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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모두 주목하세요
한때 유순했던 의인義人은
험난한 길을 헤치며 나아갔다,
죽음의 골짜기를 따라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 중 「서시」에서.
어느새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발을 꼼꼼하게 씻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한밤중에 언제든 구급차가 와서 나를 실어 갈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날 천체력天體曆, 천체의 위치, 밝기, 출몰, 일식, 월식 따위를 적은 달력으로 밤하늘에 무엇이 펼쳐졌는지 확인했더라면 아마도 나는 편히 자리에 눕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만 깊이 잠들고 말았다. 홉열매가 약재나 맥주의 원료로 쓰이는 덩굴풀을 우려낸 차가 수면을 도왔고, 발레리안천연 성분의 신경 안정제도 두 알이나 복용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밤중에 과격하고 무례하며 불길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깨서도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섰지만, 그렇듯 잠에 취해 가누기 힘든 몸으로는 결백하고 무고한 꿈의 영역에서 바로 현실 속으로 뛰쳐나올 수 없었다. 몸 상태가 엉망이었고, 곧 의식을 잃을 것처럼 몸이 휘청거렸다. 불행하게도 최근 들어 나타나기 시작한 증세인데 그것은 내 개인적인 질환과 관련이 있다. 나는 침대에 주저앉아 몇 번을 되뇌었다. ‘나는 집에 있다. 지금은 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러자 조금씩 불안감이 누그러졌다.
어둠 속에서 슬리퍼를 찾는데, 조금 전 문을 두드리던 사람이 집 주위를 돌아다니며 혼잣말로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이 근방을 돌아다니는 밀렵꾼들 때문에 아래층 전기 계량기 안에 호신용 페퍼 스프레이를 넣어 둔 일이 생각났다. ‘디오니시오스’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손에 익은 분사기 형체의 차가운 물건을 집어 들고 단단히 무장한 채 바깥 조명등을 켰다. 그러고는 구석에 있는 작은 창문을 통해 현관을 내다보았다.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가 ‘괴짜’라고 부르는 이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집 근처에서 일할 때 입곤 하던 오래된 양모 코트의 뒷자락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코트 아래로 줄무늬 파자마와 무거운 하이킹 부츠가 보였다.
“문 열어요.”
그가 말했다.
나를 보자마자 그는 놀란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며 내가 입고 있는 여름용 리넨 정장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요즘 나는 지난여름에 교수 부부가 내다 버린 정장을 입고 잔다. 이 잠옷은 오래전 유행하던 패션을, 그리고 내 젊은 시절을 생각나게 해 준다. 이런 식으로 나는 ‘실용성’과 ‘감상적 정서’를 결합하는 중이다.) 그가 아무런 양해의 말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얼른 옷 입어요. ‘왕발’ 씨가 죽었소.”
충격 탓에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신발장에서 목이 긴 스노 부츠를 꺼내 들고, 옷걸이에서 제일 먼저 손에 잡히는, 그나마 변변해 보이는 두꺼운 양모 스웨터를 몸에 걸쳤다. 밖으로 나오니 현관에 설치된 외등 불빛에 반사된 눈송이가 느릿느릿 떨어지는 몽롱한 물방울처럼 보였다. 괴짜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서 있었다. 큰 키에 비쩍 마르고, 단 몇 번의 획으로 스케치한 연필화처럼 뼈만 남은 체구. 그가 움직일 때마다 꽈배기 도넛에 입힌 설탕이 떨어지듯 우수수 눈이 떨어졌다.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문을 열면서 목이 잠긴 상태로 물었지만 괴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는 거의 말이 없었다. 그의 별은 아마도 수성일 것이며, 과묵한 별자리로 알려진 염소자리나 그 경계에 있는 별자리를 타고났을 것이다. 어쩌면 토성과 반대 위치에 있는 별일 수도 있다. 역행하는 수성일 수도 있는데, 이 역시 내성적인 과묵함을 상징한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익숙한 추위와 습한 공기가 우리를 에워쌌다. 매해 겨울 그것들은 세상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음을 상기시켜 주곤 했다. 적어도 반년 동안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우리에게 적대적인지를 실감했다. 강추위가 매섭게 뺨을 강타했고, 입에서는 새하얀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현관 외등이 자동으로 꺼지고 나자 거의 완전한 암흑 속에서 우리는 사각사각 눈을 밟으며 걸었다. 어둠의 장막을 꿰뚫는 유일한 빛줄기는 괴짜가 머리에 쓴 용접용 토치 헤드의 희미한 불빛뿐이었다. 나는 괴짜의 등만 보며 어둠 속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손전등 없어요?”
