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6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시민강좌의 하나로서 전호근의 『논어』 강좌 - '평범하고 오래된 책의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총 20강으로 구성된 강좌는 2월부터 11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진행됩니다. <나비> '오늘의 공부'에는 강의의 주요한 부분과 함께 영상파일과 음성파일이 공유될 것입니다. 『논어』를 통해 변하지 않은 인간사의 여러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1. 만세사표에서 타도공가점까지_공자의 삶과 그 후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고루해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진다.”
공자孔子(B.C 551~ B.C 479)는 이름이 구丘이고 자가 중니仲尼로 ‘공자’라는 호칭은 그의 성姓에다 선생님이라는 뜻인 ‘자子’자를 붙여 존칭으로 쓴 것이다. 공자는 중국고대의 봉건제 국가 주周나라가 막 쇠퇴하는 춘추시대에 주나라의 제후국이었던 노나라에서 몰락한 귀족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생산력 발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민民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들의 생산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덕치’의 이상을 품고 14년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군주를 찾아 다녔다. 공자의 고국인 노魯나라는 주나라의 예악을 정비했던 주공의 맏아들 백금이 봉해진 곳으로 주나라 문화의 정수를 잘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자가 고대의 문물을 익히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공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는 불행을 당했고 24세 무렵에는 홀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젊은 시절이 불우한 편이었다. 그는 창고지기나 동산지기를 하면서 창고의 출납이나 가축 기르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일을 하고 남은 시간에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시서예악詩書禮樂을 비롯한 이른바 육예六藝를 익혀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노나라의 귀족이었던 맹의자와 남궁경숙 등이 젊은 시절의 공자에게 예를 배웠다고 한다. 또 공자 자신의 진술에 따르더라도 아동기가 막 끝나는 무렵부터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 무렵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나이 일흔이 되어 도덕적으로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니 일찍부터 예악을 익히는 데 관심을 갖고 매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활동했던 춘추전국시대(B.C 770~B.C 221)에는 중국역사상 가장 많은 철학자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는데 이 시대의 철학자들은 특정 귀족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던 이전의 지식인들과는 크게 달랐다. 우선 그들은 핏줄이나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저마다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여러 선생님들과 수많은 전문가들’이라는 뜻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부르는데 공자는 이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활동한 유가철학자였다. 공자는 35세 무렵 노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이웃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의 가신이 되었다가 제나라 경공을 만났다. 경공은 공자를 만나보고 벼슬을 주려 했으나 당시 재상이었던 안영이 반대하여 벼슬하지 못했다. 이후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노나라의 세력가 계환자에게 고사를 자문하는가 하면 오나라 사신을 접견하여 어려운 질문에 대답하는 등 풍부한 식견으로 성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공자가 51세가 되었을 때 노나라 정공은 공자를 중도의 책임자로 임명했는데 공자가 다스린 지 1년 만에 사방의 모든 고을이 중도를 본받을 정도로 성과가 있었다. 이어서 건설부 장관 격인 사공이 되었고 다시 법무부 장관 격인 대사구로 승진되었다가 마침내 재상의 일을 대신 처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웃 제나라는 강대하였고 노나라는 약소하여 자주 침략을 당하는 처지였다. 공자는 제나라와 평화조약을 맺는 한편 협곡의 맹약에서 제나라의 노나라에 대한 억압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따져 제나라로부터 빼앗겼던 땅을 돌려받는 성과를 얻어냈다. 이처럼 노나라가 잘 다스려지자 이웃 제나라는 두려워 한 나머지 미녀로 구성된 악대를 노나라에 보내 노나라의 권력자와 공자 사이를 이간하였다. 마침내 공자는 벼슬에 물러나 노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노나라를 떠난 공자는 위나라로 가서 영공을 만났지만 등용되지 못하고 진나라로 떠났는데 도중에 광이라는 곳을 지나다 양호라는 자로 오인되어 5일 동안 포위되는 어려움을 겪는가 하면, 송나라에서는 사마환퇴라는 자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공자는 조나라, 정나라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급기야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7일 동안 고립되어 제자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 후로도 공자는 위나라, 진나라, 초나라 등을 전전했다. 공자는 나이 68세가 되어 고국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 만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가 제자들을 양성하고 고문헌을 정리하는 일에 전념하였으며 73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공자 사후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그를 ‘지성至聖’으로 호칭하며 필부였던 공자를 제후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반고 또한 무관의 제왕이라는 뜻인 ‘소왕素王’이라는 호칭을 붙여 공자를 존중했다. 이후 당나라의 현종 때에 이르러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시호가 내렸고 송나라 진종 때에는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원나라 무제 때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격이 더 높아졌다가 청나라 때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로 불려질 정도로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절대적으로 떠받들어지며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근대의 길목에 5·4운동이 일어나면서 ‘공자 집안을 타도하자打倒孔家店’는 구호가 등장할 정도로 중국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봉건윤리의 대표자로 지목되는가 하면 문화혁명기에는 무기력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지목되어 전면적인 탄압을 받기도 했다.
