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 교수(전남대, 철학)가 “사회주의 혁명으로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며 피 흘리지 않고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로 ‘노동자 경영권’을 제시했다. 그는 이 ‘노동자 경영권’이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략전술로 쓰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상봉 교수는 지난 5월 2일 연세대 진보신당 청년학생위원회 주최로 열린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출간 기념 공개토론회에서 이 같이 주장했다. 김상봉 교수의 저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기업을 내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자본주의에 철학의 메스를 가한 책이다. (▶책 본문 보기)
지난 5월 2일 연세대 진보신당 청년학생위원회 주최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출간 기념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는 이 책의 저자인 김상봉 교수 외에도 곽정수 한겨레21 기자(좌)가 토론자로,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우, 『신자유주의의 탄생』 저자)가 사회자로 동석했다. |
그는 이 같은 책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국가와 자본주의를 어떻게 지양하고 해체해야 하는지 오랫동안 고민해왔다”며 “기업에 의해 해체되고 있는 국가를 어떻게 인간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할 것인가는 우리 시대 절실한 과제”라고 천명했던 함석헌 선생의 말을 인용했다.
경제학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기업에 철학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 것과 관련해서는 “철학은 원래부터 총체성, 보편성의 학문이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업 역시 철학의 탐구 영역”이라며 “오히려 경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현재 철학이야말로 현실과 유리된 무가치한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기업 관련 학문, 즉 경제, 경영학, 법학에 대한 비판도 덧붙였다. 그는 “법학자들은경영권을 학문으로 논할 때 실정법을 넘어서지 못하고, 기업이론이라 말할 수 있는 경영학은 자본주의를 견인하는 기업을 진보적 관점에서 낱낱이 해체하지는 못할망정 자본가가 어떻게 하면 자본의 출정을 위해 조직 관리를 잘할 수 있는가를 논하는 반동적인 학문이 되었다”고 철학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김상봉 교수에 따르면 주식회사라는 ‘존재의 집’을 사람들은 마치 소유할 수 있는 사물처럼 사고하지만,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생산 공동체이다.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의 공동체이므로 대표만 있을 수 있다. 대표는 ‘소유’가 아닌 ‘활동’을 대표해야 하는데, 기업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노동자이므로 노동자가 대표가 돼야 한다. 이것이 그가 ‘노동자 경영권’을 주장하는 논리적 배경이다.
그는 “지금처럼 사물(주식,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경영권을 갖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며 노동자 경영권을 통해 “주식회사의 활동과 주식회사의 대표성 사이의 논리적 괴리를 해결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그는 “지금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렇게 바뀌는 순간 주식회사는 모두 작은 공화국, 아테네와 같은 폴리스가 될 것”이며 “이것이 자본주의를 피 흘리지 않고 넘어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고 노동자가 자기 노동 활동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김상봉 교수 |
김 교수는 노동자가 경영권을 가졌을 경우 사람들이 갖게 될 우려에 대해서는 ‘기우’라고 일축했다. 그는 “이런 염려를, 왕을 없애고 공화국 만들자고 했을 때 안 했겠나. ‘이 무식한 농민, 노동자들에게 투표권 주면 그 놈들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 지 알 수 있냐’는 말을, 그 당시 왕권신수설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안 했겠냐”며 “하지만 오늘 우리는 민주공화국에서 살고 있다”고 간단히 반박했다.
김 교수는 강연 도중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극복은 불가능하다는 말로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는 “역사에서 어떤 경우에도 완벽한 단절은 없다. 맑스조차 자본주의의 생산성은 포기하지 않았다”며 “자본주의에 대해 챙겨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갖고 토론해야 한다. 이 책이 그 토론의 출발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이 같은 ‘노동자 경영권’이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략전술로 사용되길 바랐다. 김상봉 교수는 “이제까지는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 경영권을 인정해주고 나서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요구했으나 이제 복수노조 시행으로 그마저 불가능해졌다”며 “노동운동이 살기 위해 경영권 자체를 운동의 투쟁 의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에서 노동자 경영권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김상봉 교수 외에도 한겨레21 곽정수 기자가 토론자로, 장석준 씨(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신자유주의의 탄생』 저자)가 사회자로 동석했다. 아래는 김상봉 교수의 강연과 토론 내용 전문이다.
