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소설가로 돌아온 태권이 여전히 사우나 매니저인 태권과 마주하는 소설 같은 상황에 불과했다. 목욕탕에서 막 젖은 수건을 수거하고 나왔을 때처럼 그의 푸른 셔츠는 땀에 펑 젖어 있었다. 아이스크림 팔면 어울릴 것 같은 그 셔츠는 여러 번 세탁한 뒤라 밑단이 우글거렸다.
“내 생각엔 말이야, 내가 너무 너를 쉽게 생각한 거 같아.”
사실 그 무렵에 나는 헬라홀에서의 사건들을 소설로 반절쯤 쓰다가 포기한 상태였다.
“쉽게?”
“그러니까 아이디어 하나로 너를 만든 거지. 1퍼센트 남자들이 벌거벗고 있는 남자 사우나! 거기서 일하는 소설가! 이거 괜찮은 그림이다 싶었던 거지.”
나는 맥주로 천천히 목을 축였다. 옆자리에 앉은 사우나 매니저 태권은 특유의 시큰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시중을 드는 헬라홀의 남자들은 은연중에 바라볼 때의 표정처럼 말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까 그래.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거야. 내가 쓰다가 포기한 소설에는 박봉에 착취당하는 인간의 고뇌가 없어. 내 실수야.”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닌데 헬라홀이 고뇌할 만한 장소는 아니잖아? 아니, 사람을 고뇌 없이 만드는 공간 아니었어? 글만 쓰는 사람이라서 인간이 사는 장소를 너무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잠깐, 나는 글만 써서 그런 게 아니라고. 너무 오랜만에 글을 써서 인간의 고뇌를 담을 수 없게 된 거지.”
하지만 생각해보니 푸른 옷을 입은 태권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헬라홀은 사람을 느슨한 풀밭을 떠도는 양들을 돌보는 양치기 개처럼 만드는 그런 곳이었다. 월급은 짰다. 하지만 바쁜 한두 시간 빼고는 너무 한가해서 그 월급도 괜찮다 싶었다. 정신없이 바쁜 여자 사우나보다 눈곱만큼 월급도 많고 일은 반절로 한가하니까. 투쟁 의지가 생기기는 해도 그냥 습식 사우나에 앉아 있는 인간처럼 그 의지가 푸시시시 가라앉는 곳이었다. 그럴듯한 불꽃 점화가 이뤄지기에는 쓸모없이 평온하고 고요했다.
“하지만 왜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고민하지 않는 걸까?”
나는 옆자리에 앉은 태권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민하잖아. 운동복이나 수건, 이런 거에 대해서.”
“아니 그런 거 말고, 작가로서 자의식이 없더라니까. 왜 내가 그곳에서, 그런 환경에서 일해야만 하는가, 하는 인간으로서, 남자로서, 작가로서의 고민 말이야.”
태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주로 나온 강냉이를 하나 씹었다.
“그래, 뭐 그렇다 치자. 그런데 생각해보라고. 태권은 자의식하고는 거리가 좀 먼 인간 아니었어?”
그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말하는 태권이 소설 속 자신인지 아니면 그 바깥에 있는 나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보라고. 그곳은 남자로서, 작가로서 쓸데없이 자의식이 강한 인간이라면 지극히 불쾌하게 느껴지는 곳이야. 소설을 쓴 네가, 아니지, 소설의 주인공인 내가 자의식이 강한 인간이라면 그곳에 존재할 수 없었던 거라고. 그러니까 넌 그렇게 썼던 거야.”
소설 속의 태권은 뭔가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남은 맥주 반병을 벌컥거리며 마셨다.
“그래도 넌 멍청해. 난 그렇게 멍청한 인간은 아니야.”
“누워서 침 뱉기네.”
옆자리의 태권은 빈정거렸다.
“왜 소설 속의 너는 관찰만 하지? 왜 비판하지 않아? 왜 날을 세우지 않아? 그게 비판적 주인공의 의무 아니냐고.”
태권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알잖아, 투명해지잖아.”
“뭐가?”
“기억 안 나? 사람이 물처럼 투명해지잖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변하잖아. 주르륵 흐르고, 또 미끄러지고, 아무것도 없어지고.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보고 관찰하는 게 전부잖아. 무언가 복잡하게 생각하면 엉켜버리니까.”
(중략)
하지만 헬라홀에서 빠져나오니 나는 여전히 단단하고 두터운 관념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헬라홀에서 보았던 1퍼센트 남자들이 보여준 1퍼센트 남자여야만 한다는 고정관념과도 다른 듯 비슷했다. 나는 여전히 어리석었다.
두 개의 단단한 무엇 사이에 끼었다가 새어 나오는 방귀처럼,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웃음이 나왔다.
“미안, 내가 너를…… 아니 나를 비웃는 건 아니야.”
그래, 그건 비웃음이 아니었다. 온전한 웃음이었다. 웃는 건 중요하다. 단단한 세계의 벽은 웃음 덕에 구멍이 나면서 조금씩 허물어진다. 그 벽에 구멍이 뚫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우리가 사는 관념의 세계는 아주 단단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웃음 때문에 작은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으로 빈틈이 보이면서 무너진다. 헬라홀에 빠진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너무 단단한 사람들도 그걸 모른다. 각자의 관념의 링 속에서 돌고 있으니까. 하긴 세상 사람 누구나 세상을 쉽게 말하지만 결국 우리는 빈 맥주병 공기에 불과한 존재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자 맥주병 안에 든 생쥐가 된 것처럼 귀가 먹먹해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