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가위
가위는 가로지르는 도구다. 가위는 하나였던 세계를 둘로 나누고 영원한 밤의 골짜기를 만들고 한 사람을 절벽에 세워두고 목소리를 듣게 한다. 발아래, 당신의 발아래 내가 있으니 그냥 돌아가지 말아요.
절벽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가위는 있다. 그는 밤 가위로 밤을 깎는다. 밤의 껍질은 보기보다 단단하다. 밤으로부터 밤을 구하려면 밤도 감수해야 한다. 피부가 사라지는 고통을. 그래도 조각나지는 않는다. 밤 가위는 밤의 둘레를 천천히 걸어 하나의 접시에 당도한다. 당신 앞에 생밤의 시간이 열릴 때까지.
당신 발밑으로 이유 없이 새 한 마리가 떨어진다면 제가 보낸 슬픔인 줄 아세요. 저는 아직 절벽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발광체
발밑으로 돌이 굴러온다. 어디서 굴러온 돌일까. 쥐어보니 온기가 남아 있다. 가엾은 돌이라고 생각하며
걷다보니 또 돌이 굴러온다. 하나가 아니라면. 거듭해서 말해져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나는 간곡한 돌을 쥐고 있다. 바닥을 살피며 걷는 버릇이 생겼다.
돌이 온다 또 돌이 온다. 주머니는 금세 불룩해진다. 더는 주워 담을 수 없는데 계속해서 굴러오는 돌이 있어서. 나는 돌의 배후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무거운 돌은 무서운 돌이 된다.
사방에서 돌들이 굴러온다.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르는 돌은 무한한 돌.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돌의 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간섭
돌을 태운다
사실은 돌 모양의 초
누가 나를 녹였지?
누가 나의 흐르는 모양을 관찰하고 있지?
돌이 나의 질문을 대신해주기를 기대했는데
돌은
자신이 초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다
무고하게 빛난다
돌이 녹는 모양을 본다
돌 아래 흰 종이를 받쳐두어서
흐르는 모양 잘 보인다
너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겪는구나
너는 네게 불붙인 손 사랑할 수 있니
창밖에는 갈대 우거져 있다
횃불 든 사람들 오고 있다
제 머리카락은 심지가 아니에요
발끝까지 알아서 태울 테니 불붙이지 마세요
흰 종이 위에 스스로 올라서서 하는 말
또 한번의 밤이 지난다
아침이 오면 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의 모양
굳은 모양을 보면
어떻게 슬퍼했는지가 보인다
어떻게 참아냈는지가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