헵타포드들은 자유롭지 않지만 속박당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 개념들을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력한 자동인형인 것도 아니다. 헵타포드의 의식 양태를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그들의 행위가 역사상의 사건과 일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동기 또한 역사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해내고, 연대기를 실연해 보이기 위해 행동한다.
자유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순차적 의식이라는 맥락에서는 완벽한 현실이다. 동시적 의식의 맥락에서 보면 자유는 의미가 없지만, 강제 또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맥락이 서로 다를 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타당하다거나 덜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유명한 착시 현상을 닮았다고나 할까, 고개를 뒤쪽으로 돌린 우아한 젊은 여인으로도 보이고, 턱이 가슴에 묻힐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울퉁불퉁한 코를 한 노파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그림의 경우처럼 ‘올바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양쪽 모두 동등하게 타당하다. 그러나 두 그림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었다. 나로 하여금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 또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래를 아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행위를 포함해서, 나는 결코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아는 사람들은 미래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세월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VCR을 켜고 포트워스 체경에서 행해진 세션을 녹화한 카세트테이프를 넣었다. 통역을 맡은 버하트를 통해서 외무 교섭 담당자가 헵타포드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다.
교섭 담당자는 애타주의의 개념을 전달하는 토대를 쌓을 작정으로 인류의 윤리적 통념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헵타포드들이 이 대화의 최종적인 결말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열성적으로 이 대화에 임했다.
만약 아직 진상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내가 이 광경을 묘사했다면, 이런 질문이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헵타포드들이 자신이 말하거나 들을 얘기를 이미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다면, 그들이 언어를 사용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타당한 의문이다. 그러나 언어란 단지 의사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어는 행위이 한 형태이기도 했다. 언어행위이론에 의하면 “당신은 체포되었습니다” “나는 이 배를 이렇게 명명하노라” 혹은 “약속하겠어” 따위의 서술문들은 모두 수행문이다. 발화자가 이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말을 입 밖에 내서 말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 행위의 경우, 앞으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결혼식 하객들은 누구나 “이제 이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실제로 목사가 그 말을 할 때까지 결혼의 의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수행문적 언어에서, 말하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것과 등가인 것이다.
헵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그렇다. 어떤 대화가 됐든 헵타포드들은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