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정신은 지금 천지가 창조되던 혼돈한 상태에 있고 또 천지가 노쇠하여서 없어지는 혼돈한 상태에 있다. 그는 하나님이 장차 빛을 만들고 별을 만들고 하늘과 땅을 만들려고 고개를 기울이고 이럴까 저럴까 생각하는 양을 본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결심을 다 하고 나서 팔을 부르걷고 천지에 만물을 만들기 시작하는 양을 본다. 하나님이 빛을 만들고 어두움을 만들고 풀과 나무와 새와 짐승을 만들고 기뻐서 빙그레 웃는 양을 본다. 또 하나님이 흙을 파고 물을 길어다가 두 발로 잘 반죽하여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놓고 마지막에 그 사람의 코에다 김을 불어넣으매 그 흙으로 만든 사람이 목숨이 생기고 피가 돌고 소리를 내어 노래하는 양이 보인다. 그리고 처음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한 흙덩이더니 그것이 숨을 쉬고 소리를 하고 또 그 몸에 피가 돌게 되는 것을 보니 그것이 곧 자기인 듯하다. 이에 형식은 빙긋이 웃는다. 옳다, 자기는 목숨 없는 흙덩어리였었다. 자기는 자기의 주위에 있는 만물을 보지도 못하였었고 거기서 나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였었다. 설혹 만물의 빛이 자기의 눈에 들어오고 소리가 자기의 귀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는 오직 ‘에테르’의 물결에 지나지 못하였었다. 자기는 그 빛과 그 소리에서 아무 기쁨과 슬픔이나 아무 뜻도 찾아낼 줄을 몰랐었다. 지금까지 혹 자기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마치 고무로 만든 인형(人形)의 배를 꼭 누르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것과 같았었다. 그러므로 그 웃음과 울음은 결코 자기의 마음에서 스스로 흘러나온 것이 아니요 전혀 타동적(他動的)이었었다.
자기가 지금껏 ‘옳다’ ‘그르다’ ‘슬프다’ ‘기쁘다’ 하여온 것은 결코 자기의 지(知)의 판단(判斷)과 정(精)의 감동(感動)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온전히 전습(傳習)을 따라, 사회(社會)의 관습(慣習)을 따라 하여온 것이었다. 예로부터 옳다 하니 자기도 옳다 하였고 남들이 좋다 하니 자기도 좋다 하였다. 다만 그뿐이로다. 그러나 예로부터 옳다 한 것이 자기에게 무슨 힘이 있으며 남들이 좋다 하는 것이 자기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내게는 내 지(知)가 있고 내 의지(意志)가 있다. 내 지(知)와 내 의지(意志)에 비추어 보아 ‘옳다’든가 ‘좋다’든가 ‘기쁘고 슬프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면 내게 대하여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는 내가 옳다 하던 것도 예로부터 그르다 하므로 또는 남들이 옳지 않다 하므로 더 생각하지도 아니하여보고 그것을 내버렸다. 이것이 잘못이로다, 나는 나를 죽이고 나를 버린 것이로다.
자기는 이제야 자기의 생명을 깨달았다, 자기가 있는 줄을 깨달았다. 마치 북극성(北極星)이 있고 또 북극성(北極星)은 결코 백랑성(白狼星)도 아니요 노인성(老人星)도 아니요 오직 북극성(北極星)인 듯이, 따라서 북극성(北極星)은 크기로나 빛으로나 위치(位置)로나 성분(成分)으로나 역사(歷史)로나 우주(宇宙)에 대한 사명(使命)으로나 결코 백랑성(白狼星)이나 노인성(老人星)과 같지 아니하고 북극성(北極星) 자신(自身)의 특징(特徵)이 있음과 같이, 자기도 있고 또 자기는 다른 아무러한 사람과도 꼭 같지 아니한 지(知)와 의지(意志)와 위치(位置)와 사명(使命)과 색채(色彩)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형식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달았다.
형식은 웃으며 차창으로 내다본다.
- 이광수, 『무정』, 문학과 지성사, 2005, 251~2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