“기업 하나하나를 작은 공화국으로”
왜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 김상봉
내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같은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역사는 꽤 오래됐다. 지금 재벌개혁 방향도 물론 문제지만 내가 처음 품었던 생각은 조금 더 깊은 데에서 시작됐다. 나는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철학자였고 지금도 철학자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경제적인 문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그런 문명사적 관심이 먼저였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근본적인 패러다임, 인류문명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강요받는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양되는 국가와 자본주의,
어떻게 인간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할 것인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 우리 시대, 포괄적으로 국가체제가 어떤 식으로든지 지양되어야 함을 요구받고 있는 시대다. 그 부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스승이 된 사람이 함석헌 선생이다. 나는 머지않아 함석헌이 오늘날 공자처럼, 우리 삶의 새로운 토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늘 얘기해 왔다. “국가의 역사가 지금 끝나가고 있는 때이고, 가족이 국가에 의해 지양되었던 것처럼 우리 시대가 국가가 세계에 의해 지양되어야 하는 시대”라고. 지금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 근저에 놓여있는 근본적인 문제의식 중에 하나가 바로 국가를 어떻게 지양할 것인가이다.
나는 국가는 어차피 기업에 의해 해체되고 있고 해체돼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생각과 같다. 지금 국가가 기업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은 절반은 필연적인 과정이며, 객관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자본주의 극복의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국가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갖고 있는데, 자본주의의 극복을 얘기하면 요즘 농담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 의제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진보신당 강령을 제정할 때 적극적으로 개진했던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자본주의 극복 의지를 명문화시켜야 된다는 거였다. 좌파정당, 진보정당을 자처하면서 자본주의 문제를 침묵하는 것은 무언가 올바르지 않은 거 같았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는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 또는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두 주제 모두에 있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야말로 세계 역사의 중심이라고 하는, 약간의 과대망상을 갖고 살아 왔다. 오늘날 근대국가의 극복과 자본주의 극복, 이 두 가지 모두에 있어서 한국 사회, 한반도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시금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장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남한/북한 체제 모두가 근대국가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나쁜 점을 결집해서 보여주고 있고, 근대국가의 모순을 가장 처절하게 노정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주사파는 아니지만, 통일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과제라 생각한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통일국가는 대 민족주의, 대 국가주의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고, 어쩔 수 없이 근대국가를 초극할 수 있는 길을 열 때만 도달할 수 있다.
한국의 재벌경제체제 역시 자본주의가 가장 고도화된 형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극단적 자본주의의 폐해를 노정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고도화 측면에서나 자본주의 폐해라는 측면에서 모두 한국사회의 문제,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를 푼다는 건 세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문제를 객관적으로 설득력 있게 해결할 수 있다면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돌파구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자로서 이런 고뇌를 갖고 학문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가 참으로 한심한 상황이다. 책에서 언급했던 바대로 함석헌 선생은 수십 년 전에, “근대국가는 본질적으로 기업국가이고, 기업이라는 게 근대국가의 모태에서 태동하는 것인데 지금 와서는 국가를 넘어서는 규모, 권력, 국가를 지양해버리는 집단, 단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인간적인 방식으로 기업, 그리고 국가, 또는 기업화된 국가를 재구성할 거냐, 새롭게 형성할 거냐가 우리 시대 절실한 과제”라고 늘 얘기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이래로 학문이 파편화된 결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학문적 주체가 없어져버렸다. 이게 내 진단이다. 기업의 경영권에 대한 물음이 내가 이 책에서 묻는 건데, “기업의 경영권은 누구한테 가야 되냐?”라고 물으면 이거 어떤 학문이 대답해주나. 경영학과에서 가서 보면 죽으나 사나 주주라고 얘기하고 자명한 것처럼 주주경영권을 얘기한다. 밀턴 프리드먼 같은 경제학자들이 “기업은 기업 소유한 주주들의 도구일 뿐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업을 소유한 주주’라는 말, 이거 거짓말이다.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한 소유자라는 말은 경제학 책을 펼쳐 놓고 읽어보면 어떤 경영학자도 그렇게 감히 주장하지 못한다.