공자는 일찍이 덕행·언어·정사·문학의 네 분야에 뛰어난 제자 열 명을 이야기한 적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제자로 안회를 들었다. 또 시서와 예악을 가르치기는 했으나 이론 교육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노나라의 태사에게 음악에 관해 설명하는가 하면 제나라에서 고대의 제왕이 지었다는 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할 정도로 심취하기도 했다. 공자는 저술을 중시하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주역을 읽고 해설을 붙였다고 하며, 시경과 서경 또한 그의 손을 거쳐 정리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맹자에 따르면 노나라 역사서인 춘추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역사서 춘추를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사실이라면 공자 유일의 저술은 춘추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정치적으로 불우했지만, 당시로서는 귀족들에게만 전수되었던 육예六藝의 과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삼천에 이르는 제자를 양성했다. 그는 당시 몰락하고 있던 종주국 주나라 문화의 부흥을 꿈꾸었는데, 그의 정치적 이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은 그가 죽은 뒤 제자들이 기록한 최초의 어록인 『논어』에 잘 나타나 있다. 『논어』는 그가 직접 저술한 책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제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언행록으로 그의 사상을 가장 잘 전해주는 문헌이다.
2. 평범하고 오래된 책의 놀라운 이야기_『논어』
공자는 『논어』를 읽어본 적이 없다. 뚱딴지같은 이야기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공자는 그저 말을 했을 뿐이고 한번 내뱉은 그 말은 여느 말처럼 공중에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공자는 자신의 말이 후세에 전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말을 기록한 『논어』는 당대에 엮인 것이 아니라 그의 사후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 두 세대 동안을 견디다가 제자의 제자 대에 이르러 비로소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록된 내용을 읽어보면 참으로 이상하다. 난생 처음 듣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아니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칠 만큼 재미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가슴 불타는 정의감을 불러일으키는 말도 없기 때문이다. 『논어』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를 테면 이런 내용이다.
마구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퇴근하여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다쳤느냐?” 그리곤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게 끝이다. 도대체 제자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말과 사람이 어떤 값으로 거래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값보다 말값이 더 비쌌다는 이야기다. 사람보다 말의 값어치에 더 관심을 두었던 세상에서, 그 반대로 행동한 사람이 있다면 그 의미는 자못 크리라. 제나라의 재상 안영이 현인 월석보를 말 한 필과 바꿔 온 이야기라든가, 진나라 목공이 양을 대가로 주고 노예로 끌려가던 백리해를 데리고 온 일이 이야깃거리가 되는 까닭도 모두 같은 이유에서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값어치가 있다고 여긴 것보다 사람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가 말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은 평범하지만 사실 세상의 가치 서열을 송두리째 뒤엎는 놀라운 이야기인 것이다.
『논어』는 새 책이 아니다. 2,5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견뎌 온 헌책 중의 헌책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지속되는 것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다. 책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어떤 책의 존속여부를 가늠하는 데 시간의 흐름보다 더 공정한 심판관이 있을까. 『논어』는 그 긴 세월 동안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읽혀왔다. 순자는 <논어>의 편제를 따라 자신의 저술을 남겼고 사마천은 『논어』의 구절로 열전을 시작하고 마무리했으며, 책 살 돈이 없어 서점에서 책을 통째로 외웠다는 한나라의 왕충은 『논어』를 읽은 뒤 공자에게 따져 묻는 『문공편』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송나라의 재상 조보는 반부의 『논어』로 천하를 다스렸다는 ‘반부논어치천하半部論語治天下’라는 말을 남겼다. 전통 시기 『논어』는 고전이 아닌 ‘경經’으로 절대시되었다.
