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밤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패션쇼를 보는 걸 좋아한다. 온종일 패션쇼를 하는 채널을 보다 보면 온갖 시름을 잊는다. 바짝 마른 여인들이 인어공주의 아랫도리처럼 딱 붙는 원색의 레깅스를 입고, 반짝이는 화려한 상의를 걸친 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어디론가 계속 걸어간다. 내게 패션쇼는 상상의 나라다. 나도 그렇게 무대 위를 걷고 싶다.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달나라를 걷는 모델들은 생각처럼 예쁘지 않다. 패션모델들이 예쁘지 않은 건 내겐 참 궁금한 일 중의 하나다. 세계에서 통용되는 동양의 모델은 대개 눈이 길게 찢어지고 쌍꺼풀이 없으며 작은 게 특징이다. 서양이 생각하는 동양의 아름다움이 이런 건가보다 쯤으로 생각하고 만다. 미의 기준도 끊임없이 변해왔다. 비쩍 말라야만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대체로 가슴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뭔가에 화가 난 것 같은 여윈 얼굴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안네 프랑크처럼 바짝 마른 몸에 근사한 날개를 달고 계속 걷는다.
쇼가 끝나고 남자들의 란제리 패션쇼가 이어진다. 저렇게 근사한 속옷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마치 우주복 같다. 우주복 콘셉트의 란제리를 입고 무대 위를 걷는 남자들 속에서 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다. 그 사람이다.
“이렇게 덜 외로운 시대가 있을까? 우리는 가장 외롭지 않은 동시에 그 어느 시대보다 외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지구 인류 역사상 가장 복 많은 최초의 인류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안 남았을지 모른다. 그냥 지구여행 하다 간 것만도 어머니께 감사하자. 경제적인 걸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아버지는 늘 무책임하다. 그마저 무책임한 아버지는 또 얼마나 많은 걸까? 하지만 아버지 덕에 또 먹고 살았으니 할 말도 없다. 어쨌든 아버지의 노고를 우리는 늘 간과한다. 어머니가 늘 더 가까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이 자란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참 눈물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쯤은 균형감각을 가질 때가 되었다. 이제 그만 하자.”
이 밑도 끝도 없는 이해할 수도 없는 메일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난 바로 그 사람이다. 우주복 같은 남성용 란제리를 입고 키가 큰 새처럼 무대 위를 날듯이 미끄러지는 나의 옛 연인, 그를 많이 사랑했었다. 그는 나를 버리고 아내에게로 돌아갔다. 비장한 얼굴로. 딸아이를 생각하며 사랑 따윈 개나 주자 했다며. 그는 가끔 말했었다. “프루스트가 동성애자였다는 건 알지?”
프루스트도 실연의 경험이 있었을까? 하긴 실연의 경험 없이 글을 쓸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연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이다. 그 상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치유된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깝다. 실연의 아픔은 나이가 들수록 짧아진다. 하긴 사랑이라 생각했던 그 사랑의 농도와 깊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래도 나이가 들수록 짧아진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일지도 모른다. 어느 영화에선가 서로 사이좋게 살던 팔십 대 부부 중 아내가 다른 노인과 사랑에 빠져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한 날, 남편이 기차선로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영화를 보며 실연당한 노년의 절실한 외로움이 막막한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그 영화를 본 날이 그와 헤어진 날이었던 것도 같다.
채널을 돌리니 새에 관한 진실을 찍은 다큐멘터리가 나온다. 새들도 불륜을 저지른다. 암컷을 유혹하고 떠나버린 수컷 대신 암컷은 또 다른 수컷과 다시 짝짓기를 한다. 짝짓기는 상대가 믿을 수 있는 짝인지 알아보는 춤을 제안하는 걸로 시작된다. 춤을 춰서 믿을 수 있는 짝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그와 나의 사랑도 춤을 추면서 시작되었다. 소위 동성애자들만 오는 클럽에서였다. 춤을 추면서 육체적으로 맞는 상대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미래를 약속할 상대를 찾는 방법으로는 당치도 않은 일이다. 짝짓기를 한 뒤 알을 낳은 어미새와 아비새는 새끼를 함께 키울 것을 약속한다. 어미새가 알을 수컷에게 맡기고 바다 건너 먹이를 찾으러 갔다 오는 동안, 수컷은 다른 암컷과 불륜을 저지르고 그 암컷의 알을 돌본다. 먹을 것을 구해 돌아온 주인공 암컷이 잃어버린 자신의 알 대신 다른 암컷의 알을 품는 이타적인 행위는 장기적인 전략이다. 어떤 새들은 오십 년 이상 같이 교대로 알을 품는다. 부정한 수컷을 버리고 암컷들은 새끼를 기르는 데 성공적인 방법을 찾는다. 나 외의 다른 수컷은 필요 없다고 서로를 설득하며 암컷끼리 새끼를 키운다. 사람과 비슷하게 새의 암컷도 늘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인간은 멸종위기 동물들의 유전자를 냉동시킨 뒤 30년 전 죽은 냉동 유전자로 새끼를 낳게 한다. 멸종위기 동물들이 다 죽고 나면 결국 멸종위기종 인류가 남을 것이다.
