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먼지로 사라지는 것들에 보내는 열광”
나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문학작품을 해석한다는 행위는 지식과 지능을 이용한 가장 야만스러운 감상에 속한다… 독자인 나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독자인 나는 이 책에 대해서 기존에 말해진 모든 어휘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하지만 내가 어떤 책을 읽고, 그 책에 관한 느낌과 인상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을 때, 특히 그 전달 방식이 지금과 같은 산문의 형태일 때―시의 경우라면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이런저런 해석을 피해 가려는 의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심지어 작품 스스로가 누설을 희망하고 있는 의도에 관한 것이라도 말이다. 과연 해석을 배척하는 독서의 열광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서 입을 여는 순간, 이미 모종의 해석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떤 독서는 터진 입술과 살갗을 파고드는 척박한 바람의 땅 조그만 개인의 모닥불 아래 앙상하고 남루한 음식을 펴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으로 유목인 열광자는 하루를 살아가며 그 행위로부터 무언가를 남기려 하지 않는다. 열광자는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고대의 글자가 새겨진 나뭇조각을 모으기 위해 그의 생애 얼마 남지 않은 자유시간을 소비한다. 열광자는 밤마다 고문으로 상처 입은 야만인 소녀의 다리를 물로 씻어주지만 그것은 무욕망을 향한 욕망일 뿐이다. 하지만 먼지 가득한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나타낸 한 무리의 무장기병대는 다르다.
그들은 문자를 활용하는 산업의 군대이다.
그들은 이미 사라진 고대 야만인의 글자를 해독하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는 제국이라는 명분이 있으므로
그들은 열광자의 욕망에 굴욕을 가할 자격이 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 뒤를 따른다.
이 작품은 불특정한 어느 제국의 변경, 버려진 듯 외로운 한 오아시스 도시를 무대로 한다. 제국인들은 국경 너머 황무지 사막에는 야만인들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 유목민인 야만인들은 인근의 어부들과 마찬가지로 비문명적이고 잔인하며 미개한 오랑캐들이므로 두려운 존재이다. 그들은 반드시 언젠가 제국의 큰 위협이 될 것이다. 도시의 행정책임자 치안판사는 야만인 토벌을 위해 도시로 온 졸 대령과 마찰을 겪는다. 지성과 모럴을 갖추었지만 동시에 외면적으로는 타협적인 삶을 살아온 판사는 실체가 없는 야만인이란 허상을 위해 약자들을 파멸시키는 졸 대령의 행위를 제어하려고 한다. 그러나 야만인에 대한 증폭되는 제국의 공포심은 결국 졸 대령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고, 판사는 배신자로 몰려 모든 명예와 지위를 박탈당하고 고문을 받는다. 그 빌미가 된 것은 판사가 한 야만인 소녀와 관계를 맺은 일이다. 그리고 먼 길을 걸어 그 소녀를 동족들에게, 즉 야만인에게 되돌려 보내준 일이다. 이것은 제국의 입장에서는 지위를 이용한 권력의 남용, 적과의 내통에 해당한다. 그리고 판사는 변경에서의 재직기간 동안 오래전 그 땅에 살던 이민족들이 작성한, 해독이 불가한 글자가 새겨진 나무판들을 모았다. 졸 대령은 그것이 판사가 야만인들의 문자로 그들과 내통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제국의 공권력은 판사가 여러 ‘첩’들을 거느리고 살았다며―그중의 한 명은 야만인 소녀―그를 도덕적 파탄자로 몰아 판사에게 가하는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판사는 그야말로 인간성을 파괴하는 철저한 모욕과 고통을 당한 뒤에 풀려난다. 야만인을 찾아 사막으로 원정을 갔던 졸 대령의 군대는 야만인들의 술책에 넘어가 그들과 번번이 싸워보지도 못한 채 사막 한가운데로 유인당한 뒤 자멸 상태로 되돌아온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대다수의 주민들은 군인들을 따라 변경도시를 떠난다. 이제 도시의 지휘권은 다시 판사에게 되돌아온다. 스산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화없는 종말이다. 마치 우리들의 일생처럼. 사람들은 여전히 야만인을 기다린다.
