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방
/ 문진영
여행에서 돌아온 그를 산타바바라에서 만났다. 그와 내가 같은 이름을 가진 동네의 1동과 2동에 각각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러니까 저자와 편집자가 아닌 동네 친구로서 처음 만나기로 했을 때, 그는 중간쯤에서 보죠, 하고 말했다. 중간이 어디냐고 내가 되묻자 그는 한번 알아봅시다, 라고 했다. 주말에 전화를 걸어온 그는 내게 준비가 됐느냐고 물었다. 준비 땅, 하듯 그와 나는 동시에 출발했고 나는 2동을 향해, 그는 1동을 향해 걸었다. 걸으면서 수화기 너머로 서로의 위치를 보고했다. 내가 월드부동산을 지날 때 그는 냉면집을 지나고 있었고, 내가 새로 생긴 카페 앞을 지날 때 그는 빵집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빵집을 지날 때 그는 철물점 앞에 있었는데, 그곳은 내가 이미 지나온 곳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에서 그와 내가 마침내 같은 길로 접어들었을 때, 저멀리 조그만 점 하나가 점점 커져서 결국 그가 되었을 때, 그곳이 바로 산타바바라. 산타바바라는 어느 연립주택 이름이었다.
오래된 주택과 빌라가 많은 동네였다. 그는 자신이 사는 빌라의 이름은 아비뇽이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청기와빌라인데 청기와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그날, 그와 나는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이름의 빌라를 여럿 찾아냈는데, 개중에는 신혼빌라라든지 최첨단빌라라든지 하는 것도 있었다. ‘한 벌에 오천원, 두 벌에 만원’이라고 붙어 있는 옷가게도 찾았고, 누군가 담장에 파란색 스프레이로 커다랗게 ‘SEX’라고 써놓은 것도 찾았다. 그리고 세탁소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문 앞에 몸집이 커다란 백구를 묶어두곤 하던 곳이었다. 백구는 세탁소 아저씨의 오토바이에 목줄이 매인 채 뛰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행복해보여서 말리지 못했어요, 그가 말했다. 나는 어느 겨울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러 세탁소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안락의자에 앉은 주인아저씨가 새끼 백구를 품에 안은 채 잠들어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술 산책’이라고 불렀다. 걷다가 맘에 드는 가게가 나오면 들어가 술 한잔하고, 술이 깰 때까지 무작정 걷다가 또 한잔하고, 그렇게 하면 밤새도록 마셔도 숙취 걱정이 없지요. 언젠가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술 산책’이 다음 책의 제목으로 괜찮겠다고 말했다. 그와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술을 마신 적은 없지만, 덕분에 동네에서 재밌는 것들을 많이 발견했다. 혼자 걸을 때도 언젠가 그에게 말해줘야지 하고 그런 것들을 수집했다. 별 소용은 없지만 왠지 소중한 것들을. 나는 그에게 역 앞에 ‘사는 게 껌껌할 때 껌을 씹으세요’라고 쓴 종이를 붙여놓고 껌을 파는 할머니의 좌판이 있다고, 핸드폰가게 앞 뽑기 기계에 ‘베스트 히트곡 모음집’이라는 음반이 들어 있는데 표지에 도통 처음 보는 노래 제목만 쓰여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어느 집 앞 화분에 화분보다 더 큰 늙은호박이 용케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 대해, 쌀가게 앞 보도블록에 몰려드는 비둘기들이 얼마나 뚱뚱한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런 얘기를 하며 단골 전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아저씨가 카운터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가 배낭을 뒤적거리더니 자그마한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봉투 안에는 우키요에풍의 그림이 그려진, 두꺼운 종이로 된 컵받침 두 개와 자그마한 성냥갑이 하나 들어 있었다. 내가 그것들을 하나씩 봉투에서 꺼내놓을 때마다 그는 와, 참 쓸모없네요, 하나같이 쓸데없어요, 라고 덧붙이고는 아하하 웃었다. 그렇게 웃을 때 그의 작은 눈은 완전히 사라져 하나의 곡선이 되었고 눈가에는 여러 겹의 주름이 잡혔다. 그는 확실히 잘 웃는 사람이었지만, 웃음을 그친 후에도 눈가의 주름은 사라지지 않아서 언제나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내가 출판사를 옮긴 뒤 처음으로 만난 저자였다. 그는 사라져가는 영화관에 대한 글을 썼는데, 어느 영화잡지가 몇 년째 그의 글을 지면에 싣고 있었고, 연재를 마칠 때쯤엔 책 한 권 분량이 되어 있었으므로 어찌어찌하다보니 나와 만나게 된 것이다. 연재를 그만두게 된 건 그 잡지가 발행을 그만두었기 때문이지만, 아무튼. 그는 영화보다 영화가 상영되는 공간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모든 상영관이 각각의 특유한 냄새, 유일무이한 어둠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아트시네마 야외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국일 여관의 간판이 어느 각도로 얼마만큼 기울어져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동두천 동광극장 대기실에는 소파가 총 아홉 개 있는데 모양이 같은 게 하나도 없다는 것도 나는 그에게 들어 알았다.
그의 책은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쇄를 다 팔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와 나는 계속 만났다. 가끔 만나다가, 자주 만났다. 주로 그가 어딘가에서 돌아온 뒤였다. 그때마다 나는 스무고개를 하듯 그가 머물렀음직한 도시의 이름을 대곤 했지만 레퍼토리는 매번 비슷했고 한 번도 맞힌 적은 없었다. 그는 다녀온 곳이 어디였는지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물건들을 기념품이라며 내게 주었다. 이번에 그는 일주일간 남쪽에 있는 어느 도시를 다녀왔다고 했다. 거기 있는 극장이 다음달에 문을 닫는답니다. 그가 말했다. 남아 있는 단관 극장 중에 세 번째로 오래된 곳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내가 만지작거리고 있던 성냥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극장 맞은편에 있는 호프집인데, 거기도 꽤 오래된 곳이에요. 귀한 겁니다. 성냥갑에는 복고풍 서체로 ‘사랑의 썰물, 호프&비어’라고 쓰여 있었다. 상자 안 성냥개비들은 머리가 초록색이었다. 초록색 불이 켜질 것 같아서 하나 꺼내 그어보았다. 불은 당연히 초록색이 아니었고 계란 썩은 내 같은 황냄새가 났다. 그때 주인아주머니가 나타나 자고 있는 아저씨의 등짝을 내리쳤다. 나는 재빨리 성냥불을 흔들어 껐다. 뭐 드릴까, 하고 아줌마가 물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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