그러나 근대의 길목에서 『논어』는 봉건윤리의 대명사로 지목되더니, 급기야 지주계급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비판받았다. 또 문화혁명 때는 공자를 반혁명분자라 비난하는가 하면 오곡을 분간치 못하고 사지를 놀리지 않는 기생충이라 했다. 다 맞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성현의 말씀을 팔면서 손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남의 땀으로 빚은 음식에 빌붙는 자가 많으니 말이다. 얼마 전 이 나라에 왔다 간 인기 지식인 슬라보예 지젝은 『논어』를 읽고 공자를 멍청이의 원조라 했다. 이 또한 맞는 말이다. 어떤 책도 멍청하게 읽으면 멍청한 책이 되기 마련이니.
『논어』를 읽고 나서 하는 이런 저런 이야기는 다 일리가 있는 말이며 심지어 그 반대로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다만 읽지 않고서는 이들 커뮤니티에 낄 수가 없다. 이 시대에 『논어』가 멍청이의 헛소리가 될 것이냐 아니면 삶의 양식이 될 것이냐는 모름지기 당신이 『논어』를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
3. 일상의 영원성_『논어』의 안과 밖
『논어』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고전 중의 하나로, 개별 인물에 관한 한 최초의 언행록인 동시에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담고 있는 지혜의 보고이다. 더욱이 유교적 질서가 지배하였던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는 꽤 이른 시기부터 『논어』를 경전으로 공인해 왔기 때문에 동일 문화권에서 『논어』 이후의 모든 책은 『논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전통사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논어』를 일생 동안 수 백 번 수 천 번 읽었다.
하지만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논어』의 내용은 막상 일상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논어』에는 『성서』처럼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장자』처럼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며 『맹자』처럼 읽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하는 혁명론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상식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대단히 평이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 『논어』다. 배움의 기쁨을 담담하게 말하는 대목, 인간에 대한 사랑이 무엇이며 또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는 대목,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논어』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특별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거나 고심막측의 난해한 내용이기 보다는 성실한 일상인이라면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처럼 평이한 이야기가 동아시아 사회에 수 천 년 동안 대다수의 지식인들에게 전승되고 재해석되면서 삶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새삼 일상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확인하게 해준다.
『논어』에 나타난 이야기는 이후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시대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재해석되었다. 가까이로는 공자보다 100여년 뒤에 활동한 맹자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맹자는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덕치주의를 계승하여 왕도정치론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혁명론을 제기하여 새로운 정치론을 수립하였으며, 인간의 자발적 의사를 존중했던 공자의 인간관을 계승하여 성선설을 주장함으로써 낙관적인 인간관을 확립하였다. 또 전국시대 말기의 유학자 순자는 『논어』에 나타난 인생과 죽음에 대한 합리적 관점을 받아들여 신비주의를 비판하고 객관적인 학문관을 수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후 한대의 양웅·동중서·정현, 당대의 공영달·한유, 송대의 주희와 명대의 왕양명, 청대의 황종희·왕부지·고염무·방이지 등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은 저마다 『논어』를 전승하고 새롭게 해석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논어』는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사회 내내 경전으로 공인 받아왔기 때문에 여러 국가의 교육기관에서 필수적인 과목으로 가르쳤다. 우리나라에서도 『논어』는 오래 전부터 지식인들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는데 특히 삼국시대 신라의 국립교육기관이었던 국학에서 『논어』가 필수교과목으로 채택되었으며 백제의 박사 왕인에 의해 『논어』가 일본에까지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국가교육기관에서 『논어』를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국가 교육기관인 국자감은 물론 최충의 구재학당을 비롯한 각종 사학에서 『논어』를 중심 교과목으로 가르쳤다. 또,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성균관과 향교를 비롯한 각종 교육기관에서 이른바 『논어』가 포함된 사서오경을 가르쳤으며 그간 『논어』를 주석하거나 인용한 경우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다. 이처럼 『논어』는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도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필독했던 교양서였을 뿐만 아니라 전시대에 걸쳐 국가정책과 인재등용을 위한 기본 교과서로 인정받아 왔다.
이처럼 『논어』는 동아시아 사회의 역사와 사상과 문학 등 모든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고전일 뿐만 아니라 동양고전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동아시아 사회를 떠받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