주식회사도 ‘존재의 집’,
경제 탐구 않는 철학은 무가치하다
주식회사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토지도 아니고 토지 위에 놓여 있는 동산도 아니다. 기업을 주주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경제학적 관점에서도 틀린 얘기인데, 이 틀린 얘기를 번연히 하는 것이 경제학자들이고 경영학자들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해 오히려 경영학자보다 더 많이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법학자들이다.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현행 상법에 규정되는 대로 경영권의 향배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법학자들, 그중에서도 상법 또는 회사법 연구하는 사람들이 경영권을 학문으로 논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연구할 때 실정법을 넘어서지 않는다. 법학이란 게 주어진 법조문,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경우엔 판례들, 고작해야 다른 나라 사례를 연구하는 거지 근본적으로, 무전제로부터 소유라든지 권력에 대해 묻지 않는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상법을 보면―독일 같은 예외 있지만 대개―주식회사 경영권은 주주총회에서 법인이사를 뽑고, 이사들이 대표이사를 뽑아 대표이사가 최종적으로 가진다. 그러니까 그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걸 그냥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경영권이라는 건 권력이다. 권력과 인간의 자유는 떼려야 뗄 수 없이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은 경제학자, 경영학자, 법학자뿐 아니라 정치학자들이 반드시 관심 갖고 얘기해야 하는 부분이다. 인간의 자유와 권리라는 것은 국가의 시민으로서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기업 내에서 노동자로서도 문제가 되지 않나. 그것 역시 정치학에서 물을 수 있는 탐구의 대상인데, 정치학자들은 관심 없다. 그래서 ‘기업의 경영권을 누가 가져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천편일률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주주가 아니에요?’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고, 개인 기업과 주식회사가 아무 구분 없이 무차별하게, 마치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그렇게 얘기되어 온 것이다. 주식회사가 본격적으로 설립되어서 자본주의 경제를 견인하기 시작한 지 200년이 되어 가는데, 그동안 한 번도 정면으로 물어진 적이 없다.
나는 이것이 철학이 탐구할 영역이라고 본다. 요즘 흔히 통섭이라는 말을 하는데, 통섭을 말하는 사람들이 철학과에 와서 한 학기만 배웠으면 그런 말 안했을 거다. 통섭이라는 말을 쓰기 전부터 철학은 총체성, 보편성의 학문이어서, 200년 전이었다면 이 문제를 헤겔이 탐구했을 것이다. 우리는 수리철학, 예술철학, 종교철학까지 안 가르치는 철학이 없다. 뒤에 철학만 붙이면 다 철학에서 가르치는 거다. 근데 딱 하나 없는 게 있다. 그게 경제철학이다. 헤겔이 죽은 뒤엔 그 작업을 맑스가 했는데 맑스는 철학자로 있다가 답답하니까 자기가 경제학자가 되어 버린 경우이다.
그리고 그 이후 철학이 전체로서 현실과 유리되기 시작한다. 헤겔 이후의 철학은, 감히 말씀드리건대, 없어도 좋은 철학이다. 무가치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인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존재자로서의 존재를 가르치는 게 형이상학인데 그 존재자 속엔 주식회사도 들어간다. 주식회사의 경우 실제로 존재의 집이다. 우리 모두가 어떤 주식회사, 또는 주식회사 형의 공동체에서 벌어먹고 살아가지 않나. 그런데 주식회사로서의 존재자가 어떤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인가라는 걸, 철학이 근원적으로 비판해주지 않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이 제 마음대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념이 그렇게 허술할 수 없고 그렇게 제멋대로일 수가 없다. 소유에 대해 말하면서 도대체 소유의 주체는 누구고 객체는 무엇일 수 있는지, 어떤 철저한 비판도 없이 말하기 시작한 게 19세기 중반 이후의 학문 상황이다.
주식회사는 생산활동 목적으로 한 ‘사람들의 공동체’,
활동 주체인 노동자가 대표 돼야
주식회사라는 것이 생기면서 비로소 법학에서 법인이라는 이전엔 없던 개념이 생긴다. 자연인으로서의 인격을 말할 순 있어도 법적인 인격자가 가능하냐. 주식회사가 1825년에 합법화되면서 주식회사가 법적인 권리주체로서 사회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동하게 되는데 그 이후에 법학자들이 이 정체를 어떻게 법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의 권리와 의무를 어떻게 규정해야 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 사회 속에서 법인이 법적으로 권리의 주체로서 기능할 때 사람들은 이것을 집요하게 자연인으로서, 개인으로 생각하고, 아니면 사물적 대상으로 생각한다. 권리주체로서 주식회사를 볼 때 한 사람(주인)으로 의제해 버린다. ‘삼성? 이건희지.’ 반대로 주식회사를 소유의 대상으로 볼 땐 토지와 같은 사물이 되어 버린다. 둘 다 틀린 것이다.
