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1944년 7월 7일.
이날은 광활한 대지에 나의 운명을 맡기던 날이다. 충칭을 찾아가는 대륙횡단을 위해 중국 벌판의 황토 속으로 그 뜨거운 지열과 엄청난 비바람과 매서운 눈보라의 길, 6천 리를 헤매기 시작한 날이다. 풍전등화의 촛불처럼 나의 의지에 불을 붙이고 나의 신념으로 기름 부어 나의 길을 찾아 떠난 날이다.
사실은 이날이 바로 ‘지나사변’支那事變 제7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때 일본은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지나사변이라고 말했다.
7년 전, 베이징北平〔지금의 베이징〕 교외의 루거오차오蘆溝橋 근방에서 야간 연습작전을 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중국군이 기습을 가하여 왔다는 구실을 만들어 중국 군영群英을 습격함으로써 일본은 대륙진출大戮進出의 서전序戰인 중국 침략전을 유발한 것이다. 이날을 나는 중국 쉬저우徐州에 주둔하고 있던 일군 부대 안에서 맞았던 것이다.
중국 주둔 일군에겐 이날이 뜻 깊은 날이 아닐 수 없었고 병영 안의 군인들은 마치 명절이라도 만난 듯이 모두들 마음이 들떠 있었다. 훈련도 여느 날보다 훨씬 일찍 마쳤다. 병기와 군화의 손질도 대강 마치고 이내 기념 회식으로 들어갔다.
천황이 하사하였다는 술과 담배가 각 내무반에 배급되었다. 일석점호 시간까지는 마음껏 먹고 마셔도 된다는 여유가 내무반의 분위기를 해이하게 흐려놓았다.
그러나 나는 원래 술과 담배는 전연 입에도 대지 않던 이유도 있었지만, 이날의 나의 긴장과 흥분은 모처럼의 술과 담배의 향연에다 나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막을 길 없이 안으로 죄어오는 나의 긴장은 감추기에 벅찬 흥분과 함께 손마디, 발톱에까지 전달되었다.
그러나 나는 침착하여야 했고, 그럴수록 태연하여야 했다. 가장 적절한 기회가 날 위해서 마련되어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나의 비장한 결의를 오늘 밤에 못 박아놓아야 했다.
일군 병영의 탈출을 밀약해놓은 우리 동료 일행에게 때가 온 것을 암시해주었다. 모두들 흥분과 긴장을 감추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눈빛으로 그 결의를 내게 전달해주었다. 우리 일행은 나를 포함해서 넷이었다. 김영록金永錄(현재 국군의 장교로 복무 중), 윤경빈尹慶彬(현재 실업에 종사하고 있음), 홍석훈洪錫勳(사망) 그리고 나다. 몸이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지어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나는 최후의 결의를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며 기도를 드렸다.
나의 생존가치는 지금 이 시각 이후로부터 비로소 존재한다고 나는 어금니를 갈았다. 나의 긴장이 턱뼈를 통해 내 전신에 용기를 북돋게 하였다. 시간이 천천히 나의 긴장도를 높여주며 흘렀다. 어두움이 한 발자국씩 다가서며 역시 나에게 채찍질을 하는 듯했다. 내 손바닥의 흥분이 땀으로 흐르는 동안 시간과 어두움이 뒤바뀌어 가고 왔다.
쉬저우시에서 동쪽으로 20리가량 떨어져 주둔한 이 일군 부대는 ‘쓰카다塚田 부대’라고 불리었다. 그 당시 빈번히 발생하던 한국 출신 학도병 탈출사고가 이 부대에는 거의 없었다는 명예의 부대인 쓰카다 부대에 우리가 전속을 온 지 10여 일이 지난 무렵이었다.
이 쓰카다 부대에서는 단 한 명의 탈주병을 내었는데, 그나마도 부대 본영에서 낸 사고가 아니고 파견지에서 일어났던 사고였다. 이 장본인이 바로 그때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을 다니다 나온 김준엽金俊燁 씨이다.
