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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자락에 서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소망이랄까 숙제랄까, 해 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결행 날짜를 12월 25일로 잡았다. 크리스마스 저녁에 다른 약속이 잡힐 리 만무다. 용산 기준으로 일몰 시간이 오후 5시 19분인 것도 확인했다. 카메라를 챙기고 편한 신발로 집을 나섰다. 내 행선지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 탐정 놀이하던 아이 때로 돌아간 것 같다. 갈월동에서 152번 버스로 환승하여 ‘한강대교 북단 LG유플러스’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하늘은 흐리지만 날씨는 포근하고 미세먼지 예보도 보통으로 나온 날이다. 심호흡을 한 후 걸음을 남쪽으로 옮겼다.
대학이 온수역 근처에 있어서 ‘입학’ 첫날부터 1호선과 반평생 인연이 생겼다. 한강과의 인연도 함께 따라왔다. 학교 가는 날이면 반드시 한강을 왕복으로 건넜으니 지금까지 만 번은 족히 넘나들지 않았나 싶다.
늦은 밤 한강철교를 건널 때면 노량진에서 공시생들이 많이 탄다. 그들이 창을 가리는 데다 바깥이 어두워 불빛만 언뜻언뜻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햇살 충만한 아침 출근길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른편엔 63빌딩, 왼쪽엔 한강대교를 번갈아 보면서 확 트인 강 수역을 가로질러 달리면 가슴 터질 듯이 대기를 들이마시는 것 같은 호기로움이 생긴다.
한강대교는 중간에 노들섬이 있어 여느 다리와는 다른 분위기다. 노들섬은 낮에 보아도 그럴듯하지만 새벽 일출 때엔 운치가 대단하다. 섬에 수풀이 우거진 철, 거울 조각을 흩뿌려놓은 듯한 수면 위로 물새 떼라도 떠다니는 날이면 진부하리만치 교과서적인 로망이 물과 하늘 사이의 거대한 허공을 휘감는다. 뒤편으로 멀어져가는 노들섬을 곁눈질하며 허구한 날 전철로 철교만 넘을 게 아니라 저쪽 다리를 직접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 꽤 오래됐다.
하지만 이건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섬을 밤톨처럼 깔끔하게 정리하기 전의 풍경이다. 잡목과 잡초가 자라고 군데군데 모래톱이 터 잡은, 있는 그대로의 수더분한 모습을 눈 뜨고 못 보는 개발행정 마인드가 승리하기 전까지의 스토리다. 결국 성사되진 않았지만 겨울에 스케이트장을 설치하겠다는 발상이 나오기 전의 이야기다. 게다가 노량진에서 노들섬까지 백년다리라는 보행교를 놓을 거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도는 게 아닌가. 섬이 더 망가지기 전에 대교를 걸어야겠다는 조바심마저 들었다.
베르가모 웨딩홀을 지나 찻길을 건너 ‘한강대교’라는 동판이 붙어 있는 출발점에 선다. 5시 3분이다. 오른쪽으로 한강철교와 63빌딩이, 왼쪽으로는 바다같이 넉넉한 강 자락, 그리고 강변을 따라 도열한 아파트들이 보인다. 동작대교는 멀어서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오른쪽 보행로로 걷기 시작한다. 다리 입구에 새로 생긴 이층 전망대가 있다. 계단에 개업 축하 화분이 놓여 있는 걸로 봐서 최근에 개장한 모양이다. 난간 쪽이 보행로, 그다음이 자전거도로, 그다음이 차도다. 아래쪽으로 강변 산책로가 내려다보이고 이 겨울에도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잿빛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는 강변 풍경이 정지화면처럼 멈춰 있다. X축인 수평선의 화폭 위에 초현대식 빌딩들과 물그림자가 여러 개의 Y축을 늘어뜨리고 있다. 몇 발짝만 가면 더 좋은 앵글이 나오니 계속 사진을 찍게 된다. 디지털카메라의 문제는 감각이 헤퍼진다는 점이다. 아무렇게나 누르고 무턱대고 찍으니 영혼 없는 이미지가 양산된다. 서른여섯 장짜리 필름카메라 시절, 한 장 한 장 셔터를 누르기 위해 들였던 정성과는 비교가 안 된다.
