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서 활동했고, 지금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에너지 전환, 도시정치, 대중교통, 거버넌스의 민주화 등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고 있다. 관심 주제는 계급과 사회운동, 도시정치, 대중교통, 거버넌스의 민주화 등이다. 지은 책으로 『착한 에너지 기행』(공저) 『탈핵』(공저) 등이 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는 핵발전소가 넒은 지역과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재앙인지를 일깨워 준 가장 잘 알려진 사례다. 그러나 그 현장이 어떠했는지를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생생한 실화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을 읽어내는 것은 그 고통을 나누어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의 초기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방사능에 고농도로 피폭당한 소방대원의 일화가 있다. 소방대원 남편이 비밀리에 이송된 모스크바 병원으로 찾아간 만삭의 부인은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곁을 지켰다. 하지만 체내에 남은 방사능이 가져오는 끔찍한 고통 속에 남편은 여인의 곁을 떠났고, 여인의 아기도 함께 떠나간다. 그렇게 ‘체르노빌레츠체르노빌의 사람들’가 된 여인은 체르노빌의 상흔을 상징한다.
체르노빌을 여러 위치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103명의 목소리를 모아낸 작가에게 노벨상 위원회가 수여한 상 역시 사회적으로 잊혀진 존재였던 체르노빌레츠에게 주는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핵발전소는 사모바르러시아 주전자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안전하다는 정부의 선전을 의심치 않았고, 사고의 내막을 알지 못한 채 맨몸으로 집을 떠나야 했으며, 조국과 인민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고 수습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난 오이와 감자, 우유, 보드카를 의심 없이 먹어야 했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체르노빌뿐 아니라 일본의 후쿠시마와 핵폭탄 피폭 지역, 한국의 합천, 그리고 고리, 월성, 울진, 영광, 밀양과 청도 같은 한국의 핵발전소와 송전탑이 소재한 지역에도 있음을 생각해 본다. 이 책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더욱 증폭되어 전해져야 할 이런 모든 지역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 책의 초판 1쇄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딱 1년이 되던 2012년 3월 11일에 출간되었지만, 얼마 전 발생한 경주의 지진은 이 책을 다시 생각나게 만든다. 일본말로 “안젠데스까”, 즉 한국말로 “안전합니까”라는 인사는 큰 지진과 화산이 많은 일본에서는 익숙한 것일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남의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국민 모두가 지진 소식과 함께 핵발전소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와 핵발전 관련 기관의 대답은 언제든 “안전합니다”이다. 진도 6.5 또는 7.0의 지진을 견딜 수 있도록 내진설계가 되어있고, 쓰나미를 대비한 방벽이 갖춰져 있거나 보강할 예정이고, 이중 삼중의 비상 방호체계가 완비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한국의 분위기에 대해 일본의 전문가들이 더 걱정이다. 에너지 민주주의와 재생가능에너지를 연구하는 이이다 데쓰나리 씨와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가마나카 히토미 씨는 이 책에 실린 대담을 통해 지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 온다.
두 사람은 ‘안전’이라는 말에 주문 같은 효과가 있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실제로 방사능의 위험이 어떠한가를 직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안전하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핵발전의 안전 신화는 재생산된다. 구마모토 지진과 아소 화산의 분출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경주의 지진은 한국의 우리들에게는 안전한 핵발전소가 없다는 점을 가장 적절한 시점에 알려준 것은 아닐까.
일본 『아사히 신문』의 기자이기도 한 사이토 겐이치로 씨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마침 후쿠시마의 고리야마시 지국에서 근무하다가 지진과 핵발전소 고의 참화를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도 너무도 싸고 편하게 전기를 쓰며 살아왔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도쿄로 근무지를 옮긴 지은이는 휘황찬란한 거리의 불빛을 보고 ‘5암페어’라는 최소 단위 전력요금 계약을 통해 전기를 가급적 안 쓰는 삶을 시도한다. 에어컨과 전기밥솥, 헤어드라이어는 하나만 해도 1000와트가 넘으니 쓸 수가 없지만, 선풍기는 강하게 틀 때 0.6암페어 밖에 안되니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청소기, 전자레인지 이런 고용량 가전제품들은 지은이의 집 한구석의 ‘가전제품의 무덤’으로 보내졌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자전거 통근과 찬물 샤워, 뽁뽁이 단열과 조개탄 화로, 빗자루 청소와 프라이팬 요리의 재미도 깨닫게 된다. 나고야로 이사한 지은이는 미니 태양광 발전기를 베란다에 설치하여 ‘건강 제1전력’ 태양광발전소 소장으로 스스로 취임하는 영예도 누린다.
