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을 잃기 전까지 때로는 서기관이 독서를 돕기도 했다. 결국 장군은 안경의 번거로움 때문에 서기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독서에 대한 흥미가 점점 줄어들었다. 항상 그랬듯이 장군은 문제의 원인을 객관적인 것으로 돌렸다.
“좋은 책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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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의 설명에 따르면 볼리바르는 젊은 시절에 탐욕스러운 독서가였지만 은퇴한 뒤로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이에 대해 그 스스로 찾은 이유는 “갈수록 좋은 책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이는 우리가 책을 읽지 않거나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을 때 남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곧잘 하는 말이다. 이 말이 진실일까?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결정하는 요소
좋은 책이 갈수록 많아진다고 하는 것은 대체로 합당하다고 할 수 없다. 좋다는 것은 불안정하다는 것이고 불규칙한 모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물리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뛰어난 물리학들의 행위를 살펴볼 때, 그들이 정말로 유행과 트렌드를 추구하고 잘 나가는 가수나 밴드를 추앙하는 소년 소녀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책을 동물에 비유한다면, 이 동물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음식은 바로 ‘자유’다. 남몰래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훌륭한 저서의 저자나 독자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억지로나마 그 옛날 레닌이 남긴 명언을 인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출신을 배반했고, 저자이자 독자라는 신분을 저버렸다.”
무관계한 사람
영국 런던의 고서점가 채링크로스Charing Cross는 몸부림치면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좋은 책이 끊임없이 쏟아져 독자들은 읽을 책이 없다는 한탄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좋은 책은 축적되기도 한다. 책은 일단 사회에 들어오면 쉽게 퇴출되지 않는다. 어쩌면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연쇄점식 서점에서는 경제적으로 매력 없는 책들을 서가에서 빼버릴지도 모른다. 하짐반 독자들은 그런 책을 소장한다. 자기 서가에 소장하고 기억 속에 소장하고 말과 글 속에 소장하는 것이다.
훌륭한 독자라면 용감하고 강해질 필요가 있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부인 페넬로페를 만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던 오디세우스처럼 괴물들의 위세에 기죽지 말고 요정 세이렌의 유혹의 노래에 넘어가지도 말아야 한다. 소란스럽지 않고 울부짖지도 않으며 아양을 떨지도 않는 적막한 서가를 향해 가야 한다.
불량한 책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방대한 책의 바다를 구성하는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나머지는 우리가 ‘보고 싶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는’ 그런 책들이다. 이처럼 다양한 언어 표현도 사실은 한 가지 생각으로 묶을 수 있다. 우리는 광양자의 특성을 알고 싶지도 않고 소립자가 왜 파동인지를 연구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케인스학파와 신자유주의학파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얼굴을 붉혀가면서 논쟁을 벌이는지 알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한 머나먼 사모아에 사는 사춘기 여자 아이의 생각이나 생활 방식에 관해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마테오리치가 어떤 경로로 이탈리아를 떠나 중국으로 갔는지 세세하게 알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19세기에 일찌감치 사할린으로 추방당해 이제는 시체조차 찾지 못하는 가련한 러시아인들의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든 일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이 세계 전체가 존재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일본인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가져 이를 직접적으로 ‘무관계無關係’라고 표현한다. 이는 모종의 소박한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어 결국 철저히 냉담해지고 철저히 잊히는 형태가 구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인들이 ‘무관계’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원자화되어 섬처럼 살아가는 현대 대도시 사람들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때로는 이 단어로 대국으로서의 책임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결국 아시아 동북쪽의 한 부유한 섬으로만 존재하는 일본을 비유하기도 한다. 여기서 내친김에 토크빌의 말을 인용해 보자. 이는 200년 전 유럽의 전제정치 체제 밑에서 살았던 백성의 어떤 실황을 묘사하기 위해 한 말이지만, 주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고 관계가 끊긴 ‘무관계’한 사람들의 초상을 상당히 생생하고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일부 국가의 국민은 스스로를 외부에서 온 이주민으로 간주하면서 그 땅에 사는 운명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일부 커다란 변화도 그들의 찬성과 동의를 거친 적이 없다. 그런 변화들은 그들이 아는 일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다. 아니,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마을의 상황이나 거리의 경찰, 마을 교회나 목사의 집을 수리하는 것 등도 전부 그들과 무관한 일이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정부나 세력 있는 낯선 사람들의 소관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것에 대해 영구적인 소유권만 가질 뿐 소유주의 신분은 아니다. 따라서 이를 개선하려는 어떠한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 세상사에 대한 무관심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본인이나 자녀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다면 위험과 재난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두 팔 벌리고서 전 국민이 와서 도와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희생시킨 사람들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복종을 좋아할 것이다. 그렇다. 이런 사람은 가장 형편없는 관리 앞에서도 복종을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패전의 정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강한 적이나 세력이 나타나면 뒤로 물러나 법률은 안중에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영원히 노예근성과 방종 사이에서 방황할 것이다.”
도적이 오면 도적을 맞고, 도적이 가면 관리를 맞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무거운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이런 사람들은 책을 읽으려 할 리가 없다고 말할 뿐이다. 그들 앞에 읽을 책이 없다면 그에게는 독서를 시작할 어떤 동기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전에 책을 읽었다면 아주 빨리 독서의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는 뒷걸음질을 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