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군자의 조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움을 품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부루퉁하지 않는다면 참된 인간이 아닐까!
- 이을호, 『한글논어』 -
남이 設或 모르기로 무엇이 不足할 것잇소.
- 최남선, 『소년논어』 -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면
사마천의 사기·자객열전에는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란 말이 나온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뜻이다. 또 열자列子와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거문고의 명인이었던 백아伯牙가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내용은 이렇다. 거문고를 잘 연주하는 백아에게는 절친한 친구 종자기가 있었다. 그는 백아가 거문고를 연주하면 그 음악을 모두 알아듣고 악상을 이야기 하곤 했는데 모두 적중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백아가 산을 묘사하는 음악을 연주하면 종자기가 높은 산이라고 감탄했고 물을 연주하면 깊은 물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그 이후로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모름지기 거문고의 명인에게 거문고를 연주하는 일은 생명과도 같았을 터이다. 그런데 자신의 생명과도 다름없는 연주도 막상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을 전해주는 고사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절친한 친구를 지음지우知音之友라고 한다. 그 만큼 누가 나를 알아주느냐 아니냐는 그 사람에게 중요한 일이다.
흔히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마 내 멋에 사는데 남들이 알아주건 말건 그게 나에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남들 앞에서 잘난 체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 모두 남이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잘난 체하는 행위 자체가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심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심리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섭섭해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경우는 어땠을까? 논어의 세 번째 구절은 남이 알아주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군자다운 태도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구절을 간단히 번역하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움을 품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정도가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주희의 주석을 봐도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소략한 편이다. 그저 배움은 나에게 달려 있고, 알아주고 알아주지는 않는 것은 남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므로 성낼 이유가 없다고 점잖게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희가 선배 유학자인 윤돈尹惇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역시 훌륭한 인격이 엿보이는 해설이다. 하지만 이 설명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경우를 가정해 보았다.
우선 이 구절을 쉽게 이해하면 화가 나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참는 것이 군자다운 태도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한문에서 온慍이라는 글자는 화를 밖으로 나타낸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 속에 노여움을 품고 있는 모습을 뜻한다. 따라서 불온不慍은 화를 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화 자체가 마음속에 형성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일단 틀린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어떤 생각을 가졌기에 화가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마 다음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남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스스로는 남들이 알아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경우이다. 그 만큼 자신의 배움이 옳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또 두 번째 경우는 실제로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화가 나지 않는 경우이다. 알아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내가 보기엔 공자는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삶을 살았다. 실제로 공자가 남이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도 분명하고 또 반대로 자신을 알아주는 제자들이 삼천 여 명에 이르렀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줄 사람은 누구인가?
중국의 산동성 곡부에 있는 공자묘에 갔을 때의 일이다. 진입로에 세워진 문의 현판에 ‘미유공자未有孔子’라는 네 글자가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미유공자未有孔子’라. 바로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출전을 모르고 우격다짐으로 해석하면 ‘공자는 없다.’는 뜻으로 오독하기 쉬운 이 구절은 ‘인류 역사상 공자보다 더 뛰어난 인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다음의 현판에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현지 여행 길잡이의 설명을 들어 보았더니 ‘공자의 사상이 황금이나 옥처럼 아름답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아하! 그렇게 이해하고들 있었구나. 현지의 중국인들이 공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것도 여행의 재미이다. 하지만 본래의 뜻은 그게 아니다. 이 구절 또한 앞의 미유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맹자는 공자가 앞선 시대의 세 성인(백이, 유하혜, 이윤)의 총화를 집대성했다고 보았는데, 앞선 세 성인이 독주곡을 연주했다면 공자는 쇠붙이로 만든 악기를 두드려 음악을 시작하고 옥으로 만들어진 악기를 두드려 음악을 마치는 것처럼 모든 악기를 다 동원하여 장대한 교향곡을 연주했다는 의미로 금성옥진金聲玉振이라 한 것이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백 년이 지난 뒤에 나타난 맹자는 공자를 두고 이처럼 최고의 성인으로 평가하고 자신의 소원은 공자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와 같은 칭송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를 열전에 배치하지 않고 세가에 분류했다. 공자를 제후로 대우한 것이다.
후세의 이와 같은 찬양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당시의 군주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했다. 왜일까? 당시 군주들이 바라는 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따르지 않았을 뿐만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던 사람이 공자다. 그 때문에 공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찾아 14년간 제후국을 전전하며 결국에는 상가지구喪家之狗(집 잃은 개, 또는 상갓집개)란 별명까지 얻게 된다. 당시의 지식인들에게서도 공자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하는 철부지 지식인’ 정도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결국 당대에는 공자를 알아준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노나라의 계환자는 공자의 가치를 알아보고 죽기 전에 자신의 후계자인 계강자에게 공자를 불러 정치를 맡기라고 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강자의 가신들이 공자를 기피인물로 지목했기 때문에 공자는 끝내 벼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당시의 군주들이 알아주었던 인물, 곧 선호했던 인물은 누가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당대의 군주들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인물이 있다. 전문田文이 그 주인공이다. 전문田文은 바로 맹상군孟嘗君의 이름이다.