주식회사는 권리의 주체로서도 개인이 아니고 권리의 대상으로도 사물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은데, 주식회사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권에서 사용권을 연역하듯, 주식회사의 소유권으로부터 경영권을 연역할 수 없다. 그럼 물건이 아니면 뭐냐.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설립 목적이 이윤추구든 무엇이든 간에, 어떤 활동을 위해 결속한 단체다. 때문에 주인은 있을 수 없고 오직 대표, 대표자만 있을 수 있다. 사람을 가리켜 ‘너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럼 ‘대표자가 누구냐’라고 했을 때, 활동하는 사람만이 대표할 수 있다. 활동을 대표할 때만 논리적으로 하자 없이 굴러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주식회사는 돈을 내는 사람들이 주식회사를 대표하게 돼 있다. 근데 돈 내는 사람은 활동을 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에서 드러내려는 것은 그 괴리다.
주식회사는 인간의 생산공동체로서 활동하는 공동체이며 그 활동의 주체는 노동자다. 하지만 지금 노동자들은 주체성에서 완벽히 배제돼서 사물화 되어 있고, 오히려 사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을 출자한 사람이, 자본을 대신해서, 자본의 몫만큼 이름표 달고 나와 대표라고 하고 있다. 주식회사의 활동과 주식회사의 대표성 사이의 괴리가 경영학 교과서에서 만날 말하는 대리인 비용을 낳는 괴리이다. 이건 처음부터 비논리적으로 놓여있는 괴리이기 때문에 여기 경영학 공부하는 사람이 계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미국의 주주자본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 지속, 작동 불가능하다.
우리가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19세기 이래로 자꾸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특히 맑스는 그 점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사회과학을 오도시킨 장본인이라고 생각한다. 구조는 사물적 개념, 건축술적인 개념의 은유이다. 이걸 갖고는 공동체를 설명할 수 없다. 공동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통해서만 형성되고 존립하게 되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사회과학이 맑스 이후에 집요하게 구조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까닭에 사람들의 모임, 즉 공동체로서 법인 또는 그것이 경제적으로 나타난 단체인 주식회사에 대해 어떤 설명도 못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그렇게 많은 비판이 있어왔음에도 기업이념이 본질적으로 나타나는 건 정말 최근의 일이다. 학문에서 경영학은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선생들 사이에서 이류학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경영학이야말로 기업이론이다. 경영학은, 자본주의를 견인하는 기업을 진보적 관점에서 낱낱이 해체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자본가가 어떻게 하면 자본의 출정을 위해 조직 관리를 잘할 수 있는가를 논하는 반동적인 학문이 되었다. 학문 자체가 아직까지 그렇다 보니, 자본주의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기업에 포커스를 맞추고 비판해야 하는데 그것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공동체, 서로주체성의 다양한 형태로서 인간의 공동체에 대한 분석틀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학문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었던 것이다.
기업 민주화,
피 흘리지 않고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방법
나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진보 학자들이 기업을 내재적으로 분석하는 데 무능하고 외곽에서 문화적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마치 자본주의 비판을 완수해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게 답답해서 한 게 이 작업이다.
책에 이 나라 저 나라 사례를 들고, 이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내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다. 이를테면 독일 상법에서는 주식회사의 경우 이사회의 최소 1/3, 일정규모 이상 대기업의 경우에는 1/2 이상을 노동자 대표로 선출해야 하고 나머지 절반의 반의반은 주주대표, 반의반은 채권자(대개는 은행)로 선출한다. 우리의 경우, 2조원 이상의 자본금을 가진 기업은 사외이사를 갖게 되어 있으나 이들은 대개 거수기 노릇을 한다.
