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수찌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버마인들의 열망이 무엇인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 주는 인물이다. 1988년 8월 26일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그녀는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이었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었다. 하지만 수개월이 지난 후, 특히 SLORC국법질서회복평의회이 만들어지고 난 후 아웅산수찌는 정치적으로 성숙했으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발전시켜 갔다. 아웅산수찌는 전국을 돌면서 연설을 하고 유엔 인권위원회에 서한을 보냈으며, 랑군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들을 만났다.(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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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는 여러 면에서 놀라운 책이었다. 제목은 1991년 쓴 에세이에서 따 왔다. … “우리를 타락시키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타락하게 되고,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폭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타락한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바로 이 에세이에 있다.(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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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이후 등장한 모든 정치인을 통틀어 아웅산수찌는 그 모든 버마 사람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군중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된 군인들이 트럭에서 내려 아웅산수찌의 연설을 경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일 것이다. 버마군 창설자를 아버지로 둔 덕분에 그녀는 무장한 채 자기 뒤에 선 군인들까지 불러모을 수 있는 힘을 발휘했다. 이 젊은 여성이 전국을 돌며 ‘새로운 버마’를 향해 가자는 전국적 캠페인을 계속하도록 놔둘 경우, 옛 지배 세력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곧 과거 속으로 사라질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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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부터 대학로 집에 갇힌 아웅산수찌의 외로운 투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군부는 주치의를 제외한 모든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한 가택 연금을 통해 아웅산수찌를 격리시켜 왔다. 또 군부는 아웅산수찌의 생일6월 19일을 비롯해 버마 관련 사안이 터질 때마다 가택 연금 해제를 촉구해 온 국제 사회의 외침을 철저하게 무시했다.(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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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NLD 동료들과 국민들을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국민은 단결해야 한다. 내가 NLD와 첫발을 떼었을 때 국경 지대로 간 학생들이 있다. 학생들뿐 아니라 존경받는 원로들 가운데도 무기를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무장만이 군부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본질은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학생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택한 방식을 섣부르게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비폭력과 시민 불복종에 대한 아웅산수찌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러나 자신이 민주주의를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한 학생들과 같은 편에 서 있다는 것도 분명히 밝혔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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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수찌의 힘은 사람들을 가까이 모아 자신의 메시지를 경청하게 만드는 능력에 있고, 그녀의 약점은 애매하고 너무도 형이상학적인 ‘정신 혁명’을 추구하는 데 있다. 아웅산수찌가 추구하는 마음과 정신의 단련만으로는 버마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아웅산수찌는, 민주주의로 가는 투쟁은 “자신의 마음을 닦는 고행”이라는 구스타프 하우프트만의 표현에 동의하겠지만, 아웅산수찌의 부친 아웅산은 “앞을 내다보며 좀 더 현대적이고 지적인 시각에서 지도력의 의미를 이해했다.”
아웅산수찌는 조국과 국민들에게 진실로 헌신해 왔으며, 가택 연금으로 고립된 긴 시간 동안에도 그 헌신은 조금도 퇴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그녀가 1970년대 초 남편 마이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나듯이, 1988년 8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공식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웅산수찌가 아무리 부친의 못다 이룬 업적을 잇고 싶다고 밝힌다 해도, 종교적인 사색에 치우쳐 정치 계획과 비전을 묻는 시대의 요청에 분명하게 답하지 못하는 딸의 현재 모습을 아웅산이 봤다면 그대로 용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296~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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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버마의 미래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나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버마의 미래를 그린다. 우리 앞에 놓인 모든 문제들을 다 민주주의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나는 누차 얘기해 왔다. 민주주의를 세우는 일은 시작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다. 다만 다른 체제들보다 나을 뿐이다. 우리는 아시아식, 버마식 민주주의를 일굴 수도 있다. 어떤 체제가 들어서든 버마만의 특별한 체제가 될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민주주의와 똑같은 민주주의일 수 없다. 물론 근본적인 원칙들은 지켜야 하지만 항상 차이점이 있게 마련이다. 오랜 세월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SLORC의 기만 속에서 살아온 만큼 이러한 생각을 SLORC이 ‘버마식 민주주의’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할까 두렵기도 하다.”(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