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배움의 길
《논어》는 너무나 평범한 말로 시작한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범해 보일 정도다. 그 이유가 뭘까? ‘학이시습學而時習’에서 ‘학學’이라는 글자는 ‘학교’를 뜻하는 글자로도 쓰인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은 이른바 대학大學이었다. 그런데 공자 이전까지 이 대학이란 곳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은 귀족으로 제한되었다. 배우는 과목을 봐도 그렇다. 이른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를 육예六藝라 하는데 예禮라는 것은 본디 귀족들의 몸가짐을 규정한 것이고 악樂은 음악을 연주하는 능력으로 모두 귀족들의 필수 교양이었다. 그리고 사射와 어御는 각각 활쏘기와 말타기로 귀족들이 무예를 연마하는 과목이다. 글자를 익히고 셈법을 배우는 서書와 수數 또한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당연히 평민들은 배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공자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공자는 당시 예악사어서수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였는데, 그 보따리를 모든 사람에게 풀어버렸다.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공자에게는 맹무백이나 남궁괄 같은 노나라 최고 권력자의 자제들뿐 아니라 일반 평민들, 농부의 자식들, 심지어 천민 출신까지 모두 와서 배울 수 있었다. 공자가 위대한 교육자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공자의 교육철학을 한마디로 《논어》에 나와 있는 구절로 이야기하자면, 이른바 ‘유교무류有敎無類-위령공편’다. 곧 가르침이 있을 뿐이고, 부류를 가림이 없었다는 말인데 여기서 부류는 신분을 뜻한다. 곧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않고 가르쳤다는 뜻인데 이 때문에 공자의 교육을 차별 없는 교육이라고 이야기한다.
공자는 제자의 수가 무려 삼천 명에 달했고 그 중에서 육예에 통달한 제자가 72명이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성과 이름, 간단한 행적이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성질 급한 자로, 현명한 자공, 안빈낙도를 실천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안연. 이들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신분도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공자라는 큰 나무 아래서 함께 배웠다.
이 세상은 불평등하다. 예나 지금이나 완전한 평등을 구현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런 불평등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교육이다. 공자의 교육 철학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등등하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때 정의로운 세상이 된다.
그런데 공자가 그토록 강조한 ‘학學’은 여타의 사상에서 강조하는 도道나 각覺과는 사뭇 다르다. 도나 각은 아무나 터득하거나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를 강조한 《장자莊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도가전이불가수道可傳而不可受’, 도는 전해줄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다는 말인데, 도를 아는 스승이 제자에게 도를 전해주어도 제자가 반드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곧 아무나 터득할 수 없는 것이 도다. 하면 된다?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되는 것, 그게 도의 세계다.
각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육조 혜능이 저잣거리를 지나다가 어떤 사람이 암송하는 금강경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데 막상 그 금강경을 외우고 있었던 사람은 평생을 가도 깨닫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단박에 깨우치고 어떤 사람은 평생을 노력해도 안 되는 것, 그런 게 각이다.
그런데 학은 이런 것들과는 다르다. 반드시 된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공자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순자가 학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청출어람이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이라고 한 말을 줄인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 쪽은 본디 초록색이다. 거기서 뽑아낸 푸른색은 초록색보다 더 푸르다.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는 비유다. 스승이 제대로 가르치고 제자가 제대로 배웠다면 틀림없이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것, 그것이 학의 세계다. 그러니 학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세계다. 《논어》의 첫 문장은 바로 이 ‘학學’으로 시작한다. 누구나 배우면 된다는 것,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논어》의 첫 문장에 담긴 속뜻이다.
1. 제 마음속의 기쁨
시도 때도 없이 배우고 익힌다면 또한 기쁘지 않을까!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는 족족 내 것으로 만들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
- 이을호, 『한글논어』 -
배워 가지고 잘 익히면 그것 조흐지 아니하오.
