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서문
급속한 저출생,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고령자 돌봄 문제는 각국이 직면한 중대 과제이다. 일본에서는 2000년에 개호보험법이 시행된 바 있는데, 이 책은 개호보험 시행 이후 고령자 돌봄 현장의 경험적 연구와 이를 뒷받침한 이론적 근거를 논한 연구서이다.
복지 선진국 북유럽을 비롯해 서구권에서는 고령자 복지 부문을 포함해 ‘복지국가’를 지향해왔는데, 1980년대에 들어 복지국가의 위기론이 나오면서 복지다원사회에 대한 논의가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개호보험이 도입되었다1997년 제정, 2000년 시행. 개호보험제도는 초기에 독일과 영국 모델의 절충안이라고 이야기되었으나, 시행 후 세계 그 어디에도 없는 독자적인 제도가 되었다.
일본의 독자들에게는 개호보험제도가 널리 알려져서 이 책에서는 상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일본의 개호보험제도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이 제도를 모델 삼아 2008년부터 실시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떠올리면 좋겠다. 요개호도별 5단계 구분[장기요양등급 판정], 이용료 상한선 설정[월한도액], 시설에 들어갈지 집에서 돌봄을 택할지 선택할 수 있는 점[재가급여, 시설급여], 본인 부담률[한국의 경우 재가급여 이용자는 장기 요양급여 비용의 15%, 시설급여 이용자는 20%, 일본은 재가급여·시설급여 일률 10%]을 보면, 일본의 개호보험이 좀 더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으나 큰 틀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은 개호보험을 따랐다. 제도 자체에 대한 비교연구는 연구자의 논문 등을 참고해보면 좋겠다.
개호보험이 일본 사회에 끼친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 돌봄은 가족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보는 국민적 합의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나는 ‘가족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가족주의가 굳건한 아시아에서는 육아도 고령자 돌봄도 실상 100% 가족 책임으로 귀결되어왔고, 이런 상황에서 개호보험은 ‘돌봄의 사회화’의 첫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돌봄의 부담을 일부나마 공적 책임으로 인정하는 제도가 성립되었고, 사회보험인 개호보험의 가제 가입 요건은 눈 깜짝할 새 이용자의 권리의식을 고양했다.
사회보험은 사회연대를 통한 리스크 및 부담의 재분배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성립했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과 같이 계층격차가 너무 커서 평균이 의미가 없는 곳은 사회연대에 대한 합의를 이루기 어렵다. 그래서 미국에는 공적인 건강보험이 없고 더욱이 개호보험제도의 성립은 기대할 수조차 없다. 1990년대 일본에서 개호보험, 2000년대 한국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설립된 것은 아직 우리가 사회연대를 유지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증거다.
개호보험법이 시행된 지 24년이 흘렀다. 초창기 4조 엔 규모였던 일본의 개호보험 시장은 20년이 지나자 14조 엔으로 확대되었고, 그동안 돌봄 현장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관료의 계획에는 없던 자생적 돌봄사업들이 시민사회에서 생성되어 발전해왔으며, 그사이 정부는 시민사회의 돌봄사업을 개호보험에 포함시켰다. 이 중에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도 거절하지 않는 방식’으로 아이, 장애인, 고령자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민가 활용형) 소규모 다기능 공생 지역밀착 서비스’, 또 내 집과 같은 분위기에서 임종을 맞이할 수 있는 ‘홈 호스피스’와 같은 시민사업체의 사례 등이 있다. 이는 당장 해결이 필요한 이용자들의 ‘니즈’에 응답한 시민사업체의 뜻깊은 시도이며, 개호보험제도는 이 시민사업체의 의지와 활동을 ‘먹고살 수 있는 일거리’로 바꾸었다. 이것이 이 책에서 내가 ‘사’私, 가족도 ‘민’民, 시장도 ‘관’官, 정부도 아닌 ‘협’協, 시민사회 부문에 기대했던 이유이며, 시민사업체의 돌봄 현장을 찾아다닌 성과이기도 하다.
또 일본 역사상 최초의 경험인 개호보험이 지난 24년간 시행되면서, 돌봄 현장의 경험은 더욱 풍부해지고 스킬이 상승했으며 인재가 양성되었다. 개호보험이 시작될 때는 불가능했던 고령자 1인 가구의 재택 돌봄도 이제 가능하다는 점을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복지 선진국에 비해 일본의 고령자 돌봄 예산과 인적 자원의 투입량은 적은 편이지만, 돌봄의 질은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나는 돌봄 현장을 다니면서 실감하고 있다. 지난 24년간 개호보험의 감시자로서 나는 돌봄 현장이 확실히 진화했다고 증언할 수 있다. 시민사회의 경험 축적은 사회의 큰 자산이다.
그런데도 돌봄노동자에 대한 낮은 처우는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돌봄노동을 깎아내리는 돌봄노동관을 반영한다. 지금껏 정책 설계자들은 돌봄이 아무나 할 수 있는 비숙련 노동이며 더욱이 ‘여자가 집에서 해오던 공짜 노동’이라고 여겨왔다. 돌봄노동의 싼 임금은 여태껏 정책 설계자들이 돌봄을 받는 고령자의 처우가 그만하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쓸모없어진 노인은 사회의 짐’이라는 보는 노인차별 의식이 그 뒤에 숨어 있다. 성차별과 연령차별이 겹치는 영역이 바로 돌봄에서 드러난다.
2000년대 이후 격차를 심화해온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인해 개호보험은 다시 재가족화와 시장화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돌봄의 사회화’의 첫걸음은 두 번째, 세 번째 걸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그 어떤 제도도 권리도 우리의 손에 저절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요구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 주어지는 수도 있다. 이미 우리가 쟁취했다고 생각한 제도나 권리조차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앗아갈 수 있다. 24년째에 들어선 일본의 개호보험은 요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비슷한 사회적 배경에서 일본의 고령화를 목격한 한국의 독자들에게 일본의 경험은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이 경험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배우고 단점을 뛰어넘어 한국사회에 앎자은 고유한 돌봄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 책임은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 있다.
2024년 봄
우에노 지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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