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해문 │ 놀이터 디자이너
정색을 하고 이제 놀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회로 들어선 것 같다. 그 앞선 시기를 ‘놀이결핍의 시대’로 이름 붙였다면 이제 ‘놀이실종의 시대’가 막을 연 것 같다. 학생은 공부 어른은 일이다. 놀이가 실종되어가면서 교육도 정처 없다. 왜냐하면 흔히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놀이와 교육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교육이라는 것은 무엇이 즐겁고 재미있고 기쁜지 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놀이이니 교육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는가.
이러한 진단도 복잡다단한 오늘날 사회에 뿌리내리기 어렵다. 놀이결핍은커녕 놀이실종은커녕 놀 것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다고 많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육체적으로 실감하기 때문이다. 이름 붙이자면 놀이는 소비되고 있고 낭비되는 시대이다. 냉탕과 열탕을 오가며 상기된 얼굴이 오늘 우리가 느끼는 혼돈의 놀이상이다. 이 두 가지 세계에 우리는 걸쳐 산다는 것이 정확한 이해일 것이다. 단 낭비와 거품을 누리려면 전제조건이 있다. 반드시 돈을 써야 한다. 어린이 놀이는 돈과 무관한 세계라는 것이 내 놀이 철학의 근본이다.
닐 포스트먼의 『사라지는 어린이』라는 책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이 책은 1982년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우리나라에 출간된 것은 1987년이다. 무려 30년 전 책으로 놀이겹핍을 지나 놀이실종의 한국 어린이들의 현실을 보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의 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린이스포츠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가까이는 방과 후 학교 운동부가 운동장을 독점해 다른 많은 아이의 놀권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것에서부터 운동부 어린이들의 놀권리 또한 아무런 저항 없이 무시되고 스포츠에 몰두한다는 비판은 잠시 접어두자. 어린이 놀이가 스포츠라는 그럴듯한 모양에 가려 고사하고 있다. 34년 전 그의 말을 들어보자.
“왜 누군가는 어린이들의 자유와 비공식성과 자발적인 경기의 즐거움을 거부하고자 하는가? 어린이들을 왜 직업 선수식의 엄중한 훈련과 집중, 긴장, 매스컴은 과장에 복종하게 하는가? 대답은 앞에서와 같다. 즉 어린이들의 독자성에 대한 전통적인 승인이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가진 것은 경기란 그 자체를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날린다거나 돈, 육체적 조절, 상승 동기, 국가적 자존심 등 외적 목표 때문에 행해진다는 관념의 표출이다, 어른들에게는 경기는 심각한 사업이다.” (154~155쪽)
훈련이 놀이를 대신하는 셈이다. 놀이를 누려야 할 어린이들이 직업의 세계를 일찍이 만나는 셈이다.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기와 승리를 위해서 어떤 제지와 간섭과 강압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한국의 많은 유소년 스포츠 단체에 속한 어린이들은 수용한다. 비극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훈련 현장은 고성이 난무하고 경기에 임하는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다. 어린이 모습은 찾기 어렵다. 만약 지기라도 한다면 그 상실감은 과하게 표현된다. 짧은 한국 스포츠의 역사를 돌아봐도 스포츠는 많은 루저를 만드는 데 공을 세웠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승자만이 웃기 때문이다. 어린이 스포츠는 특정 근육과 신체 발달을 촉진한다는 데에도 놀이와 다른 점이 있다. 놀이는 몸과 마음 전체를 조화롭게 성장시킨다는 것과 비교했을 때 더욱 그렇다.