지은이는 탈핵과 에너지 절약이 혼자만의 혹독하거나 유별난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전기를 덜 쓰고도 우아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많은 이들의 일상과 상식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지은이는 우리보다 조금 빨리 결행에 나섰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핵발전이 위험하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차악 또는 필요악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논리는 그래도 핵발전이 지금으로썬 저렴하고 그래서 경제 성장에 필요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오시마 겐이치 씨는 경제학을 전공한 후 핵발전 문제와 재생가능에너지의 잠재력도 연구한 분으로, 경제학자가 보기에도 핵발전이 싸지 않다는 주장을 펼친다.
우선 저자는 일본 정부와 핵발전 업계가 발표하는 발전비용, 즉 핵발전이 킬로와트시kW/h 당 5~6엔, 천연가스 화력이 7~8엔, 수력이 8~13엔, 태양광은 49엔이라는 주장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진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의 운전연수를 40년으로 하고 설비이용률을 80%로 할 때 5~6엔이라는 계산이 나오는 것인데, 이는 핵발전소의 수명연장 가동과 무고장, 무사고를 전제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비현실적이다. 아울러 생각해야 할 것은 발전회사들이 핵연료 구매와 발전시설 가동을 위해 직접 투입하는 사적 비용보다 훨씬 큰 ‘사회적 비용’, 즉 기술개발 비용, 입지 대책 비용, 그리고 환경 비용 등이 계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가 기술 개발 비용과 입지 대책 비용 같은 정책비용을 계산에 넣어보니, 핵발전은 화력의 43배, 수력의 17배가 투입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고 비용과 폐기물 처리를 포함하는 종말 처리 비용까지 합한다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가 된다. 핵발전이 싸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구다.
물론 한국의 핵발전 비용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지진과 태풍, 고압송전탑 갈등으로 핵발전소 건설 비용은 더욱 비싸지고 반면에 재생가능에너지 비용은 더욱 싸지고 있다. 결국 경제적이라고 핵발전소에 집착하는 것이 가장 바보짓이라는 말이다.
에너지는 고도의 기술과 복잡한 원리들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알기도 어렵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 아직까지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식이 이제껏 핵발전과 화석연료발전 중심의 일방적인 성장지향형 에너지 정책을 만들고 유지하는 바탕이 되어왔다. 산업계 정부 관료와 에너지 회사의 전문가들은 그래서 국민들에게 핵발전소 사고의 상태나 에너지 요금의 ‘비밀’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국회의원들 다수도 에너지는 너무 어려워서 개입하기가 어렵다고 여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의무교육을 받은 국민 대부분은 학교에서 에너지 문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물리학, 화학, 지구과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의 기초 지식들을 배웠다. 이런 지식들을 조합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학교와 언론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을 가르치고 전해 주어야 마땅하고, 세금을 내는 시민들은 그런 교육과 정보를 받아볼 권리가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이른바 ‘에너지 시민’들이 생겨나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는 값싼 에너지를 풍족하게 쓸 수만 있다면 다른 모든 일에 만족하는, 즉 플러그와 전기요금 고지서만을 바라보는 수동적 소비자에서 벗어나서, 자기가 쓰는 에너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집까지 오는지 따져 보고 그 과정에서 희생하는 사람들은 없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들이 ‘에너지 독재’에서 벗어나 ‘에너지 민주주의’를 직접 실현하려고 에너지 전환 운동에 동참하는 ‘에너지 시민’이라고 명명한다. 탈핵과 에너지 전환의 촛불을 함께 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