법이다. 법가를 채택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지 15년이 못되어 망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만약 부자의 유족들과 시체를 건진 사람이 등석이 아닌 공자를 찾아가서 자문했다면 공자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아마도 공자는 부자의 유족들에게는 “빨리 많은 금액을 주고 시신을 인수하시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시신을 구할 수 없지 않소”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신을 건진 사람에게는 “빨리 적당한 값에 시신을 보내주는 게 좋겠소.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팔 수는 없지 않소.”라고 했을 것이다. 당연히 시신이 썩거나 원수지간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공자의 역딜레마는 돈을 벌어들이지 못했겠지만.
6. 노둔했던 제자의 부지런한 일상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
吾日三省吾身
노둔했던 제자
논어의 네 번째 문장인 이 구절의 내용은 바로 증자가 한 말이다. 증자의 이름은 증삼曾參이고 아버지 증점曾點과 함께 공자에게 배웠다. 사실 曾參의 경우 ‘증삼’으로 읽어야 할지 ‘증참’으로 읽어야 할지 헛갈린다. 參은 ‘삼’으로도 읽고 ‘참’으로도 읽으니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읽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증참의 자는 자여子輿이고 輿는 수레라는 뜻이다. 따라서 수레를 끄는 곁말을 뜻하는 참마<馬+參>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맹자의 이름이 수레의 굴대를 뜻하는 가軻이고 자가 수레를 뜻하는 자거子車인 것처럼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수레와 관련된 이름과 자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증삼이라고 읽는 걸 그건 틀렸으니 증참이라고 바꿔 읽어야 한다고 목이 매도록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도 그냥 남들을 따라 증삼이라고 읽는다. 옛 발음이 어떤지는 학술적인 문제이지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지금 사람들과의 합의가 필요한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학술이 사람들 간의 합의를 무시하고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어쨌든 증점과 증삼은 부자가 함께 한 스승 아래서 배웠다. 증점은 공자보다 12세가 어렸고 증삼은 공자보다 46세가 어렸다. 증삼은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지는 안회보다 16세가 어렸으니 아마 공자에게 직접 배운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공자는 일찍이 제자들을 평가할 때 증삼을 노둔魯鈍하다 했다. 노둔은 영민하지 못하고 우둔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공자는 증삼이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자는 맹자에 의해 공자의 정통을 전수받은 인물로 인정받았으며 훨씬 뒤의 까다로운 주자학자들에 의해서도 공자의 도를 이어간 제자로 인정받았다. 아무튼 증삼의 노둔함 때문에 정통성시비가 간간히 일어났지만 북송의 정이는 “증자는 바로 그 노둔함으로써 도를 터득했다(증자이노득지曾子以魯得之).”고 평가했는데 이 말이 탁월한 지적이다. 바로 노둔한 자질 때문에 끝까지 노력해서 도를 터득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빛나는 재능 때문에 도리어 삶을 욕되게 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면 고개가 절로 주억거려진다.