다음 책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만나는 조금은 뜬금없는 책일지 모르겠다.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다. 이 책을 눈여겨보는 까닭은 도시와 함께 놀이터가 발명되었고 도로와 자동차로 인해 놀이가 도망을 다니는 상황이 강제되었다는 사려 깊은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가장 밀착된 시선으로 본 이가 제인 제이콥스이다. 어린이 놀이가 정처 없이 떠돌게 된 까닭을 이 책만큼 꼼꼼하게 보여주는 책도 드물다. 어린이 놀이에 대한 따듯한 관심을 한껏 품은 채 말이다. 그 한 대목을 살펴보자. 아이를 키우는 것은 놀이터가 아니라 ‘골목과 거리’라는 그녀의 생각을 듣는 순간의 희열을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계획가들은 흔히 하는 놀이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필요한지 깨닫지 못하는 듯싶다. 또 장소와 설비가 아이들을 키우는 게 아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장소와 설비는 유용한 부속물일 수 있지만, 오지 사람만이 아이들을 키우고 문명사회에 동화시킬 수 있다.” (123쪽)
제인 제이콥스의 말대로 최고의 놀이와 놀이터는 친구이고 부모이고 이웃인데, 어찌 보면 아이들의 놀이실종은 친구와 부모와 이웃의 실종일 수 있다. 달리 말한다면 만약 놀이겹핍과 놀이실종을 완화할 길을 찾는다면 그것은 놀이도구나 기구 장난감 또는 기기가 아니라 관계와 친구와 사람이라는 자명한 결론에 도달한다. 관계가 놀이인 셈이다. 다음으로 보았으면 좋을 책은 에드 메이오와 애그니스 네언이 2009년 함께 쓴 『컨슈머 키드』이다. 나 또한 오랫동안 소비와 아이들 놀이와의 상관관계에 주목해 왔다.
이 책은 그런 비슷한 주제를 짐작이나 직관이 아니라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 어린이들의 놀이결핍이나 놀이실종이 세월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변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기업의 마케팅 승리의 최종 성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때로는 놀이실종과 결핍을 유도하고 때로는 그것에 유인된 어린이들에게 놀이 대용품을 만들어 그들이 지나다니는 골목에 배치하는 일을 해왔다. 한번 문 먹잇감을 결코 놓지 않는 지구력을 발휘해 마침내 어린이들을 집어삼킨다.
마지막으로 볼 책은 『놀이터 생각』이다. 올해 75세인 할아버지인데 유럽에서 40년간 1만5천여 개의 놀이터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설계에 참여한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의 책이다. 이 책을 놀이터를 만드는 매뉴얼이 담긴 것으로 알고 그렇게 보는 경우도 있는데 다시 보면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어린이와 놀이와 놀이터에 대한 철학을 오롯이 담은 명작이라고 해야 옳다. 귄터 벨치히는 놀이를 이렇게 짧게 정의한다.
재미없는 놀이는 일이고
재미있는 일은 놀이입니다!
놀이가 무엇인지 아주 간결하게 말한다. 그러나 귄터 벨치히가 이런 명제를 만들어내기 까지의 과정은 길었고 장애 또한 많았다. 스스로 어렸을 때 과잉행동이 있어 학교에 다니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놀이와 놀이터를 가르치는 학과도 있지 않아 스스로 공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세월을 보내면서 귄터 벨치히는 과잉행동을 스스로 극복하는 데에도 자신의 어린 시절 놀이가 너무나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깨우쳤다. 아울러 아이들이 원하는 놀이터를 만드는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의 과정에서 어린이와 놀이 그리고 놀이터에 대한 철학을 마련했다. 그와 나는 아이들이 놀이터 와서 도전하고 실패하기를 바란다. 그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담은 책이 바로 『놀이터 생각』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혀 어렵지 않다. 그 까닭은 거의 그림책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의 책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한다. 놀이와 놀이터에 대한 생각과 철학을 그림으로 풀어가는 솜씨가 참 남다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책 전체를 흐르고 있는 결론이다. 귄터 벨치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놀이터는 필요 없다.”
놀이터에 대한 이야기를 내내 하다가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 읽는 독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이들에게는 이 세상 모두가 놀이터여야 한다는 말이다. 귄터 벨치히는 나아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아직 좋은 놀이터가 무엇인지도 그런 놀이터를 만들지도 못했다.”라고. 다만 그가 하는 일은 놀이터가 만들어지면 그곳에 거듭 가서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어떻게 노는 지 볼 뿐이라고 한다. 놀이겹핍을 지나 놀이실종의 상황을 맞이하고 놀이망각과 놀이탈취 상태에 접어드는 우리 시대 아이들을 손 놓고 지켜보는 일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 이 난제를 풀 것인가 그 실마리를 귄터 벨치히에게서 듣는다. 말을 듣지 않고, 경계를 넘고, 불편한 것을 선택하고, 관리를 용인하지 않고, 균질하지 않은 대지로 뛰쳐나가고, 위험을 무릎 쓰고 감행하는 그런 아이 또한 지금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문제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보고 이해할 것인가이다. 함께 도움받을 수 있는 책 한 권을 마지막으로 추천하며 글을 맺는다.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