- 최남선, 『소년논어』 -
배우는 건 본받는 것이다
논어論語의 첫 문장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한다. 학學은 배운다는 뜻이고 습習은 익힌다는 뜻이다. 또 열說은 기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하고 감탄하는 내용으로 누가 봐도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대단히 평이한 내용이다. 성인 공자의 말씀이라고 해서 거창한 이야기가 나오려니 기대한다면 첫 구절부터 실망할 일이다. 그러나 이 구절의 내용은 학과 습, 그리고 열의 대상과 주체에 대한 전통적인 맥락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참뜻을 알 수 있다. 학과 습은 각각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지만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익힌다는 건지 말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왜 기쁜지도 모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운다거나 익힌다고 하면 지식이나 기술을 그 대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곧 정보나 데이터를 전달받고 경쟁에 유용한 기술을 익힌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야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으니까. 지식은 이익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우리 문화가 지금까지 담아온 배움과 익힘에 대한 전통적인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만일 뿐이다. 짐작건대 전통적인 삶과 언어에 익숙했던 옛사람들은 보다 쉽게 이 구절의 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배움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근대적인 의미의 지식,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Knowledge is power’이라고 말했던 권력으로서의 앎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다. 곧 논어에서 배움의 대상으로 삼는 앎은 타인과 경쟁하여 상대를 이기기 위해 추구하는 ‘지배하는 이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개념이나 희롱하면서 세상을 잊는 공허한 지적 유희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논어의 앎은 자신의 삶 속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추구하는 ‘실천하는 이성’이요 ‘반성하는 이성’이기 때문이다.
공자사상의 탁월한 해석가 주희朱熹는 학을 효效, 곧 본받는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본받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본받는다는 뜻이므로 여기서 배움의 대상이 되는 앎은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바람직한 행동양식, 곧 사람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 곧 사람다움이다.
명말청초의 유학자 방이지는 학學이란 글자를 아버지를 뜻하는 효爻(父)자 아래에 자식을 뜻하는 자子자가 놓인 학(텍스트로 표시 안 됨) 자로 풀이했다. 곧 배움이란 자식이 어버이를 모시고 그 행동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나중에 붙은 표시는 두 손으로 어버이를 받드는 모양이다. 각 그렇다면 배움의 과정이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빼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놀랍게도 갑골문의 학學자 중에도 그런 모양의 글자가 있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다. 주희나 방이지는 갑골문을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을까? 그런가 하면 새가 날갯짓을 배우는 학鷽자도 있고 사람이 사람된 도리를 배우는 학(텍스트로 표시 안됨) 자도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학 자의 윗부분, 곧 어버이를 뜻하는 爻자를 비스듬히 기울게 하면 어버이를 사랑한다는 뜻인 효孝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학學자의 옛 발음 ‘효’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리라. 옛사람들에게 배움이란 孝와 다른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일도 문자 여행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또 다른 기쁨이다.
새가 날갯짓하는 까닭은?
그런데 이런 학의 과정은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습習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주희는 습習을 새가 날갯짓 하는 것에 비유했다. 새가 날갯짓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날지 못하면 새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새가 새로서의 정체성, 새다움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나는 것이다. 축구선수가 축구로 구원받는 것처럼 말이다. 글자의 형태를 보더라도 습習은 양 날개를 뜻하는 우羽자와 흰 색깔을 뜻하는 백白자의 합자이고 백白자는 다시 하루를 뜻하는 일日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곧 새가 날마다(日) 날개 짓(羽)하는 모양을 두 개의 그림으로 형용한 것이 습習자의 구성 원리이다. 따라서 배움을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추구하기를 마치 새가 날개 짓 하듯 끊임없이 익힌다는 게 습자에 담긴 뜻이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배움이란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곧 사람다움을 추구하는 일이며 습은 그것을 끊임없이 익히는 부단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습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습習과 같이 쓰이는 글자를 들라치면 온溫자를 들 수 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할 때의 온溫은 습習과 같은 뜻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말로 ‘익힌다’고 할 때도 차가운 것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은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익히는 것이다. 낯설다고 할 때 설었다는 표현은 덜 익었다는 뜻이다. 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본래의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다. 무당은 본래 사람 살리는 것이 일이지만 선무당은 사람을 잡는다. 또 설익은 곡식은 도리어 피만 못하다.