그러한 이유도 있고 해서 중지 방면으로 파견되어 신병훈련을 마친 우리 한국 학도병 출신 간부후보생 300여 명은 바로 이 쓰카다 부대에 집결되어 제2기 집단교육을 받도록 됐고, 그날은 이미 교육과정도 10여 일을 치른 날이었다.
이 부대에서의 탈출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점은 이같이 이 부대에 붙어 다니는 그 명예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사실 내가 이날까지 우리의 탈출을 미루어온 이유는 또 다른 것에도 기인하고 있었다.
그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협을 하던 말, 탈출 뒤에 남는 동료들, 그리고 떠나온 고국의 부모와 가족에 대한 보복조치가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의 앞에 극히 소심한 소견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입장은 충분히 그들의 위협에 구애될 수가 있는 형편이었다. 나는 장남이다. 거기다 일본에서 피해 와 있다. 다른 신학교와 달리 정규대학 과정의 일본신학교 재학생이다. 학도병 지원의 자격이 부여되어 있는 처지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 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맡겨버린 것이었다.
내가 지금 일본 병영 안에 병정으로 있는 이유는 나의 집안에 닥칠 불행을 예감했기 때문에 그 방파제로서 나를 스스로 설득시킨 결과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이곳에서 탈출한다면 어떻게 될 것이냐? 엄지와 중지로 머리의 두 관자놀이 뼈를 잡고 손바닥에 파묻힌 내 번민을 달래보았다. 숨이 탁탁 막혀왔다. 압록강 수풍댐 근방의 평북 삭주읍에서 지원을 마쳤고, 며칠 후인 1월 19일 정주를 거쳐 평양으로 가던 나의 입영 광경이 떠올랐다. 그 괴로운 회상은 나의 초조함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지나가주었다.
일본말 성경과 독일어 사전, 희랍어 성경과 사전, 이렇게 네 권을 든 학생모와 학생복 차림의 내가 정주역에 닿았을 땐 아무도 내게 눈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정주는 내가 도쿄로 가기 전 3년 동안 교원 노릇을 하던 곳이었다. 때문에 적지 않은 친구와 선배들이 있었지만, 막상 입영을 하는 마당에서 모두가 쌀쌀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 것이 요란스레 엇갈려 맨 ‘무운장구’武運長久의 띠며 일장기日章旗의 바탕엔 온통 사인을 받아 머리에 동여맨 입영자들과 비교해서 아무도 날 입영자로 볼 사람이 없었을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만장도, 다스키라는 멜빵도, 그 무운장구의 띠도, 또 히노마루(일장기)의 머리끈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 전쟁 중의 물자난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시골에서 입영을 위해 ‘축하한다’는 플래카드들이 지방관청과 유지들로부터 마련되어 보내왔건만, 나는 그것들을 몸에 한번 대어보지도 않은 채, 몽땅 우리 집 아궁이 속에 넣어버렸다. 그것들이 활활 타버릴 때 이미 나는 나의 입영 지원을 마음속에 불살라버린 것이다. 그때의 내 모습을 본 같은 입영자였던 R이라는 사람은 나를 어떤 학도병의 전송차 따라 나온 팔자 좋은 학생으로만 알았다는 말을 몇십 년이 지난 오늘도 하고 있다. 정주역에서 평양행 발차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의 시간이 있었기에 역 대합실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식들의 입영 때문에 우울한 그 지방의 유지들, 흐르는 눈물을 닦기에 정신없는 아낙네들, 거의 술에 만취되어 이성을 잃은 듯한 학도지원병들, 이름을 놓칠세라 친일파다운 격려와 축하인사를 뿌리고 돌아다니는 가증스러운 얼굴들, 이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홀로 고독을 즐기고 있던 내 귓전을 스치며 발차시간을 알리는 확성기 소리, 그리고 경의선 열차의 요란한 기적소리, 이 모든 것이 주마등같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나는 혼자였다. 평양에서 입영을 하기까지 나는 전연 학도지원병이라는 나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평양의 스무 날 동안 단 두 번의 면회가 있었던 것도 오늘 밤엔 안타까웠다.
