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에게 책을 권할 때는 ‘이 책을 과연 재미있게 읽을까’ 하는 우려 반 기대 반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실망한다면 ‘어른들이 그렇지 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만족했다면 ‘이 사람은 믿을만하군’ 하는 다정한 눈빛을 받을 수 있겠지요. 서로에게 흡족한 한 권의 책을 고르는 일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친구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막상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상당한 책임이 따르고 좀 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을 들여 마음을 여는 것도, 그들의 삶과 마주하는 것도 기술을 넘어 ‘진정으로 공감하는가’의 문제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 오롯이 책으로 만나 즐기고 누리려면, 무엇보다 현실의 어린이를 우리 고민의 중심에 잘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책이 우선 ─ 작가, 출판권정생은 자신의 동화를 말하는 자리에서,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어른들에게도 읽히게 된 것은 “아마 한국인이면 누구나 체험한 고난을 주제로 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 “서러운 사람에겐 남이 들려주는 서러운 이야기가 한결 위안이 되고 그것이 조그만 희망으로까지 이끌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원종찬 <권정생의 삶과 문학> 중에서
권정생 선생님이 품고자 한 ‘한국인이면 누구나 체험하는 고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새해 다수의 신문 지면을 장식한 ‘우리나라 어린이 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 OECD 국가 중 6년째 최하위’라는 글들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을 만큼 무뎌진 감성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재난지역의 아이들을 칭하는 ‘위기의 아이들’이 우리에게는 모든 아이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현실에 절망을 느끼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우선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야기로 아이들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일에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부풀려지고 왜곡된 책문화가 무엇인지 가려내는 일도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공감할 만한 책을 찾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단 한 권의 책이어도 진짜배기 위안을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응원은 확실하게 ─ 서로의 마음을 읽는 책모임어린이문학은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라는 응원을 아이들에게 보내려는 마음이 어린이문학이 생겨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책으로 가는 문> 중에서
이런 응원의 마음을 모아 아이들에게 전달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윗글에서는 책 읽기를 응원의 말을 건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들도 책을 읽으며 마음속의 말로 답을 하는 거지요. 한 권의 책을 전하는 일과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공감하는 일에 좀 더 정성을 쏟아야겠습니다.
이왕 응원을 하려면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고 눈을 마주보는 일들도 일부러 더 많이 하면서, 언어나 글이 아닌 표정이나 몸짓으로 하는 말도 잘 알아채야겠습니다. 눈치 빠른 어른이 되는 교육을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만 해대는 어른들의 입을 막고 경고장을 주는 것도 해 볼 일입니다.) 아이들의 자리에서는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듣는 어른이 귀한 존재겠지요.
독서와 토론이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름답게 보고 귀 기울이는 감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런 감성을 단련하는 활동에 ‘들어주고 공감하는 책모임’이라는 이름을 붙여봅니다.
몸으로 느끼고 부딪히는 책 읽기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진리, 인간의 영혼을 생기 있고 분발하게 하는 진리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책을 나는 사랑한다. 이기적이지 않고 성실한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보답을 받을 것이고, 설령 다른 사람이 보답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에게 득이 될 만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책, 선망이나 시샘이나 탐욕이 얼마나 추하고 저열한 것인지 보여주는 책, 욕설을 하거나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입을 열고 뭔가 말할 때마다 살무사나 두꺼비가 튀어나오게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나는 사랑한다.요컨대 나는 진리와 정의에 대한 신뢰를 북돋는 역할을 하는 책을 사랑한다.─ 폴 아자르 <책·어린이·어른> 중에서
문제는 마주하게 되는 현실입니다. 착하고 성실하고 정의로운 행동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것은 책 속 이야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어른들입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다 실감 나려면, 내용을 현실로 내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연극이나 놀이로 겪어보는 것입니다. 몸으로 직접 이야기를 따라가 보고, 어떤 자리에 서서 감정을 느껴보는 일은 아이들에게 흥미로운 책 읽기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부담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역할놀이. 이런 공감의 책놀이를 특별한 날을 위해 연습하는 공연이 아니라 일상에서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가치에 대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소근육 키우기. 몸으로 하는 책 읽기는 어린이들이 무척 즐거워하는 놀이지만 아직은 기회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이야기꾼’을 살려내자글을 깨치지 못했던 할머니는이따금유식한 이웃의 곰보 아저씨 불러다 놓고집안 식구들 모조리 방에 들라 하여소위 낭독회를 열곤 했다책 읽는 소리는 낭랑했고 물 흐르듯듣는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그리하여 밤은 깊어만 갔다─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야기꾼’ 중에서
한 권의 책을 눈으로 읽는 것과 듣는 이야기로 만나는 것은 같은 텍스트임에도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여럿이 함께 낭송·낭독의 체험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이야기는 마치 음악처럼 귀를 통해 마음으로 들어와 온몸의 감각을 깨웁니다. ‘모두 숨을 죽인 채’ 이야기 속에 빠져든 경험은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막강한 힘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합니다. 첨단 디지털문화의 시대에도 이야기의 힘은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아직 살아있는 듯합니다. 차세대 ‘책 읽는 문화’를 말할 때 그 한 자락은 이야기의 맛을 제대로 알아 이야기로 놀 줄 아는 ‘꾼’들의 몫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