저절로 일어나는 제 마음속의 기쁨
사람다움을 익히면서 느끼는 열說, 곧 기쁨은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재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배움을 끊임없이 추구해서 마음으로 터득하기 때문에 느끼는 기쁨, 곧 삶 속에서 자신의 도리를 실천하면서 느끼는 흐뭇함이다. 이를테면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몸이 불편한 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면서 느끼는 흐뭇함이 이에 가깝다. 물론 그렇게 했다고 해서 생기는 또 다른 대가는 없다. 다만 몸은 피곤하더라도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자족감으로 인해 생기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가치 있는 대가이다. 논어의 배움은 이런 기쁨을 보장하는 배움이다. 이런 기쁨은 절대 머리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실천하면서 저절로 마음에 쌓이는 것이다.
시時의 뜻도 제대로 풀어야 한다. 때로, 가끔가다 시간이나 여유가 생기면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무시無時로 풀어야 한다. 곧 어느 때고 익히지 않음이 없음無時不習을 의미한다. 옛사람들은 자주 물의 덕德을 칭송했다. 특히 공자는 물이 밤낮없이 흘러가는 것을 두고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는구나!’하고 감탄했고 노자老子도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고 했다. 이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마도 밤낮을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의 도에서 천지자연天地自然의 건실하고 사심없는 운행을 본 것일 터이다. 주역周易의 건건健健도 그런 뜻이다. 건이무식健而無息(건실하여 쉼이 없음)이나 순역불이純亦不已(한결 같아서 그치지 않음)는 모두 천지가 성실하게 운행하면서 쉬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당연히 사람도 그렇게 자강불식自强不息(스스로 힘써 쉬지 않음)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배움을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익히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과정이다. 요컨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배운 것이 견고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반갑지 않을까!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벗들이 먼데서 찾아와 주면 반갑지 않을까!
- 이을호, 『한글논어』 -
남이 알고 나를 멀리 찾음도 조흐거니와.
- 최남선, 『소년논어』 -
벗이 있어 먼 데로 찾아가면 그야말로 기쁘지 않읍니까.
- 요한 바오르 2세, 한국방문 인사말 -
벗은 누구인가?
첫 문장의 두 번째 구절은 벗이 먼 곳에 찾아오는 정겨운 이야기이다. 번역하자면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반갑지 않을까! 정도가 된다. 벗이라! 참 좋은 말이다. 한문에서는 붕朋이라고 하면 원래 짝을 의미한다. 짝은 더 정겹다.
지금은 선종하여 세상을 떠난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는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그는 바로 논어의 이 구절을 우리말로 전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벗이 있어 먼 데로 찾아가면 그야말로 기쁘지 아늡니까.” 확실히 바티칸은 먼 곳이지만 이 인사 한 마디로 먼 곳이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바오르 2세는 벗으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논어의 첫 구절을 읽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인사말로 남아 있으리라.
또 내가 1992년 공자의 탄생지인 중국의 산둥 성 곡부의 궐리에 처음 갔을 때 며칠간 묵었던 궐리호텔의 입구 현판에는 논어의 바로 이 구절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가 쓰여 있었다. 그 현판에 쓰인 글을 읽으면서 마치 공자를 직접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웠던 것도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를 즐겁게 한 벗들은 누구였을까? 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에는 공자가 만년에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 제자들이 더 많아졌고 급기야 원방遠方(먼 곳)에서 찾아오기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공자는 제자들을 벗으로 여겼던 듯하다. 결국 스승과 제자 사이도 벗이라는 이야기이다.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벗이다. 더욱이 『맹자』를 보면 결정적인 근거가 나온다. 제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취우取友(벗을 택한다)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자로 벗우자는 본디 두 손이 나란히 한 곳을 가리키고 있는 모양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뜻이 같은 것을 말한다. 벗우와 반대가 되는 글자는 (텍스트로 표시 안 됨) 정도가 되겠지만 실제로 그런 글자는 없고 그와 같은 의미의 글자로 北자가 있다. 등질 배北는 서로 등을 돌리고 다른 데로 가는 모양을 그린 글자이다. 패배의 뜻으로도 쓰이고 위배된다는 의미로도 쓰이는 글자이다. 물론 동서남북의 북자로도 쓰인다.
