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일단 집에서
집에서 책을 읽다
출간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몹시 기대하는 책이 있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무슨 마음인지 알 것이다.
책 출간 소식은 생기가 넘친다. 누군가의 오랜 노력이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온다. 축하할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이 나올 때면 일본 전체가 떠들썩해진다. 나온다, 나온다 하고 뜸을 들이다 드디어 ‘나왔다!’ 할 때의 그 느낌. 가슴이 벅찰 정도다. 책을 둘러싼 화제에는 엄청난 활기와 열기가 느껴진다. 당연히 하루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래 기다려온 시리즈의 최신작, 몇 년 동안 출판된다는 소문만 무성하던 번역소설, 기적처럼 복간된 명작. ‘이런 날이 오다니!’ 싶은 책이 있다. 신간에 한정된 이야기도 아니다. 리뷰를 보고 무척 읽어보고 싶어진 논픽션,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소개한 에세이, 트위터에서 책 제목을 얼핏 보고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진 누구누구의 무슨 무슨 책. 책에는 새로우니 낡았느니 하는 것이 없으며, 오히려 오래되고 느린 점을 책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여길 때도 있다. 100년도 더 전에 어느 나라에서 쓰인 글이 조금도 그 빛을 잃지 않은 채 완벽히 선명하고 생생한 모습으로 존재한다니 책이란 정말이지 대단하다.
하여간 읽고 싶은 책이 있다는 건 참 좋고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와 동시에 ‘이 책을 어디에서 읽지?’ 하고 생각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독서다. 이왕이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 편히 읽고 싶다. 고대하던 독서시간을 앞두고, 어디에서 읽을지 고민하는 건 중요하다. 사람들은 벼르고 벼른 그 책을 대체 어디서 읽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집이다.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니 집에서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나도 매일 집에서 책을 읽는다. 가게를 닫고 집에 돌아와 값싼 위스키를 마시며 밤마다 하는 독서는 나의 일용할 양식이다. 내일의 노동을 위한 준비다.
그런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저 이 책을 즐기고 싶다, 온전히 책에 몰입하고 싶다’라고 강하게 열망할 때, 집이라는 장소는 얼마나 그걸 충족해줄 수 있을까. 쉽지 않으리라. 잠깐 시뮬레이션을 해보자. 어디까지나 가상 상황이다.
금요일 저녁 여섯 시, 일찌감치 일을 정리하고 먼저 퇴근하는 길에 환승역에서 일단 밖으로 나와 좋아하는 기노쿠니야서점 신주쿠 본점에 들른다. 평소에는 찬찬히 매장을 둘러보지만, 오늘은 살 책이 정해져 있다. 분명 있을 것 같긴 한데, 혹시라도 그 책이 이 매장에 없으면 오늘 밤 계획은 전부 무산된다. 없으면 북퍼스트에 가볼까? 근데 만약 북퍼스트에도 없다면…… 찾기도 전에 패닉 상태에 빠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어 매고 그 책이 있을 법한 곳으로 직행한다. 다행히 책을 발견하고 집어들어 곧장 계산대로 향한다. 오늘은 이 책을 읽을 것이다. 당장 읽고 싶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꾹 참는다. 출간 소식을 들었던 지난달부터 쭉 기대했던 책이다. 완벽한 상태로 첫 페이지를 펼칠 작정이다.
전철을 타고 가다보니 허기가 진다. 시각은 일곱시. 저녁밥은 어떡하지. 어딘가 들러서 간단하게 먹고 갈까. 하지만 얼른 집에 돌아가 책을 읽고 싶고, 평소라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소고기덮밥으로 급하게 한 끼 때우고 싶지는 않다. 뭐랄까, 오늘 밤은 아주 근사하게 보내고 싶다. 오늘 같은 날 소고기덮밥이라니 영 내키지 않는다.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지만 오늘 밤은 사치스러운 기분으로 보내고 싶다. 문득 샌드위치가 떠오른다. 오일 사딘정어리를 기름에 졸인 음식 같은 걸 넣은 샌드위치. 물론 맥주도 곁들여야지. 오늘은 특별히 페일 에일로 마셔야지. 슈퍼에 들러 이것저것 사서 별 탈 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곧바로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한다. 채소의 물기를 잘 빼야 샌드위치가 질척해지지 않는다. 드디어 완성이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겨우 소파에 앉는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사이드테이블의 베스트 포지션. 이러면 상체를 움직이지 않고 유리잔을 잡을 수 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자, 어디…….
