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나는 물리학자다. 그 가운데에서도 나는 나를 문화를 연구하는 ‘문화물리학자’로 부른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문화 연구를 과연 물리학의 한 분야로 볼 수 있는지 궁금해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마음을 나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KAIST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래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져왔으니 말이다.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진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의 모양이나 무성한 나무 잎사귀에 새겨진 무늬 안에도 과학적 질서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틀어 과학자를 꿈꾸기 시작한 때부터.
물리학과 문화. 나는 두 낱말의 뜻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둘 사이의 연결고리 찾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 여겨왔다. 문화란 인류의 삶의 방식과 이를 통해 만들어 낸 것들의 총체이므로 물리학도 응당 문화에 포함되고, 물리학이란 모든 물物체들의 이理치를 알아내는 학문이므로 문화도 당연히 그것의 탐구 대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생성되지 않는다》는 그 연결고리를 찾으려 떠났던 나의 여정의 기록이다. 처음 《경향신문》에 ‘박주용의 퓨처라마’라는 제목으로 미래의 과학과 문화에 대한 연재를 시작할 때는 학교에서 강의해 오던 대로 문화 콘텐츠 제작에 사용되는 과학의 원리를 하나씩 열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아이작 뉴턴1643~1727의 고전광학을 알면 아이맥스IMAX 기술을, 사인sine과 코사인cosine 곡선의 신호를 겹쳐 그리는 법만 알면 음악을 만드는 원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순진한 발상이었던 것 같다.
나는 때로는 예술이나 문학도 결국 시공간spacetime 속에 자리하며 물리학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물체일 뿐이라고 여기는 콧대 높은 과학자처럼 굴기도 했고, 또 때로는 그것들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추상抽象의 결정체는 어차피 과학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변명하는 게으른 아웃사이더처럼 굴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에서 즐거움의 태반은 지도에 없는 마을에 도착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세린디피티serendipity’기분 좋은 놀라움에서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연재를 이어갈수록 과학과 문화의 연결고리는 학교 연구실에 앉아서 고안하는그리고 대다수가 빛을 보지 못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기술’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새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술관에서, 공연장에서, 그리고 자연 속에서 새로운 답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과학과 문화의 진정한 연결고리는 그것들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깨닫고, 이로부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 조각의 시공간을 끊임없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모습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흔히 우리는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예술가 들을 그들의 제일 유명한 업적과 작품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런 겉모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빛나고 있는 그들의 꿈과 소망이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따로가 아닌 하나의 연속체continuum를 이루고 있음을 밝혀서 우주의 근원을 알게 해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 사람보다 수천만 배 더 빠르게 계산을 할 수 있는 컴퓨터를 발명한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 세상이 얕보던 상업적 미술 기법으로 예술계와 세상을 뒤흔들어 버린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처럼 때로는 단 한 사람의 꿈과 소망이 씨앗이 되어 인류의 문명이라는 거대한 숲이 다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도. ‘미래는 생성되지 않는다’라는 책 제목처럼 미래란 저절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열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열쇠는 과학과 문화에 있다.
상상만 해도 머릿속이 아찔해질 정도로 광활한 우주에 비할 바 없이 작디작은 사람의 몸으로부터 어떻게 그렇게 큰 일을 해내는 힘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우리의 몸은 아무리 작아 보여도 엄청난 수의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 맨눈에 보이지도 않게 작은 원자와 분자 알갱이들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붙고 떨어짐을 반복한 결과 우리는 자의식, 욕망, 언어처럼 그 알갱이 한 알 한 알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특징을 가진 ‘복합계complex system’라는 존재가 되었다.
‘복합계 과학’은 이처럼 ‘단순성으로부터 복합성이 나오는from simplicity to complexity’ 현상을 연구한다. 나는 사물들이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그래프의 구조를 연구하는 네트워크 과학network science, 사회적 행동을 예측하는 인간동력학human dynamics, 유전자 정보로부터 질병을 예측하는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 분야 연구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빛, 소리, 글자처럼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예술, 음악, 서사 같은 ‘문화복합계’가 어떻게 우리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창의성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나날이 발전해 가는 AI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처럼 사람의 자리에 조금씩 전진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은 신기술이 어떠한 미래로 우리를 인도할지 끊임없이 상상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과학과 문화의 연결고리에서 찾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1장
멋진 신세계로 가는 길
진화론과 미래
미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 질문을 탐구하는 데 우리의 사고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가운데 하나로 영국의 자연사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을 꼽을 수 있다. 다윈은 동시대를 살았던 앨프리드 월리스Alfred Wallace, 1823~1913와 거의 같은 시점에 창시한 진화론을 통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공통의 조상에서 나왔다고 주장했고, 자연사학·자연과학을 넘어 사회학과 정치학의 영역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공로로 아이작 뉴턴, 찰스 디킨스 같은 세계적 학자, 문호 들과 함께 영국의 국가적 영웅들을 기리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셔져 있다.
진화론과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
다윈 진화론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매우 간단하다. 자손을 낳기 위해서는 당연히 죽지 않고 생존해야 하는데, 유한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에서 강력하고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의 원리에 따라 세대가 지날수록 그 성질과 특징을 물려받은 개체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적합한 자는 선택을 받아 그 형질을 널리 퍼뜨리고 적합하지 않은 자는 소멸하는 이 과정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고 한다. 이렇듯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진화론이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 왔다는 것은 사뭇 흥미로운 일이다. 인류의 과거를 들여다볼 때 ‘모든 생물은 공통의 조상이 있다’는 다윈 진화론의 논리적 귀결이 그러한 불편함이 터져 나오는 데 큰 도화선이 되었다. 진화론의 등장은 인간은 우월하며 고귀하므로 완전히 특별한 존재라는 종교적인 신념의 뒤통수를 치는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고 이야기를 성서적 비유가 아닌 활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던 사람들이 진화론과 갈등했던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로는 1925년 미국 테네시주에서 열렸던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이 있다. 존 T. 스코프스John T. Scopes1901~1970라는 교사가 공립학교에서는 인간의 진화를 가르치면 안 된다는 법령을 무시했다는 죄목으로 재판받은 이 사건을 극화한 〈신들의 법정Inherit the Wind〉1960이라는 영화에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에 적대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그래서 이 사건을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이라고도 한다. 물론 진화론에서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원숭이가 공통의 조상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이지만 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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