기업이 국가를 지양해버린 시대에, 가장 독재적인 조직은 기업이다.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는 결국 기업을 민주화해야 한다. 주식회사는 원래 주인이 없으니까, 법인의 이사회를 노동자가 또는 종업원이 다 선출하자는 거다. 주주들이 몫을 내놓으라고 불평하면 주주들은 배당금이라는 몫이 있잖은가. 시장논리에 따라서 회사는 망하고 흥할 텐데, 주주들은 실적이 좋으면 투자하고 나쁘면 팔아 치울 거다. 노동자들은 회사가 살아야 사니까 실업자가 되지 않으려면 합리적으로, 창의적으로 일해서 회사를 키울 거다. 지금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렇게 바뀌는 순간 주식회사는 모두 작은 공화국이 될 거다. 또 아테네와 같은 폴리스가 될 거라는 거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피 흘리지 않고 넘어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고, 이거야말로 노동자가 자기 노동 생산 활동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겠다. “독일, 또는 유럽의 많은 오케스트라들이 주식회사입니다. 단원은 노동자고 사장은 지휘자인데, 1급 오케스트라 경우에는 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노동자가 뽑는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진정한 혁명은 변방에서 시작된다
이 책을 쓰면서 혹은 쓰기 전에, 정말 겸손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최선을 다해서 내가 뒤질 수 있는 건 다 뒤지고, 기회가 닿는 대로 물었다. 책에 썼던 것처럼, 내 생각에 대해서 흔쾌히 응대해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자기 학문이나 하지, 이런 생각을 깔고 있었던 거 같다.
그나마 얘기를 꺼낼 수 있어도, 한국의 대다수 학자들, 특히 진보진영 학자들의 반응은 ‘그거 대충 내가 아는 얘기지’였다. 유일하게 내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응대해 준 분이 김진국 교수이다. 나중에는 내가 먼저 토론 마치자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웃음) 유감스럽게도 나와 전혀 다른 정치적 입장에 있는 분인데,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대단히 논쟁적으로 토론을 했다.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전문 경제학자와 토론하면서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반박되지 않는 거라는 걸 알았다.
이후 계속 그런 과정을 거쳐왔다. 베트남 사회과학원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주제로 연 국제학술대회에서도 이걸 발표했다. 거기서 내가 확인한 건, 주식회사의 경영권을 노동자에 위임하는 이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는 생각을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개진한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그날 베트남에서 발표가 끝나고 독일에서 온 나이 지긋한 정치학자 분이 저보고 이렇게 말하더라. “너 옛날에 레닌이 러시아에서 혁명 일으키면 독일, 유럽에서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된 거 알지? 그러니까 너처럼 새로운 얘기는 변방에서 하면 안 되고 유럽 같은 중심에서 해야 되.”
‘너는 예수가 얼마나 변방에서 나온 촌놈이었던지 모르냐. 그리고 모든 세계의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혁명적 변화는 소수자에 의해 나온다는 것도 아직 모르냐.’ 사실 그게 마지막 확신이었다.
노동자여, 선상 반란을 일으켜라!
기업 하나하나를 ‘공화국’으로 만들라!
개인기업에서 주식회사로 전환한 경우에도 ‘노동자 경영권’은 적용된다. 100% 1인 주식회사가 많이 있다. 언뜻 보기엔 개인기업처럼 보이는 회사들이 대부분 주식회사다. 왜 개인기업이 더 만만할 텐데, 개인이 주식 전부를 갖고 있으면서도 주식회사로 바꿀까?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주식회사는 유한책임이어서 회사가 망하더라도 빚 때문에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게 된다. 그것이 첫째 이유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회사가 점점 커짐에 따라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한데 그때 상장하면 이자 없이 자본을 조달할 수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초기엔 주식회사를 법으로 금했던 거다. 거품기업이 너무 많아서.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합법화한 거다. 개체발생이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고, 가족기업, 개인기업, 동업자기업이 때가 되면 주식회사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처음 아무리 주식 전량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 이유가 있어서 주식회사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 종업원들한테 묻고, 이사를 종업원이 선출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묻고 싶을 거다. “노동자들이 선상반란 일으켜서 사장을 자리에서 쫓아내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노동자가 판단해야 한다. 누가 이익을 보는지는 판단해야 한다.
이런 염려를, 왕을 없애고 공화국 만들자고 했을 때 안 했겠나. “이 무식한 농민, 노동자들에게 투표권 주면 그 놈들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 지 알 수 있냐”는 말을, 그 당시 왕권신수설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안 했겠냐. 하지만 오늘 우리는 민주공화국에서 살고 있고 그런 게 기우라는 걸 다 알고 있다.
