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한 긴장을 못 이겨, 신문이며 잡지를 펼쳐 들었던 사람들도 모두 황량한 겨울의 조국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김구 주석은 그 무엇을 구상하는지 끝내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엔 참모총장 유 장군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고 무슨 기획을 하시는지 손끝을 조금씩 흔들고 계셨다. 수송기의 고도가 떨어졌다.
인천이 발아래로 깔리고 우리는 김포의 활주로를 돌고 있었다.
정각 4시.
우리는 김포비행장이라는 벌판 위에서 한줄기 활주로를 놓고 선회를 마친 뒤, 아랫배가 허전해 오는 착륙을 기도했다. 이윽고 비행기가 활주로에 들어섰다. 알 수 없는 심회가 꼿꼿이 굳어졌다. 이제 조국에 돌아왔다. 곧 땅을 밟고 그리운 동포의 그 표정을 보리라.
아, 그리운 사람들아, 내 동포여.
두서너 번의 충격으로 굳어졌던 긴장이 다시 풀리고 우리는 무사히 착륙을 마쳤다.
벨트를 풀었다. 모두들 일어섰다. 뻐근한 허벅지의 긴장이 뻣뻣한 채였다.
김구 주석이 앞서고 그 뒤를 따라 엉거주춤하고 서 있었다.
미 공군 하사관이 기체의 문을 열어 제겼다.
'화악' 하고 고운 바람이 조국의 냄새를 불어 넣어 주었다. 나는 심호흡을 들이켰다. 기어간 산등성이가 멀리 부옇게 보였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미군 ‘지·아이’들 뿐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조국의 11월 바람은 퍽 쌀쌀하였고, 하늘도 청명하지가 않았다.
너무나 허탈한 상태에서 나는 몇 번이나 활주로의 땅을 힘주어 밟아 보았다.
*장준하(1918~1975)
사진출처: 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 http://www.peacewave.or.kr
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는가. 우리가 갈망한 고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인가. 나는 소처럼 발에 힘을 주어 땅을 비벼대었다.
이윽고 일행 열다섯 명이 김구 주석을 따라 정렬하는 식으로 서자, 한 미군 병사가 비행장에 와있는 장갑차를 가리키며 승차를 알려 주었다.
나부끼는 태극기, 환성의 환영, 그 목 아프게 불러 줄 만세 소리는 환상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고 거무푸레한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우리는 승차에 앞서 경건히 목을 떨구었다. 우리는 망명에 성공하여 이제 산목숨으로 돌아와 이 땅을 밟고 섰다. 그러나 그 얼마나 많은 애국투사가 이 땅 위에서 또는 이역만리에서 그대로 넘어지고 숨지었던가.
경건히 목을 떨구고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조국광복의 이 보람이 우리들에게가 아니고 선열들에게 돌아갈 것을 빌었다. 그들의 피가 스며든 땅에 서기가 송구스러웠다. 한 삼 분이 지났을까 우리는 정신을 겨우 다시 가다듬었다.
탱크처럼 된 장갑차는 여섯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지·아이’들이 정렬해 있었고 시무룩하게 우리를 바라보는 표정에 우리들의 시선이 닿자, 우리는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외국군대가 해방군으로 와 있는 조국의 분위기가, 청명한 강만비행장에서의 상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우리는 두 서너 사람씩 나누어 장갑차에 분승하였다. 미군들의 행동도 극히 냉담했고 무표정했다. 장교가 인솔했다.
그들이 잠시 분주히 움직이고, 문이 닫혔다.
장갑차는 장갑자동차였다. 한 줄로 천천히 김포비행장을 출발했다. 우리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환국을 곰곰이 차 안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군용차도 아니고, 밀폐된 장갑차에 분승되어 아무도 모르게 김포비행장을 나왔다. 비행기의 기창과 같은 ‘세르로이드’ 창이 고국의 풍경을 보여 줄 뿐이었다. 일어서고 싶어도, 일어나서 마음껏 김포가도의 풍경을 바라보고 싶어도 구태여 앉으라는 것이다.
미군 병사들은 단순히 그들의 군사행동으로만 행동했다. “하나의 작전일 뿐이다.” 이것이 이유이다.
차창으로 농부가 보였다. 흰옷 입은 백의의 농민이 소를 몰고 길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태극기를 앉은 채로 올려서 그 농민에게 흔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것도 제지당하고 말았다.
울적한 십일월의 환국은 너무나도 우리들의 심정을 몰라주는 것이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어느 것 하나 꿈에도 그리던 것이 아닌가.
아무라도, 맨 먼저 만나는 농부에게라도, 맞붙잡고 실컷 울고 싶건만, 그러나 우리는 미군의 작전 대상물로 장갑차에 실려 가고 있다. 불투명한 장갑차 차창으로 보이는 고국강산의 첫선이 너무나도 무표정하였다. 차창에 담기는 풍경은 중국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냐?
소를 앞세우고 무심코 길을 비키는 농부, 그 농부는 아마 미군용차가 많이 지나가는구나, 이렇게 혼자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이 행렬 속에 김구 주석이, 삼천만의 희망이여 혁명투사인 민족의 지도자가 들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하리라. 안타까움이 농부의 표정을 일그러지게 만든다. 내가 그렇게 보는 것이다. 이 답답한 노릇이 조국의 운명을 끝까지 기막히게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이윽고 한강철교를 건넜다.
흐르지 않고 담겨 있는 듯한 물이 한쪽 기슭으로 모여 십일월의 초겨울을 달래이고 있을 뿐이다. 거리엔 어느새 어둠이 나직이 펴지고 행인들도 별로 많지 아니했다. 언제나 상상과 현실에는 엄청난 거리가 개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때때로 그것을 잊을 정도의 흥분 속에서 곧 실망과 허탈을 느끼곤 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나는 장갑차 안에서 이런 신념을 굳게 결정하고 있었다.
용산의 거리는 벽보투성이였다. 격문과 포고문의 벽보가 덧붙여져 어지러웠다.
우리가 서울역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갑자기 서울역사가 작아진 것을 발견하였다. 내가 학병으로 나가기 전 일본서 돌아올 때만 해도 그때 경성역은 놀라울 정도로 큰 규모로 보였던 것이었건만, 이제 중국과 상해를 돌아오는 이 길에선 한낱 성냥갑같이 작은 한 채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5시가 조금 지나 서대문의 경교장(京橋莊)으로 들어섰다. 예전대로 동양극장은 그대로 극장이었다.
이 경교장은 그때 광산왕이란 별명이 붙었던 최창학이란 분의 개인저택이었다. 지금의 고려병원이다. 임시정부의 환국을 위해 국내에서 이미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있었고 이 준비 위원회는 숙소로서 이 경교장과 충무로에 있는 한미호텔 - 지금의 신도호텔 - 두 곳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우리는 곧장 경교장으로 장갑차에 탄 채 안내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경교장 안에 들어와 장갑차를 내릴 때까지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 자체도 전연 우리들의 입국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장갑차 여섯 대가 차례로 멎고 일행 15명이 내리자 미군차는 그대로 철수해 버렸다.
근일중 입국한다는 막연한 정보만 알고 요인 숙소를 마련, 이를 군정당국에 알리고 있던 준비위원회는 너무나도 뜻밖이라 김주석을 보고도 멍하니 움직이질 못했다.
우리는 이곳서 여장을 풀었다. 조국의 품에 다시 안긴 노혁명투사는 27년만에 고국의 수도 서울에 그 몸을 편히 머물게 한 첫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