빛나는 재능의 소유자 오기
빛나는 재능으로 신세를 망친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흔히 손무와 함께 최고의 병법가로 알려져 있는 병법가 오기를 들 수 있다. 오기는 바로 증자의 제자였다. 그는 본래 작은 위衛나라 출신으로 노나라에 유학하여 증자에게 수학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노둔한 사람 증자의 문하에서 재능이 가장 뛰어난 제자였을 터이다. 그런데 오기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전갈이 왔는데도 집에 가지 않았다. 증자가 물어보니 떠나오긴 전 어머니에게 출세하지 못하면 결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팔을 물어뜯으며 맹세했단다. 증자가 쫓아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후 오기는 노나라의 장군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를 시기한 사람들이 오기의 아내가 당시 노나라의 적대국가였던 제나라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출세에 도움이 될까 해서 장가들었던 아내가 오히려 출세에 방해가 된 것이다. 오기는 서슴지 않고 자신의 아내를 죽여 기어코 장군이 된다. 도대체가 대책이 안 서는 인물이다. 증자가 일찍이 그를 출문했던 것도 이처럼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성품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인물이 장군이 되었으니 노나라 사람들이 그를 그냥 놔둘 리가 없다. 오기는 강대국 제나라의 군대와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이기는 전과를 올리지만 결국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위험을 느끼고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위魏나라의 문후가 오기를 등용한다. 그는 비록 오기의 성품이 이리나 승냥이와 같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오기의 재능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오기는 위나라에서 활약하면서 말단 병사의 종기를 손수 빨아내는 등 동고동락을 함께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적어도 오기가 있는 동안 위나라는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했다. 그처럼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오기는 또 다시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위나라에서도 쫓겨나고 만다. 그 후 초나라로 도망하여 도왕을 섬기지만 도왕이 죽고난 뒤 평소 원한을 가졌던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 죽음을 당하는데 도왕의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도망간 뒤 그곳에서 화살 세례를 받는다. 이후 태자가 왕이 된 뒤 오기에게 활을 쏘았던 귀족들은 임금의 시신에 활을 쏘았다는 죄로 모두 죽게 된다. 죽을 때까지 복수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 정도라면 가히 하늘에 닿을 만한 재주의 소유자였다고 해도 크게 그를 것 없다. 하지만 오기는 그 뛰어난 재주를 믿고 덕을 닦는데 게을리 했다. 그가 장군의 신분으로 말단 병사의 종기를 직접 빨아주었을 때 그 병사의 어머니는 자식이 죽을 것을 알고 미리 통곡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그 어머니는 자신의 남편도 종기가 있었는데 오기 장군이 그것을 빨아서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쳐 싸우다 결국 죽고 말았다고 말한다.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람들로부터는 아무리 은혜를 입었다 하더라도 달가와 할 일이 아니다. 빛나는 재능을 과신하면 이래저래 인간을 수단으로 삼게 되는 법이다. 삼국시대의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차라리 내가 천하를 배신할지언정 천하가 나를 배신하지는 않게 하리라.”
역시 오기만큼이나 대책이 안서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 같은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게 이 시대의 기준이다. 역시 대책이 안서는 시대라 할밖에.
7. 남의 일을 내일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 내일처럼 최선을 다하지 않음이 있었던가. 벗들과 사귈 때 진실하지 않음이 있었던가. 전해 받은 것을 익히지 않음이 있었던가.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마지막 가르침
논어에 나오는 증자의 첫마디는 자신을 반성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증자의 반성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는 스스로 갈 길은 멀고 짐은 무겁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죽은 다음에 그만두니 멀다하지 않을 수 없고, 인仁을 자신의 짐으로 여기니 무겁다하지 않을 수 없다. 논어에는 증삼이 죽을 때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가르침을 베푸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의 마지막 가르침은 이렇다.
“어린 제자들아. 이불을 걷고 내 손발을 살펴보아라. 시경에서 말했듯이 깊은 연못을 마주한 듯, 살얼음을 밟는 듯 지금까지 내 몸을 조심하면서 살아 왔다. 이제야 내가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구나.”
이것도 반성이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죽는 순간까지 반성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굳세고 강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맹자는 일찍이 증자가 스스로 반성해볼 때 정직하지 않다면 허름한 옷을 입은 천한 사람도 굴복시킬 수 없지만, 스스로 돌이켜볼 때 정직하다면 비록 상대가 천 명 만 명이라도 나아가서 대적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끊임없는 반성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그가 매일같이 실천했던 세 가지는 무엇이었을까?