책을 읽기 시작한다. 샌드위치를 먹는다. 꽤나 배가 고팠는지 순식간에 샌드위치를 다 먹어치웠다. 맥주도 어느새 바닥을 보인다. 이야기가 점점 진행된다. 이제 막 시작한 참이지만 재미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금세 맥주가 떨어졌다. 잠시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 보니 음악을 잊었다. 멋진 음악을 틀어야지. 하지만 그 전에 맥주부터 리필하자.
냉장고를 열려고 보니, 문에 걸린 화이트보드에 ‘쓰레기 버리기’라고 적혀 있는 게 눈에 띈다. 참, 쓰레기 버려야지. 그 밑에는 ‘축의금 봉투’라고 적혀 있다. 깜박했다! 이따가 편의점에 가서 사 와야지.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난 뒤의 그릇들도 설거지해야 한다. 맞다, 오늘 빨래를 안 하면 다음주에 곤란해진다. 내일은 하루종일 밖에 있을 테고 모레도 휴일 근무다.
세탁기 스위치를 누른 뒤, 맥주를 들고 자리로 돌아온다. 아차, 음악. 다시 일어나 음악을 튼다. 돌아와서 다시 독서를 시작한다. 이제 좀 집중해보자. 하지만 야속하게도 두 번째 맥주 역시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입도 심심하다. 뭘 또 만들자니 귀찮고. 냉장고에 뭐 없나.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축의금 봉투를 사러 가는 김에 편의점에서 사 올까. 아니, 조금만 더 읽고 가자. 이 맥주만 다 마시고.
맥주를 다 마신 뒤, 더 취하기 전에 할 일을 끝내놓자 싶어 쓰레기를 버린 뒤 편의점으로 향한다. 안주와 추가로 마실 맥주를 사서 집으로 돌아온다. 이럴 수가! 축의금 봉투 사는 걸 깜빡했다. 세탁기는 다 돌아가 있다. 널어야겠군. 역시 건조 기능이 있는 걸로 살걸. 빨래를 다 널고 겨우 소파에 앉는다. 드디어 할 일을 다 끝냈다. 좋아, 이번에야말로 진짜 집중해보자. 근데 현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어, 오늘 늦는다고 하지 않았나?
(중략)
‘책 읽을 장소’를 찾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 언뜻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에선 독서를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할 가게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 점은 고맙게 생각한다.
또 다행히 독서는 무척 간편한 취미라 책만 있으면 할 수 있다. 책 말고는 필요한 도구도 없고,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물론 지식이나 기술, 경험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책도 있지만, 이해라는 건 주관적이다. 좀 아리송해도 읽을 수는 있고,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와,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경우도 있다.
또 예를 하나 들어보자. 등산을 하려면 일단 등산화와 우비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가서는 안 되는 위험한 경로’도 있을 것이다. 독서에는 그런 준비물이나 제약이 없다.
그런데 그런 간편함 때문인지, 책을 읽는 것도 언제 어디서나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책 읽는 게 어디든 다 똑같지. 자기 방이든 집 근처 카페든 어디서든 읽을 수 있잖아.” 하지만 정말 그렇게 쉬운 일일까. 책의 세계에 몰입한 경우는 꽤 섬세한 상태다. 책에는 영상도 소리도 없다. 오직 글자를 읽어야 만들어지는 세계더구나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를 꼭 붙들고 있는 상태다. 그 열띤 내면과는 반대로 독서를 하는 사람은 고요하게만 보인다. 하는 일이라곤 가만히 종이를 응시하는 것뿐, 몸짓만 놓고 생각하면 명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생각보다 무방비하고 약하다. 명상이 그렇듯 자칫 잘못하면 금방 현실세계로 돌아오고 만다.
그럼 어떤 곳에서 책을 마음껏 기분 좋게 읽을 수 있을까. 어떤 장소가 ‘책 읽을 수 있는 곳’의 조건을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뭐가 됐든 어떤 곳을 ‘무언가에 전념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려면 저마다 요건이 있다. 예컨대 컴퓨터 작업을 위한 곳이라면 콘센트와 와이파이가 필수고, 타이핑하기 편한 높이의 책상이면 좋다. 다른 사람이 화면을 엿보지 못하게 하고 이것저것 벌여놓으려면 일정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컴퓨터 작업에 전념할 수 있는 장소라고 하기 어렵다.
독서에도 그런 장소가 있을까. 독서를 위해 갖춰야 할 환경에는 어떤 게 있을까. 쾌적한 독서시간을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뒷받침되어야 할까. 독서를 위한 장소라고 해도 장벽이 낮고, 상상력이 부족하고, 섬세하지 못하고,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지독한 둔감함을 드러내는 곳만 수두룩할지도 모른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다. 일단 가보자. 유력한 후보가 있다. 바로 ‘책의 카페’졸역이지만라고 불리는 곳, 즉 북카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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