노동자 경영권이 노동운동의 전술-전략 되길
나는 한국 학자들이 가장 마지막에 이 책에 관심을 갖길 기대한다. 한국 학자들은 서양 교과서에 없는 이야기는 학문적 담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두 번째로 할 일이 더 두꺼운 책을 쓰는 거고, 외국어로 외국의 경제학 저널에 발표하는 것이다.(좌중 웃음) 학자들에게 기대하는 건 그 다음이다.
오히려 내가 기대하는 첫 번째는 내가 몸담은 진보신당이다. 당이 재창당할 때 당명에 ‘노동자 경영권’을 공식적으로 명문화했으면 한다. 노동자 경영권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게 내가 첫 번째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책이 노동자들의 필독서가 되고 노동조합 운동의 새로운 전술 또는 전략으로 쓰이는 거다.
이제까지는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 경영권을 인정해주고 나서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요구했다. 그런데 복수노조가 되어서 그나마도 힘을 못 쓰게 됐다. 노조가 여러 개 있으면 사용자 입장에서는 말 잘 듣는 노조와만 말하면 된다. 노동운동은 그길로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이 살기 위해 경영권 자체를 운동의 투쟁 의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경제학자들도 얘기를 시작해야 하고, 시민사회에서도 이야기해야 하지만 나는 당장 기대하지 않는다. 절박한 건 노동자들이다. 우리가 사장은 고사하고 현장에서 조장, 반장이라도 우리 손으로라도 뽑자고 얘기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에서 노동자 경영권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길 바란다.
삼성만 이 대상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면 수백 수천의 경영진이 새로 바뀔 거다. 대통령에 의해 임명될 건데 KBS, MBC 사장을 왜 대통령이 물밑에서 임명해야 하느냐. 왜 노동자한테 뽑으라 하면 안 되냐. 그런다고 해서 천재지변이 나고, 나라 망하지 않는다. 그거야말로 언론의 공공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것도 주식회사, 법인이다.
노동운동에서도 단계가 있다면, 공기업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 이후에 정치적 투쟁, 입법운동으로 갈 수도 있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것이 보편적인 상식이 되어서 우리 사회에서 입법화의 길을 밟게 될 텐데, 맨 마지막으로 법조문을 손질할 때, 법학자들은 그걸 위해서 모시면 충분할 거라고 본다. 지금 당장 이 책을 읽고 정말 뭔가 일해야 할 분들은 사실은 여러분들이지 고매한 학자 분들이 아니다.
진리의 빛은 한 번 켜지면 꺼지는 법이 없다
국가 때문이든 다른 무엇 때문이든, 변화가 쉽지는 않을 거다. 철학이 이런 때 도움이 된다. 내 시간표는 경제학과 다르다. 나는 3,000년의 전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늘 인류의 철학 역사, 근 3,000년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몸에 배어있다. 그런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건, 진리의 빛은 한 번 밝혀지고 나면 꺼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내 관심사는, 내가 이 책에서 하는 말이 말 같은 말이냐 아니냐, 딱 그거 하나다.
철학의 역사에서, 진리의 확실성에 대한 기준이 여러 가지 있어 왔고 그에 대한 논란이 많다. 진리가 있냐, 가능하냐 등등.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진리의 기준은, 초기 스피노자의 것이다. “니가 말하는 개념을 가지고 집을 지을 수 있는 설계도가 되면 그건 참된 거고 설계를 못하면 그건 가짜다.”
내가 오늘 말한 노동자 경영권, 이걸 갖고 기업을 세울 수 있고 운영할 수 있느냐. 그 설계도가 되냐 안 되냐가 관건이다. 그게 된다면 국가가 아니라 국가의 할아버지라도 못 막는다. 그게 역사다. 모든 제국은, 절대 권력은 그렇게 붕괴해 왔다.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적 가능성으로 제약하지 말고 맘껏 상상하자. 상상해서 그것이 정합성을 가지면 얘기해도 된다. 시작해도 된다는 거다.