서한 제일의 문장가로 평가받는 가의賈誼는 자신의 글 과진론過秦論에서 “제나라에는 맹상군이 있었고 조나라에는 평원군이 있었고 초나라에는 춘신군이 있었고 위나라에는 신릉군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이 네 사람들은 모두 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선비들을 우대했다고 평가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제나라의 맹상군이다. 사기史記의 맹상군 열전과 전국책戰國策의 제책齊策에는 문하에 식객 수천 명을 거느리면서 제나라의 재상으로 온갖 영화를 누린 맹상군의 활약상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특히 그는 계명雞鳴(닭울음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을 지칭)이나 구도狗盜(개가죽을 뒤집어쓰고 도둑질하는 재주를 가진 식객을 지칭) 같은 미천한 인물까지 식객으로 우대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 제나라를 보호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맹상군은 당시의 제후들은 물론 시정잡배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아주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한 번은 맹상군이 제나라에서 쫓겨나자 양나라 혜왕이 그를 얻기 위해 천금을 보낸 적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천여 년이 지난 송나라의 왕안석王安石은 맹상군을 이렇게 평가했다.
“세상 사람들은 맹상군을 두고 인재를 얻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도둑질하는 자들의 영웅이었을 뿐이다. 바로 이런 인물들이 그 문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진 사람들이 그에게로 귀복하지 않았다.”
왕안석은 한마디로 맹상군은 깡패 두목에 지나지 않았다고 폄하한 것이다. 왕안석처럼 천하를 경영하는 인물이 보기에 세상에서 알아주는 맹상군 정도는 하루거리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이 글의 제목은 독맹상군전讀孟嘗君傳인데 겨우 90字에 지나지 않으니까. 나는 왕안석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개혁가 왕안석이 보기에 맹상군은 당대에는 세력을 떨치고 제후들이 서로 모셔가려고 경쟁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자기 개인의 안위만을 염두에 두었던 속 좁은 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다. 백년 뒤, 아니 천년 뒤를 생각하는 인물들과는 다르다는 거다. 그에 비해 공자나 맹자 같은 인물들은 당대에는 환영받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백년 뒤, 천년 뒤에 평가받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당시의 현실에서는 패배했을지 몰라도 역사 속에서는 승리했던 인물이다.
숲 속의 향기로운 풀
공자가 남쪽 초나라로 갈 적에 진나라 채나라 사이에서 곤경을 당해 7일 동안 밥을 지어 먹지 못했다... 향기로운 풀이 깊은 숲 속에서 자라지만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향기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군자가 배우는 것은 세상에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무릇 현불초는 재능이고 하고 하지 않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때에 달려 있고,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다. 지금 훌륭한 사람이 있다 하니 때를 만나지 못하면 비록 현명하더라도 세상에 나갈 수 있겠는가. 만약 때를 만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 때문에 군자는 널리 배우고 깊이 생각하고 자신을 닦고 행실을 단정히 하여 그 때를 기다린다. <순자>
芷蘭生於深林 非以無人而不芳 君子之學...夫賢不肖者 材也 爲不爲者 人也 遇不遇者 時也 死生者 命也 今有其人 不遇其時 雖賢 其能行乎 苟遇其時 何難之有 故君子博學深謀脩身端行以俟其時
내 음악을 알아듣는 벗_지음지우知音之友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연주했고 종자기鍾子期는 잘 들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연주할 때 높은 산에 오르는 곡조를 연주하면 종자기가 “훌륭하다. 높고 높아서 태산 같구나!” 하였고, 흐르는 물의 곡조를 연주하면 “훌륭하다. 넘실대는 물결이 마치 강물이나 하수 같구나!” 하였다. 이처럼 백아가 연주하는 뜻을 종자기가 반드시 알았다. 어느 땐가 백아가 태산의 북쪽에 올랐다가 갑작스런 비바람을 만나 바위 아래에 머물렀다. 슬픈 마음이 들어 거문고를 끌어다 연주하는데 처음에는 장맛비가 내리는 곡조를 연주하다가 마침내 산이 무너지는 음악을 연주했는데 곡조를 바꿀 때마다 종자기가 그 뜻을 다 알아맞혔다. 백아가 마침내 거문고를 내려놓고 탄식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그대가 뜻을 듣는 것이, 상상하는 것이 내 마음과 꼭 같구나. 내 어떻게 그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연주할 수 있겠는가!”<열자>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들었다. 백아가 태산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듣고는 “훌륭하구나, 거문고 연주여! 태산처럼 높고 높구나!” 했다. 잠시 뒤에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연주하면 종자기가 또 말하길 “참으로 훌륭한 연주다. 넘실대는 것이 흐르는 물 같구나!” 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어버리고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백아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거문고 연주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거문고만 이런 게 아니라 현자 또한 그러하다. 비록 현자가 있다 하더라도 예를 갖추어 대우하지 않으면 현자가 어찌 진심을 다하겠는가? 말을 잘 몰지 못하면 천리마도 천리를 달리지 못하는 법이다.<여씨춘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