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프루스트 사랑하기
화가인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들, 도시에서 태어난 내가 섬 소년이 되어 눈물 날 것 같은 석양의 바다를 상상하는 게 행복해서다. 여기서 행복하다는 건 그러니까 고독과 그 슬픔까지 껴안고 가는 감정이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실 그 제목만으로 구십 프로 먹고 들어간다.
그 누군들 잃어버린 시간을 빼고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으랴. 하지만 이 길고 지루한 독서 여행을 끝마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프루스트 사랑하기는 끝까지 오르지 못할 산 정상에 올라가는 사람의 기분과도 비슷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프루스트를 사랑하는 시간은 영원한 짝사랑의 시간이다.
누가 그랬을까? 죽음을 자주 떠올릴수록 남은 인생은 더욱 빛난다고.
끝까지 읽지도 않을 거면서 그냥 사서 꽂아둔 뒤 비라만 봐도 뿌듯한 책, 나 역시 오랜 세월 무슨 계시라도 받은 듯 무작정 그 제목이 좋았다. 사실 내가 그려온 그림 세계가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다름 아니다. 몇 번이나 읽다가 말고 또 읽다가 말고 여러 번 되풀이하던 내게 90년대 초, 뉴욕에 사는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한주가 멀다시피 선물을 보내준 적이 있다. 평생 받을 선물을 그때 한꺼번에 다 받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요즘 같지 않아서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사심이 없었다. 초콜릿, CD 전집, 해바라기씨, 워크맨 등등 보내준 선물들 속에 영문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었다.
책 속에 끼워 넣은 짧은 엽서에 내 글과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씌어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어느 날, 책 정리를 하다가 그 책을 발견한 나는 그 책과 인연이 있거나 그냥 무심코 사서 꽂아두거나 선물 받거나 주거나 제목에 꽂혀 그냥 사놓고 끝까지 읽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프루스트라는 이름으로 연결되는 나이면서 너 이기도 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다. 여기서 프루스트라는 이름은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름을 빌린, 개인의 내밀한 시간에 관한 상징이다.
소설의 서두에 농구경기장에 가는 게 일상이며 취미인, 지적 장애를 앓는 마흔 살 소녀는 우리 아파트에 살던 나와 가깝게 지낸 실제 인물이다. 지하철역에서 내가 몇 번을 탈까 헤매고 있을 때 농구장에 가는 길이던 그녀가 길을 가르쳐주며 말했다.
“그림 그리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우연히 마주치면 늘 경기장에 같이 가자 했다는 그녀는 10년 전 세상 떠난 내 동생을 무척 따랐다. “오빠 공 하나 드릴까요?” 해서 받았다며 동생이 공을 들고 들어온 적도 있다. 오빠가 안 보인다며 섭섭해하던 그녀도 지병으로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내가 만나본 가장 때 묻지 않은 영혼이었을 거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대개 실존 인물에서 영감을 얻어 과장되거나 변형된 상상의 인물들이다.
우연히 스친 사람들이거나 가까웠던 사람들, 그들의 인생에 살을 붙여 제3의 인물이 탄생되기도 한다. 모든 필자가 그렇듯, 그들 사이에 내 자신의 감성을 카메오처럼 살짝살짝 숨겨놓기도 했을 것이다.
이 책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에 대한 뜬금없는 명상,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좋은, 우리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 여행기였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의 한 줄이 떠오른다.
지나가는 바람에 나는 입 맞추었다.
2024년 5월, 황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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