그가 물었다.
물론 있다. 하지만 어디에 두었는지는 날이 밝은 뒤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손전등은 언제나 낮에만 눈에 띄었다.
왕발의 오두막은 한길에서 살짝 비켜나 다른 집들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었다. 그는 사계절 내내 이곳에 거주하는 세 명의 마을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와 괴짜, 그리고 나만이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곳에서 지냈다. 나머지 주민들은 10월만 되면 서둘러 대문을 걸어 잠그고 파이프에서 물을 빼낸 뒤 도시로 돌아갔다.
우리는 마을을 관통하는 큰길, 눈이 어느 정도 치워진 그 도로에서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큰길은 각각의 집으로 이어지는 여러 개의 좁은 길로 갈라졌다. 왕발의 집으로 가려면 눈이 깊게 쌓인 오솔길로 들어서야 했는데, 어찌나 좁은지 균형을 잃지 않으려면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디뎌야 했다.
“과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닐 거요.”
괴짜가 경고를 하기 위해 내 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가 쓴 토치헤드의 불빛 대문에 한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내가 예상한 장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침묵하던 괴짜가 잠시 후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개 짖는 소리가 왠지 마음에 걸렸어요. 뭔가 아주 절박하게 들렸거든요. 혹시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홉과 발레리안 탓에 잠에 취해 있었으니까.
“개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곧장 밖으로 데리고 나왔죠. 지금 우리 집에 있는데 먹이를 좀 줬더니 안정을 찾은 것 같아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왕발은 항상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전기를 아끼려고 불도 바로 껐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계속 불이 켜 있더라고요. 내 침실 창문으로 새하얀 눈밭에 비친 밝은 빛살이 보였어요. 그래서 와 본 거예요. 술에 취해 잠이 들었거나, 아니면 개가 하도 요란스레 짖어 대니 개한테 무슨 나쁜 짓거리를 하나 보다고만 생각했죠.”
우리는 다 쓰러져 가는 낡은 헛간을 지나쳤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괴짜의 헬멧에 달린 불빛이 어둠 속에서 야광 빛 연녹색 눈동자 두 쌍을 포착했다.
“저것 좀 봐요, 사슴들이에요.” 나는 괴짜의 양피 코트 소맷자락을 붙잡고는 살짝 격앙된 어조로 속삭였다. “바로 집 근처까지 왔네요. 무섭지도 않나?”
사슴들은 거의 배 부근까지 눈 속에 파묻힌 채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고요하고 담담했다. 마치 우리가 의미도 모른 채 어떤 의식을 수행하던 중에 우연히 그들과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 사방이 어찌나 깜깜한지 지난가을 체코에서 넘어온 젊은 숙녀처럼 우아한 암사슴들인지 아니면 다른 사슴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두 마리뿐일까? 그때는 적어도 네 마리는 됐던 것 같은데.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
나는 손을 내저으며 사슴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사슴들은 몸을 떨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우리가 대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 차분한 시선으로 우리를 배웅했다. 냉기가 내 몸을 엄습했다.
그사이 괴짜는 허름한 오두막의 출입문 앞에서 발을 굴러 부츠에 묻은 눈을 털어 냈다. 자그마한 창문들의 틈새는 플라스틱과 판지로 봉인되었고, 목재로 만든 대문은 검은 타르지방부재나 방수재로 사용되는 종이로 싸여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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