재벌이, 자본이, 기업이, 국가가 눈뜨고 보고 있지 않을 거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흐르는 강물을 막지 못한다. 국가도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지금 한나라당이 빨간 색 옷 입고 나오는 거 봐라. 그건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하는 말이 진리냐, 야바위꾼이 떠드는 수다냐만이 문제고, 그것은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자본주의 극복 못 한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고민하는 건, 더 적극적으로, 이렇게 되었을 때 국가와 기업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관계가 설정돼야 한다. 오늘날까지 국가와 기업이 가장 일차적으로 관계한 방식이 중상주의다. 중상주의는 국가가 기업을 관리하는 거다. 거기에 정 반대의 대척점에 있는 게 신자유주의다. 그러나 노동자 경영권 입장에 따르면 둘 다 틀렸다. 중상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도 아니라면 제3의 길이 뭐냐. 두 극단 사이에서 어떤 새로운 길을 걸을 거냐.
“노동자 경영권 갖고 자본주의 해체가 가능하냐”는 물음은 이 문제에 걸려 있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것이 조직된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생산수단을 점유(국유)함으로써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실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주의 혁명의 비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 해방과 별 상관없는 프로그램이다. 기업의 소유권이 자본 아니라 국가에 간다고 해서, 그 기업에서 노동하는 노동자가 기업의 주체가 되는 것도, 주인이 되는 것도, 해방되는 것도 아니다. 누누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것 자체가 농담이었다는 거다. 난 한 번도 믿은 적이 없고 지금도 일관되게 그거 농담이니까 제발 그 얘기 그만 하자고 말하고 싶다. 가벼워지자. 경제학은 신학이지 과학 아니다. 이제 벗어나야 한다.
누군가 자본주의 극복이 가능햐나 물을 때, 내가 오히려 묻고 싶다. 도대체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말로 머릿속에서 뭘 생각하고 계시느냐고. 역사에서 어떤 경우에도 완벽한 단절은 없다. 맑스조차 자본주의를 극복할 때 자본주의의 생산력(물적토대)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일정한 제한이 필요했다. 안 그래서 지금 사회주의, 자본주의 가릴 것 없이 인간과 자연에 대한 대책 없는 파괴와 수탈이 지속되고 있고 있는 거 아니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이집트에서 나올 때 그냥 맨몸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본주의를 넘어설 때도 똑같다. 노동자 경영을 말하면서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놓을 건가. 자본주의에 대해 챙겨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갖고 토론해야 한다. 내 책이 그 토론의 출발이 됐으면 좋겠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드는 역사 쓰기를
마지막으로, (여기 오신 분들이) 젊은 학생 분들이시니까, 가끔 외국 나가거나 외국인 친구 만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민족주의를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한국인으로 범주화될 때가 있다. 여러분은 한국에 대해 뭘 소개하고 자랑하시나. 나는 학회 같은 거 주최해서 외국인 학자를 부르게 되면 그들에게 우리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 늘 하는 게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DVD 45분으로 편집된 거 하나 보내 달라”고 전화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사가 담긴 그 DVD를 틀어준다.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면 그거 꼭 보여주시라. 얼음장처럼 굳는다. 그리고 다 보고 나서 반드시 하는 말이 있다. “정말 존경스럽다. 니들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비하면 우리는 거저 받은 거다.”
거저 받은 건 돌려달라고 하면 줘야 한다. 그래서 반납했다.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그렇지 않나. 근데 우리는 선물 받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 속에서 처절한 투쟁을 통해 희생과 피 흘려 얻은 거다. 이건 반납 불가능하다.
역사에 끝이 없다. 지금 우리 과제는 경제 민주화다. 전 지구적으로도 그렇다. 내가 외국인 친구들 앞에서, “봤지, 나 저 세대야. 518세대라고”하면서 목에 힘주는 것처럼 여러분 30년 후에 “우리 졸업하고 다 비정규직이었지, 전세금 얻을 돈 없어서 결혼도 10년, 20년 늦게 했어. 근데 피 흘려 싸워서 지금 이런 세상 만들었어”라고 해야 하지 않겠나.
30년 전에 대학에 비정규직 없었던 거 아시냐. 안 믿기실 거다. 30년 뒤에 대학에 강사 없게 만들어 달라. 비정규직 없게 만드는 거 여러분 몫이다. 그리고 자부심 갖고 전 세계를 향해 자랑해라. 한국의 민주주의가 세계사의 자랑이듯이, 하나의 모범이듯이, 지금부터 시작하는 역사가 세계사의 첫 페이지를 새로 쓰는 역사가 되게 하는 건 여러분의 몫이다. 나는 동학의 피묻은 이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러분이 자랑스러운 그 후예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