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도덕적인 것 중에 최초의 것은 건설의 기쁨을 경험하는 데서 시작된다. 아이가 자기가 만든 건축물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부탁할 때 당신은 아이에게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망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시킬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노동의 대가, 즉 사회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고 사유재산을 얻는 유일한 원천인 노동의 대가를 존중하게 된다. 당신은 또한 아이에게 인내심, 지구력과 관찰에 대한 유인 동기를 주게 된다. 이런 성질이 결여된다면 아이는 그의 마음에 드는 높이만큼 탑을 쌓지 못할 것이다. 아이와 놀이를 할 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아이의 야심을 충분히 자극하는 일이며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여 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아이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아이가 마당에 나오게 되면 좀 더 공들인 형태로 건설이라는 것을 쉽게 배울 수 있다. 마당에 나온 아이의 첫 충동은 예쁜 꽃을 모두 따 버리는 거다. 꽃을 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단순히 금지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어른이 아이의 모범이 되어 꽃을 꺽지 않고 정원을 잘 가꾸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노동을 알게 해 줄 때 아이의 존경심을 얻을 수 있다. 아이가 세 살쯤 되면 정원 한구석에 씨를 심어 보게 한다. 잎이 나오고 꽃이 피어나면 아이는 그 꽃을 아끼는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엄마가 심은 꽃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건설과 성장에 대한 흥미를 발달시킴으로써 가장 쉽게 영향을 주는 것은 생각 없이 잔인해지는 행동이 없어지는 점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은 자라면서 파리나 다른 곤충을 죽이려 든다. 이런 행동은 나아가 좀 더 큰 동물을, 그리고 마침내는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보통 영국의 상류층 가정에서는 새를 죽이는 일은 칭찬할 만한 일이며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가장 고귀한 직업으로 간주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훈련받지 않은 본능과 일치한다. 즉 이런 태도는 어떤 형식이든 건설적인 기술을 가진 적이 없는 사람의 태도다. 따라서 그들의 권력에의 의지를 순수하게 구체화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들은 꿩을 잡아 죽이고, 소작인을 고통스럽게 한다. 일이 생기면 그들은 코뿔소든 독일인이든 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유용한 기술에 있어서는 전혀 무능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 부모나 선생이나 그들을 영국신사로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출생 시부터 다른 나라 아이들보다 바보로 태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른이 된 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결점은 전부 잘못된 교육 때문이다. 만일 어려서부터 다음과 같은 도덕적 훈련을 받고 자랐다면, 즉 삶의 가치를 자기 것으로 지키는 애정을 갖고 성장할 수 있었다면, 건설적인 기술의 형식을 습득했다면, 근심 걱정을 하면서 겨우 만들어진 것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쉽게 무너지는지 이해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이와 동일한 것을 만들거나 보살피는 것을 그렇게 쉽게 파괴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성장한 후 이런 문제를 가장 잘 가르쳐 줄 사람은 부모 외에는 없다. 그러나 부유층에서는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자기 아이들을 월급 받는 전문가에게 맡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파괴적인 성향이 나타나기 전에, 그들이 부모가 되기까지 우리가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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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한 건설적인 것은 단지 물질적인 건설만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연극을 하거나 합창을 할 때에도 물질적인 것이 아닌 협동성이 포함되어 있다. 합창이나 연극은 많은 어린이들과 청소년을 즐겁게 해 준다(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면). 순수한 지적인 문제에서도 건설적인 혹은 파괴적인 경향을 갖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적인 교육은 거의 전부가 비판적인 것이다. 아이는 실수를 피하는 것을 배우고 실수를 저지를 아이를 경멸하는 것을 배운다. 이런 것은 일종의 냉정한 정확성을 산출하기 쉽다. 이런 정확성에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독창성이 권위에 대한 존경으로 대체된다. 정확한 라틴어는 한 번 정해지면 확정되는 것이다. 즉 베르길리우스(Virgil)나 키케로(Cicero)의 라틴어가 그렇다. 과학은 정확하지만 계속 변화한다. 유능한 젊은이는 이 과정에 도움이 될 전망을 보여 줄 것이다. 결과적으로 과학교육에 의해 생긴 태도는 죽은 언어로 공부한 것보다 훨씬 더 건설적이라 할 수 있다. 실수하지 않는 것만이 중요한 목표가 된다면 교육은 지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의 지식으로 어떤 모험적인 것을 해 보겠다는 기대는 모든 유능한 남녀청년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너무도 흔히 고등교육은 어딘지 예의범절과 비슷한 데가 있어 보인다. 예의범절은 단지 어법에 어긋나는 작은 실수를 피하는 그런 소극적인 규범일 뿐이다. 이와 같은 교육에는 건설이라는 것은 잊혀진 것이다. 이런 형태의 교육이 만들어 내는 것은 기껏 사소한 것에 매달리거나 진취성도 없는 그리고 관용성이 결여된 것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적극적인 성취를 교육의 목표로 세우면 피할 수 있는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교육론』, 안인희 옮김, 서광사, 2013, 115 ~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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