쿳시의 작품들이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갖는 숨길 수 없는 현재성과 정치성, 동시에 매우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다중의 알레고리 효과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현실감각이 강한 독자뿐 아니라 그 반대의 몽상적인 독자들도 그에게 사로잡히는 것이다.
쿳시의 작품에서는, 다른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종종 그렇듯이, 남성 노인 주인공이 받는 모욕과 조롱이 작품의 핵심적인 심성과 고통의 큰 부분을 담당하는 일이 있다. 나는 이점을 항상 흥미롭게 여긴다. 왜 남성 작가에 의해서건 여성 작가에 의해서건, 문학작품에서 여성 노인 주인공은 남성 노인 주인공보다 훨씬 덜 모욕당하는가,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는가?
1. 여성 노인이 (감히) 문학작품의 주인공으로 나서는 일이 남성 노인의 경우보다 월등히 적으므로.
2. “사회적 시치미 효과”: 이런 상황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예를 들자면 다들 마음속으로는 가난한 사람이나 장애인이 싫지만 공식적으로는 유난히 그들에게 더 온화한 척 친절한 척 집단적 거짓 톨레랑스를 발휘하는 효과. 즉 바꿔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건, 설사 나이가 들었다 해도 남녀관계에서는 남성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전제를 남성 여성 작가 모두가 갖고 있으므로.
3. 간단하게 생각해서, 여성 노인은 남성 노인과 달리 부적절한 욕망을 피워내지 않으므로 아예 공격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그런데 이것이 생물학적으로 얼마나 사실인지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참고로 말하면 쿳시가 탄생시킨 신화적인 여성 주인공들이 있는데, 그 둘은 모두 노인이라는 점이 일치한다. 한 명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이고 다른 한 명은 엘리자베스 커런(철의 시대)이다. 이 책들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쿳시의 다른 작품인 『슬로우맨』이나 『추락』에서 남성 노인 주인공들과 달리 이 두 명의 엘리자베스는 적어도 육체적인 욕망에 관한한 전혀 흔들림이 없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인물로 이상화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생각해서,
4. 원래 여자가 남자보다 고상한, 덜 야만적인 종족이기 때문에.
5. 기타 등등의 이유.
최근에 나는 중국작가 위치우위가 쓴 『세계문명기행』을 읽었다. 고대에 인류문명을 꽃피웠던 제국 중에 지금껏 살아남은 것은 누구인가. 중국이 유일하다. 인도, 아랍, 이집트, 중앙아시아를 보라. 다른 모든 문명은 사막의 먼지바람 속에 흔적도 사라져버리고 무질서와 가난의 혼돈에 휩싸인 후손들의 남루한 현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라는 글이었다. 그러나 사막의 흙속에서 영원히 먼지로 사라져버리는 것들(비문명, 야만, 성과 없는 사랑, 모욕당하는 노인, 열등하고 가난한 종족, 패배자의 무덤) 그렇게 잊히는 것들에게 보내는 열광이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잊히는 것만이 진짜일 수도 있다. 우리가 영원히 모르게 될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모래사막에서 파낸 고대 야만인의 글자는 해독하지 못한다. 무덤에서 파낸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제 발로 제국을 떠난 이들을 모르고 말 것이다. 전투에서 이기는 자는 어쨌든 살아남아 이름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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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배수아
1993년 서점에서 단지 표지가 이쁘다는 이유로 우연히 집어든 문학잡지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서 "신인작가 작품공모" 광고를 보았다. 그리고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공무원과 소설가라는 두 가지 직업을 오가면서 글을 썼던 그녀는 간섭받지 않고 글에 몰두해 보기 위해 2001년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로 떠나 3~4개월씩 체류하면서 작품을 써 왔으며, 그 곳에서 발견한 작가 야콥 하인의 첫 번째 소설 『나의 첫 번째 티셔츠』를 번역하기도 했다. 작품으로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그 사람의 첫사랑』, 『붉은 손 클럽』, 『철수』, 『이바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랩소디 인 블루』, 『부주의한 사랑』, 에세이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 등을 펴냈다. 2003년 한국일보문학상, 2004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단편 「무종」으로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월요일 독서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