유튜브를 보다 보니 요즘 스위스에서 자살기계가 발명되어 시출을 기다리고 있다 한다. 현대적 관처럼 보이는 자살 장치는 우주에 도착한 푸르스름한 우주선 같다. 3D 프린터로 제작해 버튼만 누르면 10분 만에 끝나는 조력 자살 장치다. 하긴 지금도 우리 돈 1억 원 정도를 내면 아름다운 알프스산맥을 올려다보며 조력 자살클리닉에서 눈 감을 수 있다. 보통 일주일 전에 입원해서 의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설명을 듣거나 상담을 하게 된다. 지난해만도 1,300명 정도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다. 그야말로 죽음의 진화가 아닐 수 없다. 조력 자살이란 말 그대로 의사가 자살을 원하는 사람에게 일련의 주사제를 차례로 인체에 주입해 목숨을 끊는 걸 돕는 일로 스위스에서는 합법이다. 의사가 필요 없는 조력 자살 장치는 질소를 그 안에 가득 채워 산소 수치를 급격히 떨어뜨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의식을 잃은 뒤 대략 10분 뒤에 숨이 멎는다. 캡슐 안에 버튼이 있어 누르면 작동하고, 도중에 마음이 바뀌면 뚜껑을 열어 탈출할 수 있는 버튼도 달려있다. 죽는 과정의 비非의료화를 지향하는 이 장치는 평소에 좋아하는 경치 좋은 바닷가나 사막, 혹은 가까운 운동장 어느 곳에 놔두고 들어가 본인이 버튼만 누르면 된다. 어릴 적 유난히 죽음의 공포에 민감하던 나도 이런 장치를 만들고 싶었다. 죽기 전에 누워서 영화를 한 편 보는 거다. 요즘은 본 영화를 모르고 두 번 보는 일이 간혹 생긴다. 제목은 생경한데 막상 막이 오르면 머지않아 낯익은 영상들이 펼쳐진다. 좀 기분이 우울해진다. 기억력이 떨어져가나 싶어서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영화 보기에 몰입한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면 처음 봤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좋은 대사나 인상적인 영상과 배경음악도 다시 들린다. 같은 인생도 두 번 살아 보면 좋을까? 좋은 영화는 어쩌면 두 번 볼 때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그런 영화일지도.
도대체 산다는 건 읽고 싶었던 책 몇 권도 다 읽지 못하고 떠나는 짧은 여행이다. 말하자면 삶이란 미완의 리허설이다. 누나는 좋아하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끝까지 읽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누나가 프루스트같이 지루한 책을 읽지 않고 여왕처럼 근사하게 늙어갔으면 했다. 누나는 여왕을 좋아했다. 오래전, 누나가 런던에 학회 참석차 갔다가 사온 여왕이 인쇄되어 있는 우산을 아직도 나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나는 누나를 늘 여왕이라 불렀다. 꿈속에서 여왕처럼 근사하게 늙은 누나가 보라색 헬멧을 쓰고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죽는다는 건 뭘까? 조력 자살 장치에 들어가 누워 마음이 바뀌면 버튼을 눌러 관 뚜껑을 열고 다시 걸어 나올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누나를 되살려내는 꿈을 꾼다. 우리가 지금 보는 별은 몇 백 년 전 과거의 빛을 보는 것이다. 아, 시간―
지하철을 타러 계단을 한참 내려가는데 경보음이 울린다.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지하철 밖으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소리를 들을 텐데도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천히 자신을 목적지로 데려다줄 지하철을 향해 걸어간다. 죽음의 공포에 민감한 나는 지하철을 걸어 나와 옆 건물의 쇼핑센터로 들어선다. 어디선가 음반 가게에서 에디뜨 피아프의 노래가 들려온다. 나는 갑자기 여왕보다 에디뜨 피아프가 멋있다고 생각한다.
“아니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고 노래하는 에디뜨 피아프, 나도 따라 노래하고 싶다. “나도 그래요. 인생은 불꽃이죠. 누구에게나 그렇게 타오르다 사라지는.” 나는 누나가 에디뜨 피아프가 되어 되살아나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