어머니와 아내가 한 번, 그리고 아버님이 한 번, 그래서 꼭 두 번 오후의 교련을 면해본 일이 있었다. 하오의 교련을 받지 않으려고 매일 면회를 오게 한 학도병이며 되도록 평양 부근에 남으려고 매일같이 일인 고급 장교들을 요정으로 초청하여 가던 군상들의 그 구역질나던 회상이 쉬저우 땅의 바람 속에서 그대로 되살아오는 것이었다.
지원서에 도장을 찍고 고향 땅을 떠날 때 환송회 석상에서 행한 나의 답사가 그 어느 한구석에 숨었던 분노처럼 솟구쳤다.
“나는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해서 꼭 그 일을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나의 답사는 그렇게 짧은 한마디뿐이었다.
내가 학도지원병이 되어서 반년이란 치욕의 세월을 분노의 강으로 흘려보낸 지금, 난 나의 송별답사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그것의 실천을 꾀하고 있다. 내가 쉬저우 땅에서 죽음과 삶의 두 길을 재어보는 이 운명은 이미 평양 제42부대에서 결정된 것이다.
평양 제42부대.
날짜도 잊을 수 없는 그해 정월 스무나흗날.
나는 맨손으로 말똥을 치우고 말발굽을 닦아내는 일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200여 명의 대학생 학도병들과 같이 끌려온 곳이 제42부대. 그때의 울분은 지필로 기록할 수가 없지만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분과도 같이 처절한 것이었다.
몹시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적 작업을 계속하여온 우리는 대부분 손발에 동상이 걸려 고생을 하였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코 모든 것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행한 것도 아니건만, 그래도 정성 들여 말굽의 밑을 닦아내던 나의 성격은 끝내 나에게 하나의 시련을 주었다. 그것은 뜻밖에 악화된 오른쪽 엄지손가락의 동상이었다.
맨손바닥으로 말똥을 치우고 발굽 밑을 닦아내는 나의 일과 임무는 엄지손가락을 두서너 배로 부어오르게 했다. 밤이면 밤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이 부어오른 엄지손가락을 통해서 등골까지 쑤시게 만들었다. 불침번을 서는 초년병 동료들이 나의 고통을 안타까워해주던 그 정성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마다 나는 내 가슴속에 지닌 성경책을 꺼내어 몇 장씩을 읽어가며 아픔을 참아보았다.
일군에 대한 임무 충실은 조국에 대한 배반인가. 나는 이렇게까지도 생각하며 아픔을 참아야만 했다. 동상이 악화된 엄지손가락에서 오는 뼛속을 후벼내는 듯한 아픔을 한 나흘 동안이나 참고 견디어보았다.
드디어 닷새째 되던 날 더 이상 참고 일을 할 수가 없어 의무실을 찾아갔다.
의무실엔 의무관인 일본 중위가 버티고 있었다.
“곪았으니 째야 하겠군.”
그래도 그는 내게 담담한 한마디로 동정의 빛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동정의 표정은 나의 투병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이제부터 내가 당해야 할 그 아픔에 대해서 외과의사로서의 경험에서 약간 비쳐주는 동정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후방 의무실에는 마취제가 없으니까 좀 아플 텐데 잘 견뎌낼 수가 있을까?”
이 판국에 평양 제42부대에 마취제가 남아 있을 일본군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일본 의무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엄지손가락의 아픔이 어느새 멈춰진 듯했다. 그 대신 새로운 고통이 가슴에 몰려 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깊은 호흡으로 나의 가슴을 짓눌러보았다.
“……괜찮습니다!”
