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의 핵심은 피아彼我 구분이다. 그래서 정부는 온 국민이 주민등록증을 만들게 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만 17세가 될 때 동사무소에 가서 열 손가락 지문을 찍고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주민등록증의 핵심은 주민등록번호와 지문, 그리고 사진이다. 최초의 주민등록제도는 1942년 조선총독부가 도입했다. 일본 호적법에 바탕을 둔 ‘조선기류령’을 제정해 징용과 징병 등 식민지 수탈을 효율화했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정한 ‘주민등록법’의 목적도 일제의 기류령과 거의 같았다. 현행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가 생긴 것은 1968년 가을이었다. 정부는 북한의 간첩이나 공작원들의 침투를 막고 이미 침투한 간첩을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든 국민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했다. 1970년 개정된 주민등록법은 “치안상 특별한 경우에는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도록 함으로써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용이하게 식별·색출하여 반공태세를 강화”할 수 있도록 했다.
시행 초기 주민등록번호는 열두 자리였지만 1975년부터 생년월일 여섯 자리+숫자 일곱자리로 변경되었다. 뒷자리 첫 번째는 성별(남자 1, 여자 2)을 구분한다. 그다음 다섯 자리는 출생신고를 한 동사무소의 고유번호와 그 동사무소에서 그날 한 출생신고 순서를 나타낸다. 마지막 숫자는 기술적인 오류 검증에 필요해서 붙인 번호다. 재외동포는 뒷자리가 다 0으로 통일된다. 남자는 1000000(혹은 3000000), 여자는2000000(혹은 4000000)이다. 석 달 넘게 한국에 머물 경우에는 재외동포 전용 임시 주민등록번호를 주며 2년 넘게 머무르면 국내거소 신고번호를 발급한다. 주민등록번호 때문에 해외동포들은 인터넷 실명 확인을 받을 수가 없다. 탈북자들은 국정원의 교육장소인 경기도 안성 하나원 주소를 본적지로 하는 번호를 받는다. 그래서 탈북자에게는 비자를 주지 않는 중국 정부가 하나원 주변 동사무소 코드번호가 든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비자 발급을 거부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1000001과 2000001이었다. 고유번호가 00인 동사무소는 없지만, 특별한 분들이어서 특별한 번호를 준 것이다.
주민등록번호 덕분에 국가는 편리하게 국민을 관리할 수 있다. 주민등록번호는 국가가 시민 개개인에게 발급한 고유 식별번호다. 우리는 평생 이 번호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민등록번호만 보면 그 사람의 나이와 출생지, 성별을 바로 알 수 있다. 송아지 귀를 뚫고 바코드가 든 명찰을 붙여 사육, 도축, 유통의 전 과정에서 원산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원산지를 증명할 수 없는 정육은 수입 쇠고기가 아닌지 의심받는 것처럼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사람은 북한 간첩으로 의심받게 된다. 국가가 주권자인 국민에게 고유 식별 번호를 부여하고 지문을 보관하고 주민등록증에 사진을 붙여 관리하면 간첩 침투와 범죄자 색출에 편리한 점이 많다. 미성년자 유흥업소 출입을 단속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그런데 스마트폰 개통, 금융계좌 설치, 인터넷뱅킹 신청, 신용카드 발급, 운전면허증 발급, 부동산 거래 등 우리의 디지털시대 경제활동이 주민등록번호라는 병영시대의 유산 위에서 이루어지게 되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인터넷 금융거래 보안정보의 기초인 주민등록번호가 다른 개인정보와 함께 유출되어 인터넷 금융범죄가 무기가 된 것이다.
이것은 주민등록제도 도입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디지털 부작용’이다. 2014년 1월에 터진 농협카드, 롯데카드, 국민카드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국회는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인터넷 본인 인증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남의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차제에 국민의 주민등록 번호 전체를 다시 만들고 국가기관 말고는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거나 보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지구촌 문명국가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주민등록제도를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주민등록번호는 대한민국의 진화과정에 병영국가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화석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