다리 난간에 진행 방향으로 짧은 문장들이 연이어 적혀 있다. “이겨야 할 사람은/당신의 경쟁자가 아니라/바로 어제의 당신입니다./어제의 당신에게 지지 마세요./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하고/앞서 있는 사람이 되고자/노력하세요.”(성악가 조수미) 직접 쓴 글을 기부했나 보다.
이런 글도 있다. “나의 레이스는/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어제보다 더 나은 전성기를 위해/꾸준히 더 연습하고/매일매일/나를 사랑합니다./큰 소리로/파이팅!/한번 외쳐볼까요?”(수영선수 박태환) 짤막한 시 구절도 보인다.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시인 정호승)
지나는 사람들이 심심할까 봐 붙여놓은 글귀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다. 난간 위에 설치된 SOS 생명의 전화기와 인명구조 장비 보관함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왜 스스로에게 지지 말라는 건지, 자신을 사랑하라는 건지, 울지 말라는 건지 알아차렸다. 여기까지 와서 난간을 넘을까 말까 고민하는 영혼이 있다는 뜻 아닌가. 말로만 듣다 현장에 직접 와보니 여간 심란해지는 게 아니다.
어릴 적 자라던 동네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에 큰 다리가 있었고 그 너머에 유원지가 있었다. 식구들과 그곳으로 소풍을 나갈 때엔 종점까지 가는 합승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면 금세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한다. 버스가 다리를 건널 때면 머릿속까지 울렁거렸다. 그러면 어머니가 “너 또 멀미하는구나, 얼굴이 노랗네” 하면서 창문을 열어주었다. 아버지도 내 체질을 닮아―그 반대인가―멀미를 자주 했다. 버스에 타면 아버지는 늘 기사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거기가 덜 흔들린다고 했다.
차장이 ‘오라이 오라이’ 하면서 표를 끊어주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이 전반적으로 거칠었다.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괜히 시비를 거는 승객이 한둘은 꼭 있었다. 한번은 술 취한 사내가 욕설을 퍼부으며 버스 천장을 주먹으로 올려 쳤는데 지붕의 환기 뚜껑이 열리면서 하늘이 보였다. 어린 눈에 버스 지붕이 터진 줄 알고 겁에 질려 숨도 크게 못 쉬었다.
이런 광경은 전쟁 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의 공통적인 기억일 거다. 혼자 집을 보고 있을 때 나무 대문 틈새로 상이군인의 쇠갈고리와 바닥에 뉘어 있는 목발, 왼손에 모자를 들고 적선을 청하지만 돈 보따리를 든 장교는 그냥 지나친다. 시공을 초월하여 공유되는 고통의 교집합이 있다.
유원지에 도착하면 보트를 빌려 타거나 회전목마 위에 올라 스무 바퀴를 도는 게 주된 오락이었다. 둘 다 멀미를 유발하는 놀이여서 동생들에게 차례를 양보하고, 나는 흔들리지 않는 육지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어쩌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노래를 혼자 불러보면 강물에 조약돌을 던지던 옛날의 안경 낀 그 아이가 곡조를 낚아채 주인공 행세를 한다. 근처에 사람들이 멱을 감다 자주 사고가 나는 곳이 있었는데 “여기는 물귀신이 나오므로 입욕을 엄금함”이라는 경찰서장의 경고 팻말이 붙어 있었다.
재미 삼아 간이 낚싯대를 들고 강에 나간 적이 있었다. 낚싯줄을 물속에 넣기만 해도 손바닥만 한 피라미가 계속 올라오는 게 아닌가. 작은 양동이가 가득 찰 정도로 고기 풍년이 들었던 그날이 내 평생 아버지와 함께했던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남아 있다. 팔딱팔딱 뛰어오르던 잔챙이들과 선글라스를 낀 아버지의 모습이 앨범 속의 흑백사진처럼 내 심상에 찍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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