이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내가 또 하나의 나 자신과 싸우기를 2~3분이나 걸렸다. 그와 나와의 대결의식이 새삼스럽게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것이다.
그의 눈앞에 바싹 들이댄 나의 엄지손가락에 의무관은 알코올만을 한 두어 번 문지르고 그대로 메스를 갖다 대었다.
싸악, 이렇게 분명히 나의 머릿속에는 내 살이 쪼개지는 소리가 나의 조국이 베어지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웬일일까? 엄지손가락에서는 고름이 나오기는커녕 하얀 살 속을 스며 나타나는 새빨간 피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의무관을 쳐다보며 내 일그러진 표정을 폈다. 똑바로 나의 시선이 그의 시선을 타고 그의 동자瞳子 안으로 해서 그의 심중을 꿰뚫고 있었다.
일본 의무관의 한쪽 눈썹 끝이 약간의 경련 속에 치켜졌다.
싯누런 고름이 삐죽 쏟아져 나왔어야 했을 것을. 의무관은 시선을 피하면서 약간의 신경질을 그의 안면근육에서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눈치였다.
내가 눈을 잠시 감고 있는 동안 피가 뚝뚝 돋은 엄지의 다른 한쪽에 칼이 다시 들어가 살과 살을 쪼개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이번엔 정말 내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름은 없고 피만이 번져 나왔다.
엄지손가락을 뺑뺑 돌면서 다섯 번의 메스질이 나의 살가죽을 난자질했다. 머리로 모여 있는 나의 긴장과 신경이 겨우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내 손은 이미 내 손이 아니고 일본 의무관을 당황하게 한 한국 민족의 한 부분이다. 만일 이런 생각이 끝까지 날 지켜주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그 자리에서 쓰러졌거나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또 그렇지 않으면 비명 끝에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안으로만 소리 내어 흐르는 장강長江처럼 내 깊지 않은 가슴속에 하나의 고통의 강을 이루면서 스며들어갔고, 나의 표정은 끝까지 강물의 수면처럼 잔잔하였다.
아직도 이 칼자국은 내 엄지 손끝에 다섯 군데나 남아 있다. 그 엄지손가락은 병신이 되어 영원한 훈장처럼 칼자국을 남겨놓고 있다.
머큐로크롬을 통째로 뒤집어씌워놓고 지혈을 시키기 위해 꽁꽁 동여매었을 뿐. 그러나 나는 일군 육군 중위와의 대결에서 판정승을 얻었다는 자부심으로 그의 앞을 물러서려고 하였다.
“……야. 내 외과의사 생활 10여 년에, 너 같은 지독한 놈은 처음 본다. 장하긴 장하다. 독종이구나.”
나의 아픔은 이 한마디로 보람을 찾은 듯이 잠시 내게서 잊혔다. 그러나 ‘너 같은 일본 놈에게 아프다는 소리는 차마 하기 싫어서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올 뻔했다. 그런데 내가 채 의무실을 나오기 전에 한 후보생이 들어왔다. S라는 초년병 동료다. 왼손으로 거수경례를 하고 나오려고 하는 찰나 의무관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거기 좀 앉아 있어. 조금 쉬었다가 가.”
수술 후 조금 안정시켜서 보내고 싶은 인술의 표현이다.
S초년병은 엉덩이에 종기가 나 있었다. 의무관이 그곳을 건드리자 “아이구……”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의무관은 군홧발로 이 후보생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다.
쾅. 쓰러진 S초년병에게 던지는 한마디가 찌르릉 귀를 먹게 하였다.
“이놈! 저놈은 그 아픈 생손 다섯 군데를 그냥 쨌어도 소리 한번 안 질렀어…….”
