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동아시아 시장경제
18세기는 동서양 모두 정치적으로 강력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었으며,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문화적으로도 번영했던 시기이다. 서양 경제가 신대륙의 발견과 이를 통한 해외시장 개척에 힘입어 발전했다면,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은 17세기 이후 찾아온 평화에서 비롯되었다. 청이 중국을 정복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룩한 이후, 동아시아의 한·중·일 3국은 200년 동안 평화의 세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동아시아 3국 모두 저습지와 산간을 중심으로 개간지가 확대되었다. 농업기술 발달로 단위면적당 농업 생산성도 향상되었다. 중국에서는 집약적 농업이 더욱 발달했고, 다양한 품종과 살충제의 개발 등 농법도 개량되었다. 일본은 비료와 농기구의 개발이 두드러졌고, 조선에서는 모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수확량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 같은 농업기술 개발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서 전래된 옥수수·감자·고구마 등 구황작물의 보급, 의학의 발전과 위생 상태의 개선 등을 배경으로 동아시아의 인구는 급격히 늘어났다. 중국은 18세기 초반부터 연평균 1퍼센트에 육박하는 인구 증가율이 1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17세기 초반 1억 5000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18세기 말에 이르면 3억 명을 넘어섰다. 일본 역시 17세기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인구 대폭발’의 시기를 맞았다. 17세기 초 1200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18세기 초에는 20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이 시기에만 2.5배에 달하는 인구 증가율을 보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인구 증가 추세가 둔화되거나 오히려 약간 감소했다가, 메이지유신 이후인 19세기 말에 다시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조선은 17세기 후반 이후 꾸준히 증가해 18세기 후반에는 18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처럼 동아시아 각국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상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인구의 증가는 곡물과 수공업품의 수요를 늘렸으며 시장의 확대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가져왔다. 중국은 송강지금의 상하이 쑹장구에서 먼 방직 산업이, 소주지금의 장쑤 성쑤저우와 항주지금의 저장 성 항저우에서 비단 산업이 발달했다. 이에 따라 주변 농촌을 중심으로 상품 원료의 생산이 늘어났고, 이를 판매하는 전문 시장이 시진市鎭이라 불리는 중소 규모의 도시로 성장했다. 중국 내 은 유통의 확산은 상공업의 성장을 더욱 촉진하고, 대운하와 장강양쯔 강 유역의 상업 노선들이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연결되면서 상품과 물자의 유통은 더욱 원활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통로의 발달을 배경으로 전국을 무대로 하는 거대 상인 집단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강남의 휘주지금의 안후이 성 후이저우 상인과 강북의 산서지금의 산서 성 상인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일본에서는 무사와 상공업자들을 조카마치영주의 거점인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에 살게 하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달했다. 조카마치의 상인들은 도시의 수요품을 주로 취급했으나, 상업이 전업화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도시 상업이 번성하면서 전업 도매상 중심의 거대 상인이 출현했다. 이 시기에는 일본의 쌀 시장을 장악한 오사카 상인과 전국에 지점을 두고 다양한 상품을 거래하며 성장한 오미시가 현 오미하지만 시 일대 상인이 유명했다. 막부의 통화 체제 정비에 따라 화폐경제가 발전하고 전국 규모에 걸친 육·해상 교통 체제의 확립은 상공업 발전에 큰 동력이 되었다.
조선에서도 도시와 농촌에서 민영 수공업이 발달했다. 17세기 이후 대동법 시행과 상평통보의 전국적 유통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더욱 촉진했다. 새로운 도로와 수로가 개발되고 또 기존의 세곡 운송로를 활용하면서 18세기 말 이후 장시와 포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전국에서 가장 큰 포구였던 마포와 용산 등이 위치한 경강 지역은 전국의 상품 가격을 조절하는 중심 시장의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경강 상인은 미곡·어물 등의 운소오가 판매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개성을 중심으로 전국에 송방(개성상인의 가게)을 설치하고 국제무역과 홍삼 제조업에 진출한 개성상인 역시 전국을 무대로 한 상업 활동으로 성장했다.
동아시아 3국의 시장경제는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새롭게 해외시장을 개척하거나 적극적인 상업·상인 보호 정책을 시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내적 발전 동력이 충분했다. 그래서 상공업 발전을 배경으로 새롭게 성장한 계층의 이해를 보호하고 그들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루어 내지는 않았다. 특히 조선은 18세기 이후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화를 건국 이래 유지해 오던 기존 체제 안에서 수용하려 했다. 따라서 사회 전체의 내적 발전 동력이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는 19세기를 별다른 준비 없이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