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행동
우리는 전략을 정했다. 어떤 행동이 벌어졌다고 하자. 비난할 만한 행동일 수도 있고, 훌륭한 행동일 수도 있고, 그 사이 어디쯤 애매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로부터 1초 전에 일어난 어떤 일이 그 행동을 촉발했을까? 이것은 신경계의 영역이다. 그로부터 몇 초에서 몇 분 전에 일어난 어떤 일이 신경계를 자극하여 그 행동을 일으키게 했을까? 이것은 대체로 무의식적으로 감지되는 감각 자극의 영역이다. 그로부터 몇 시간에서 며칠 전에 일어난 어떤 일이 그 자극에 대한 신경계의 반응성을 바꾸었을까? 호르몬의 급성 작용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전 수백만 년 전에 처음 이 연쇄가 시작된 진화적 압력까지 거슬러올라가볼 것이다.
자, 준비는 됐다. 다만 하나 빠진 게 있다. 이처럼 크고 중구난방인 주제에 접근할 때는 먼저 용어를 정의하는 것이 일종의 의무다. 썩 달갑지 않은 의무다.
이 책의 핵심 단어들을 몇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공격성, 폭력, 연민, 감정이입, 공감, 경쟁, 협동, 이타성, 질투, 샤덴프로이데, 앙심, 용서, 화해, 복수, 호혜성, 그리고 (왜 안 되겠는가?) 사랑. 우리는 정의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왜 어려울까? 서문에서 강조했듯이, 이런 용어 중 많은 수가 그 의미의 전유와 왜곡을 놓고 이데올로기 싸움이 벌어지는 대상이라는 것이 한 이유다. 단어에는 힘이 있고, 그 정의에는 종종 황당하리만치 개성적인 가치들이 담뿍 담겨 있다. 내가 ‘경쟁’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는 방식을 예로 들어보자. ⓐ‘경쟁’―내 실험실이 케임브리지 실험실과 어떤 발견을 놓고 경주한다짜릿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는 겸연쩍다. ⓑ‘경쟁’―즉석 길거리 축구에 참가한다좋다, 단 점수가 너무 일방적이라면 최고의 선수가 편을 바꾼다는 전제에서. ⓒ‘경쟁’―아이의 선생님이 추수감사절 칠면조 그림 그리기 대회를 연다고 선언했다한심하고 어쩌면 주의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 계속 이런 대회가 이어지면 교장에게 알려야 할지도 모른다. ⓓ‘경쟁’―누구의 신이 살인을 무릅쓰고 받들 가치가 있는가피하고 싶다?
하지만 정의가 어려운 이유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은 따로 있다. 서문에서 말했던 문제로, 이런 용어가 서로 다른 분과에 속하는 과학자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띤다는 점이다. ‘공격성’은 사고와 정서의 문제인가, 아니면 근육과 관련된 문제인가? ‘이타성’은 세균을 포함하여 다양한 종에서 수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니면 아이들의 도덕 발달의 문제인가? 서로 다른 시각이 암시하듯, 서로 다른 분과들은 묶고 나누는 작업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는 편이다. 이 과학자들은 행동 X가 두 가지 하위 종류로 구성된다고 믿지만, 저 과학자들은 그것에 17가지 맛이 있다고 믿는다.
‘공격성’의 여러 종류를 사례로 살펴보자. 동물행동학자들은 공격을 공세적 공격과 방어적 공격으로, 즉 영역상 침입자의 공격성과 거주자의 공격성으로 이분한다. 두 형태의 바탕에 놓인 생물학은 서로 다르다. 그 과학자들은 또 동종같은 종 구성원들 사이의 공격과 포식자를 물리치기 위한 공격을 구분한다. 한편 범죄학자들은 충동적 공격과 계획적 공격을 구분한다. 인류학자들은 공격성의 조직화 수준에 관심을 두어, 전쟁과 종족 간 복수와 개인 간 살인을 구별한다.
게다가 여러 분과들은 반응적도발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난 공격과 자발적 공격을 구분하고, 열혈의 감정적 공격과 냉혈의 도구적 공격가령 “나는 네가 차지한 자리에 둥지를 짓고 싶어. 그러니까 썩 꺼져. 아니면 네 눈알을 쪼아버릴 테야. 하지만 네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아니란다”을 구분한다. 그다음에는 “사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아니란다”의 또다른 형태도 있다. 내가 좌절했거나,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아픔을 겪었기에 공격성을 누군가에게 퍼붓고 싶은데 마침 약한 상대가 눈앞에 있기 때문에 그를 표적으로 삼아야겠다는 공격성이다. 쥐에게 쇼크를 주면, 그 쥐는 가까이 있고 자신보다 덩치가 작은 쥐를 문다. 서열 2위 개코원숭이 수컷이 1위 수컷과 싸워서 지면, 녀석은 3위 수컷을 쫓는다. 실업률이 높아지면, 가정폭력 발생률도 높아진다. 4장에서 더 살펴보겠지만, 우울하게도 이런 전위傳位 공격은 실제로 가해자의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낮춘다. 남에게 궤양을 안기면 내가 궤양을 얻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반응적이지도 도구적이지도 않고 순전히 쾌락을 위해서 자행되는 섬뜩한 공격성의 세계도 있다.
또 일종의 하위 종류로 전문화된 공격성이 있다. 가령 모성적 공격성은 종종 별도의 내분비학적 기원을 갖추고 있다. 공격과 공격의 위협을 드러내는 의례적 행동도 다르다. 많은 영장류는 실제 공격 행위보다 의례적 위협 행동송곳니를 드러낸다거나 하는 행동을 더 많이 한다. 샴싸움고기의 공격성도 대체로 의례적이다.