아마 그동안 어지간히 이 의무관을 괴롭혀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엄지손가락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새로운 아픔을 주었다. 그것은 곧 있을 중국으로의 파견병 선발에 지장을 준다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입영한 지 만 4주가 되던 날 우리 가운데서 160여 명이 중국 중부지방으로 파견된다는 소문이 병영 안에 퍼졌다. 되도록 중국 파견을 회피하고 어떻게 평양 부근 또는 한국 안의 어느 구석에 떨어져 있기 위해 치사스러운 공작이 밤마다 공공연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나의 속셈은 전연 다른 것이었다. 이 엄지손가락만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나는 내가 할 일을 중국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안타까움에 나는 몸서리를 쳐야 했다.
조국의 아픔을 손으로 앓으면서 나는 이것이 내 운명인가 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의 이 모습을 본 친구가 대신 불침번을 서주는 때도 많았다. 나의 고통은 오히려 다른 것임을 모르고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어주는 것이 눈물겨웠다.
내일 중지 파견 선발에만 끼이면 나는 나의 조국의 아들이 될 수 있으련만. 그 당시의 나의 절망 속에 일루의 희망은 내가 충칭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든 중국만 가면 일군을 탈출할 수 있고 탈출만 하면 임정臨政에도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만 믿어졌다. 그렇지 못한 경우엔 중국군에라도 편입할 수 있을 것이다.
날이 밝아왔다. 조식 직후 완전무장을 갖추고 연병장으로 모이라는 전달이 왔다. 기상나팔이 울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배낭을 꾸렸다.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배낭은 제대로 꾸려졌다. 나는 깨끗한 붕대로 나의 오른손을 잡아매 목에 걸었다.
드디어 각개점호의 시간이 왔다. 우리 파견 요원들은 연병장에 정렬했다. 전후로 각 5보, 좌우로 각 2보의 간격으로 늘어섰다. 이 사이를 누비며 부대장은 점호를 하였다. 부대장인 소좌의 눈에 내 팔걸이가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팔은 어떻게 된 거야?”
“……생손을 앓고 있습니다.”
미처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뒤따르던 중대장이 나의 대답을 가로채었다.
“그래? 대단한 정도는 아닌가?”
자못 인자스럽게 소좌는 붕대로 둘레둘레 감긴 내 손을 만져보기까지 한다.
“뭐, 대단치 않을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이렇게 두 번의 대답을 연거푸 내뱉었다. 그러나 1주 이상이나 거의 밤잠도 자지 못하다시피 고생을 했으니 얼굴색인들 병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에, 그러나 아픈 몸으로까지 떠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성한 사람도 많이 있거든. 어떤가? 군은 여기에 그냥 있도록 하지……. 후일에 얼마든지 갈 수 있으니까.”
하늘의 빛깔이 갑자기 노오랗게 물들여져서 내게로 몰려오는 의식을 느꼈다.
무엇인가 그 중압감이 날 짓눌러서 나는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닙니다. 이번에 꼭 동료들과 함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 손가락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꼭 보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곧 나을 겁니다.”
나의 눈은 소좌의 얼굴 속에 유난히 빛나는 동자를 파고들었다.
“그래, 괜찮겠어?”
의아스럽게 부대장은 생각했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이 며칠간의 병영 분위기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쪽에 남기 위해 선발에서 빠뜨려달라고 하는 운동을 하는 수군댐을 이 일본 군인이 모를 리가 없을뿐더러 당연히 이런 부탁 때문에 향연도 여러 차례 받았을 것으로 상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소좌는 적이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나의 아래위를 한번 훑어보고는 이내 표정을 감춰버렸다.
“……그래, 정말 괜찮겠나?”
소좌의 눈은 금방 튀어나올 듯이 이글대었다.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어떤 감회가 그의 얼굴 위에 잠시 머물렀다.
“됐어, 그 원기가 장해!”
이렇게 하여 나는 중국 땅에 내 발을 붙이게 된 것이다. 그 투박한 군홧발 밑의 촉감이라 해도 조국과 이국의 땅의 부드러움은 달랐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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