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과 존엄의 퍼포먼스
… 우리가 오믈렛을 좋아한다고 해서 오믈렛이 우리에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이끌릴 때 그 사람이 나에게 긍정적인 신호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에게 이끌리고, 내가 더 크게 이끌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상대방도 나에게 더 강하게 이끌린다. 이처럼 서로의 반응에 반응하면서 반응은 더더욱 크게 확장되고, 각자의 반응이 향하는 방향은 이제 하나로 수렴된다. 이러한 인간적 상호작용의 특징을 성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타인을 존중할 때에도 동일한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중략) 나의 맞장구에 그는 내가 자신을 존중함을 알고, 더더욱 나를 존중한다. 그가 나를 존중하는 모습에서 나 역시 스스로를 존중한다. (중략) 우리는 서로가 욕망과 자존심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라는 점을 깊이 인정한 상태에서 연기를 했고, 이런 퍼포먼스는 우리의 존재를 더욱 밀도 있게 만들어준다.
반면 품격을 위한 퍼포먼스에서는 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실재를 공유할 필요가 없고, 서로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상호작용이 필요하지도 않다. 품격 있는 권력자의 고매한 태도를 연출할 때, 의전을 수행하는 실무자는 그 무대에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때로 장애인, 노숙인, 빈자들이 권력자의 도덕적 선량함을 빛내는 데 동원되지만, 그때에도 동원된 이들의 반응은 무대에 반영되지 않는다. 장애인복지시설에서 목욕을 도와주는 정치인의 얼굴은 드러나지만, 장애인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얼굴이 없다면 반응할 수 없다. 얼굴이 없는 존재, 익명화된 존재, 기호화된 존재는 오믈렛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상대방의 반응에 반응하지 못하며, 반응하더라도 상대는 그 반응을 무시하기 일쑤다. 품격에만 초점을 두는 퍼포먼스는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1인만을 위한 무대가 되기 쉽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로지 그에게 맞춰 움직일 뿐이다. 명품 가방은 당신의 품격을 높일 수 있지만, 더 값비싼 명품이 등장하면 그 최고가 명품의 품격을 위해 복무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국무총리는 복지관에서는 최고의 품격을 자랑하겠지만, 대통령 앞에서는 대통령의 격을 높이는 존재로서만 역할을 부여받을 뿐이다.
일상의 상호작용을 연기나 무대라는 말로 비유하는 것은 실제로 연극 공연이 이와 거의 동일한 본질을 갖기 때문이다. 공연에 참여하는 연출가, 기획자, 배우, 관객은 앞으로 무대 위에서 벌어질 일들이 가짜, 즉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안다. 다만 그저 약속할 뿐이다. ‘우리는 어떠한 예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 순간 잠시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기로 약속한다.’ 이 약속 자체는 모두에게 진실실재이며, 이들이 집단적으로 특정한 목표를 추구한다는 점 역시 실재다. 공연장에 들어오는 사람과 공연을 준비한 사람은 무대 위 조명이 켜지고 객석에 관객이 앉는 순간 그와 같은 약속에 참여한다. 여기에 참여하는 배우와 관객은 공통된 목표가치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동등한 주체다.
서로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공유하고, 그에 기초해 서로의 연기에 반응한다면 이때의 연기는 표면적으로 거짓이더라도 실재와 유리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상대방에게 시시콜콜 진실을 알리지 않고도 상대를 배려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선의의 거짓말은 상대방을 기만하지 않고도 그를 배려한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68~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