보다 긍정적인 용어에 대한 정의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우리는 감정이입 대 공감, 화해 대 용서, 이타성 대 ‘병적 이타성’을 구별해야 한다. 심리학자에게 ‘병적 이타성’은 파트너의 마약 사용을 돕는 사람이 보이는 감정이입적 상호의존성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신경과학자라면 이마엽 곁질 손상의 결과라고 묘사할 것이다. 그런 손상을 입은 사람은 전략이 바뀌는 경제 게임에서 상대로부터 거듭 배신을 당해도 덜 이타적인 전략으로 바꾸지 않는데, 설령 상대의 전략을 말로 설명할 수 있더라도 그렇다.
긍정적 행동에 관해서라면, 가장 흔한 문제는 궁극적으로 의미를 초월한 문제다. 가령, 순수한 이타성이란 것이 정말로 존재할까? 선행을 호혜성, 공개적 찬사, 자부심, 혹은 천국의 약속에 대한 기대와 분리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 문제가 흥미로운 영역에서 드러난 사례를 러리사 맥파커가 2009년 『뉴요커』에 「가장 친절한 절개The Kindest Cut」라는 기사로 보도한 적이 있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아니라 모르는 이에게 제 장기를 준 기증자들에 관한 기사였다. 이것은 순수한 이타성의 행위로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인들 때문에 혼란스러워했고, 의심과 회의를 품었다. 그는 자기 콩팥을 주고 은밀히 돈을 받기를 기대했을까? 관심에 목마른 종자인가? 수혜자의 인생에 끼어들어서 결국 수혜자의 삶을 망치려고 할까? 그가 얻는 대가는 무엇일까? 기사는 이런 극진한 선행이 그 초연함과 무정함 때문에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책을 관통하는 한 가지 중요한 논점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열혈의 폭력과 냉혈의 폭력을 구분한다. 전자를 더 잘 이해하고, 그 변명이 되어줄 요인을 잘 찾아낸다. 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자에 대한 분노를 못 이겨서 그를 죽이고 만 남자의 애통함을 상상해보라. 거꾸로, 무정한 폭력은 무섭고 불가해하게 느껴진다. 그런 폭력은 심박수에 일말의 변화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소시오패스적 청부 살인업자, 한니발 렉터 같은 인간의 폭력이다. 냉혈한 살인이라는 표현이 고약한 뜻인 것은 이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장 선하고 친사회적인 행위가 긍정적 감정으로 가득한 마음 따듯한 행위이기를 기대한다. 냉혈한 선행이란 모순으로 들리고 심란하게 느껴진다. 언젠가 나는 신경과학자들과 내로라하는 승려 명상가들이 모인 학회에 간 적이 있다. 스님들이 명상하는 동안 그 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모임이었다. 한 과학자가 한 스님에게 가부좌를 트느라 무릎이 아파서 명상을 중단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스님은 대답했다. “가끔 계획보다 이르게 멈출 때가 있습니다만, 무릎이 아파서는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저 내 무릎에 자비를 베푸는 행동입니다.” 나는 생각했다. ‘우와, 이분들은 딴 행성에서 온 게 틀림없어.’ 냉철하고 칭찬할 만한 일이긴 해도 딴 세상 이야기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열정의 범죄와 열정의 선행을 가장 잘 납득한다뒤에는 보겠지만, 냉정한 친절도 종종 권할 만한 점이 있기는 하다.
열혈의 악행, 마음 따듯한 선행, 그리고 냉혈의 악행 및 선행이 안기는 불안한 부조화의 느낌. 여기에 담긴 핵심을 집단수용소 생존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엘리 위젤이 이렇게 잘 요약한 바 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강한 사랑의 생물학과 강한 미움의 생물학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이 깨달음은 우리가 공격성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한다. 우리는 잘못된 종류의 공격성을 싫어할 뿐, 옳은 맥락의 공격성은 좋아한다. 거꾸로, 아무리 칭찬할 만한 행동이라도 잘못된 맥락에서는 전혀 칭찬할 만하지 않게 된다. 인간 행동의 운동적 속성은 근육 움직임의 이면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일에 비하면 덜 중요하고 덜 어렵다.
이 점을 절묘하게 보여준 연구가 있다. 뇌 스캐너에 누운 피험자들이 가상현실 속 어느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다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 혹은 위협적인 외계인이 있다. 피험자는 상대에게 반창고를 붙여주거나 총을 쏴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할 수 있었다. 총을 쏘는 것과 반창고를 붙이는 것은 다른 행동이다. 하지만 다친 사람에게 반창고를 붙이는 것과 외계인을 쏴버리는 것이 둘 다 ‘옳은’ 행동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두 가지 형태의 옳은 일을 상상하는 피험자들은 뇌에서 가장 맥락을 잘 읽는 영역인 이마앞엽 겉질에서 똑같은 회로가 활성화됐다.
요컨대, 이 책의 거멀못에 해당하는 핵심 용어들은 그 커다란 맥락 의존성 때문에 정의하기가 유난히 어렵다. 따라서 나는 이 점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용어들을 묶으려고 한다. 어떤 행동이 친사회적인가 혹은 반사회적인가 하는 식으로 나누지는 않겠다. 내 취향에는 너무 냉혈한 표현이다. ‘선한’ 행동과 ‘악한’ 해동으로 부르지도 않겠다. 너무 열혈이고 뜬구름 같은 표현이다. 간결함을 한사코 거부하는 개념들을 부르는 편리한 준말로서, 나는 이 책을 우리 최선의 행동과 최악의 행동의 생물학을 살펴보는 책이라고 부르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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