나를 향한 표현과 남을 향한 표현-충忠과 신信
증자가 매일 같이 반성했던 세 가지는 충忠과 신信, 그리고 습習의 세 가지였다. 첫 번째 항목 위인모이불충호爲人謀而不忠乎는 남의 일을 내일처럼 한다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忠이란 글자만큼 심하게 오염된 말도 없을 듯하다. 요즘의 忠은 흔히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집단에 대한 봉사, 심지어는 기업에 대한 고객들의 선호도를 나타내는 의미로 쓰일 정도로 뜻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래의 뜻은 자신의 최선을 다한다는 뜻으로 신信이 진실한 마음가짐, 진실한 말, 거짓없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과 같다. 다만 충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고 신은 남에 대한 것이라고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충이란 글자는 中자와 心자가 합쳐진 모양으로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을 나타낸 글자이다. 그와 반대가 되는 글자는 근심을 뜻하는 환患자이다. 환患은 마음 속에 두 가지를 품고 있는 모양으로 串자와 心자의 합자이다. 中은 한 가지를 꿰뚫은 모양이고 串은 두 가지를 꿰뚫은 모양이다. 따라서 忠은 한 마음이고 患은 두 마음이다. 두 마음을 품고 있으니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주희는 『논어집주』에서 “자기를 다하는 것을 충이라 한다(진기지위충盡己之謂忠).”고 풀이했다. 곧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대상이 군주일 경우는 군주에 대한 충성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국가일 경우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본래의 의미가 군주나 국가에 제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국가에 대한 충성은 충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충의 개념을 제한하는 것은 충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사장시킬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충은 기본적으로 대상이 되는 목적어가 나를 뜻하는 기己이다. 곧 충은 나에게 진실함을 뜻하는 충어기忠於己로 표현되고, 신信의 대상어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진실하다는 뜻인 신어인信於人으로 표현된다. 나를 향한 표현이 충이라면 남을 향한 표현이 신이다. 대상만 다를 뿐 충과 신의 내용은 같다. 반성의 두 번째 항목이 벗들과 사귈 때 진실하지 않음이 있었던가(여붕우교이불신호與朋友交而不信乎)로 이어져 있는 것은 그래서이다. 결국 충신忠信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나 자신을 대할 때나 똑같이 대한다는 뜻이다. 아마 ‘처삼촌 묘 벌초하듯 한다’ 는 말을 곰곰이 새겨보면 ‘남의 일을 내일처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보아야 『논어』와 『맹자』를 비롯한 유가의 문헌에서 충忠이란 글자가 왜 恕라는 글자와 나란히 忠恕라고 쓰이는지 알 수 있다.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서恕라는 말은 여如자와 심心자의 합자로 내 마음과 같다는 뜻을 지닌 글자이다. 만약 다른 사람의 마음도 내 마음과 같다는 전제가 없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증자는 공자가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었다.”고 했을 때 ‘선생의 도는 충서일 뿐’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충서는 두 가지가 아니다. 그걸 두 가지로 이해하니까 증자가 공자의 뜻을 잘못 이해했다고 엉뚱하게 비난하는 정말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거다. 고래로 남의 뜻을 이해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 남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고 공자가 말씀하신 거겠지.
공자가 돌아가신 뒤
증자가 점검한 마지막 항목은 습習이다. 바로 첫 번째 문장에 나온 시습時習의 습과 같다. 공자 문하에서는 기본이다. 참신한 논어 번역서로 꼽을 만한 『삶에 집착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논어』의 저자 황희경은 ‘증자의 이 말은 공자가 말한 논어의 첫 번째 문장을 순서만 바꾸어서 한 말’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습習은 학이시습學而時習의 습과 같다. 또 벗들과 함께 하기 위한 도리인 신信을 지키는 것은 즐거움을 함께 하는 벗들이 많아지는 까닭이다. 더욱이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이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서운해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공자의 말씀을 순서만 바꾼 것이라는 말이 딱 맞다. 모름지기 다른 사람이 읽는 『논어』도 같이 읽어봐야 한 수 배울 수 있는 법이다.
맹자에 의하면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많은 제자들이 증삼을 따랐다. 아마도 말이 적고 우직한 학자의 실천이 많은 제자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공자의 태도와 아주 비슷하다. 이 문장의 맨 앞에 ‘나는吾’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제자들을 앞에 모아놓고 하는 스승의 말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상상해 보라. 늙은 스승이 어린 제자들 앞에서 ‘나는 <아직도> 이렇게 반성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특별한 정보나 지식을 전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제자들을 감동시켰을 터이다. 증자는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는 오히려 서툴렀을지 모른다. 노둔했다고 하니까. 물론 노魯나라에서는 魯를 ‘영민하다’는 뜻으로 썼다는 전혀 다른 견해가 있지만 그것은 다른 기회에 이야기하는 것이 마땅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