흔히 좋은 관계를 들 때 관포지교(관중과 포숙아), 문경지교(인상여와 염파), 죽마고우(환온과 은호), 수어지교(유비와 제갈량) 등을 일컫는다. 특히 죽마고우를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중에서 가장 수준 낮은 사귐이 죽마고우다. 유래를 알고 나면 죽마고우 같은 친구는 없느니만 못하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논어의 벗은 이런 것들과는 다르다. 앞에서 예로 든 사귐은 서로가 바라는 것이 일치되기만 하면 누구나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널린 게 의형제 아니던가? 그러나 논어의 벗은 이런 일시적인 가치를 초월해서 빛나는 ‘영원한 벗’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디에서 오는가?
먼 곳에서 찾아 왔다는 표현에서 공간의 제약을 벗어났음을 알기는 쉽다.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런데 한문에서 원遠이라는 글자는 공간적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뜻하기도 하지만 시간의 길이가 길다는 것을 표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원방래遠方來란 시공을 초월해서 서로 사귀는 벗을 두고 한 말이다. 공자가 주공을 사귀고 맹자가 공자를 사귀듯이 말이다.
『맹자』에는 상우尙友(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옛사람을 사귄다는 뜻)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맹자는 스스로 공자를 사숙私淑했다고 했다. 사숙이란 동시대에 살지 않았던 사람을 후세의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여 스승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런 사귐은 『맹자』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이른바 천고의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문장이다. 거기서 맹자는 자신의 시대에는 공자를 잇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후세에도 공자의 도를 이어갈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공자의 계승자이기를 포기한 듯한 표현이다. 하지만 주희는 이 부분을 두고 맹자가 스스로 계승자를 자임하고 나섰을 뿐만 아니라, 천 년 뒤에 반드시 자신과 만날 사람이 있을 것必將有神會而心得之者임을 확신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맹자는 천 년을 기약하고 벗을 기다렸을 터이다.
두 배의 기쁨
잠시 주역周易의 태괘兌卦를 살펴보자. 태괘는 위 아래가 모두 연못澤이다.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다고 해서 이택麗澤(리택으로 읽는다. 연못이 붙어 있다는 뜻이다.)이라 한다. 그리고 태괘의 태兌는 열說과 같이 기쁘다는 뜻으로 쓰였다. 본래 열說자는 태兌자에서 비롯된 글자로 생김새도 비슷하다. 태兌자는 기쁨을 뜻하는 상형문자로 사람을 뜻하는 ル자, 입모양을 그린 口자, 입가의 잔주름을 뜻하는 ソ자가 합쳐진 글자로 사람이 미소짓고 있는 모양을 그린 문자이다. 그래서 기쁘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그런 기쁨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이택이다. 기쁨을 함께하는 사람이 있으니 즐겁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태괘兌卦에도 붕우朋友 이야기가 나온다. 군자는 태괘를 보고 붕우들과 강론하고 익힌다고 했다君子以朋友講習 틀림없이 논어의 이 구절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기쁨이 두 배이기 때문에 즐거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물론 산술적인 의미에서 두 배라는 뜻은 아니다.
일본의 가이즈카 시게키貝塚茂樹 같은 학자는 원방래遠方來의 방方을 비比로 보고 벗들이 나란히(比) 찾아온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먼 곳에서 벗들이 와글와글 시끌시끌 떼 지어 몰려오기 때문에 즐겁다는 뜻이라는 거다. 물론 자남방래自南方來니 자북방래自北方來니 하는 용례를 두고 생각해보면 자원방래自遠方來의 方만 방향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뜻이 아닌 비방比方의 뜻으로 쓰인다는 것은 분명 납득하긴 어렵지만 해석의 창조성만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즐거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가이즈카 시게키는 중간자의 존재를 예측하여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유카와 히데끼의 형이기도 하다. 그의 말처럼 아니 논어의 구절처럼 뜻이 같은 벗들이 시공을 초월해서 떼 지어 온다면 얼마나 즐겁고 반가울까.
붕우와 함께 하는 즐거움은 혼자서만 누리는 열說보다 한층 밀도가 높다. 주희 역시 락樂을 급인이락及人而樂으로 풀이했다. 급인이락及人而樂이라. 여기서 ‘미친다’는 뜻인 급及의 주체는 내 마음 속에 있는 기쁨이다. 나에게 있는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면 즐겁다는 뜻이다. 당연히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상대를 가정하고 하는 말이다. 결국 급인이락及人而樂이란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긴다는 뜻이다. 그러니 논어의 즐거움은 사적 소유를 통해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함께하는 즐거움’이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