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바다
당신은 ‘세상 모든 바다’의 팬입니까.
아무에게나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해도 될까. 질문하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쿠’라고 합니다. 그런 소개부터 한다면 어떨까. 내가 일본인인 것을 알면 사람들은 더 너그러워질 수도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나는 그날 잠실에 모인 십삼만 명 중 한 명이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가 하쿠라는 것이 부분적으로는 거짓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다섯 달 전 여름에 잠실에 갔던 일은, 그곳에서 백영록과 만난 일은 어떻게 보아도 사실이다. 그러니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게 좋겠다.
나는 그날 잠실에 모인 십삼만 명 중 한 명이었다.
서울에서 유학중이었으므로 잠실 주경기장에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철로 삼십 분. 콘서트 티켓은 없었다. 구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경쟁이 치열하기도 했지만, 나는 공연을 꼭 눈앞에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한국에서 흔히 ‘안방 덕후’라고 부르는 타입. 마침 서울이니 산책삼아 경기장 바깥의 공식 팝업 스토어나 플리마켓에서 굿즈라도 하나 사두려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날 티켓 없이 잠실로 향한 이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 모든 바다였으니까. 世界すべての海. ALL THE SEAS OF THE WORLD. 한국 팬들은 주로 ‘세모바’로 칭했고, 글로벌 팬들도 그 이니셜을 따 ‘SMB’로 부르곤 했다. 세모바는 BTS 이후 가장 성공적인 케이팝 그룹이었다. 빌보드 매거진은 ‘그녀들은 걸그룹의 한계를 넘어 케이팝을 다시 발명했다. 역설적이지만 K라는 접두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라고 평가했다. 뉴욕에서 출발해 리우데자네이루와 파리, 두바이와 싱가포르를 거친 첫 번째 월드 투어의 마지막 공연 도시가 서울이었다.
그리고 공연 며칠 전부터 트위터에서 돌던 소문이 있었다. 첫 투어 종료를 기념하여, 티켓을 구하지 못한 팬들을 위해 경기장 바깥에서 게릴라 라이브를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 세모바다운 아이디어긴 했다. 그녀들은 늘 모든 팬에게, 아니 모든 사람에게 닿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하지만 분명히 해두자면, 나는 그 소문을 믿진 않았다.
8월의 한국은 일본 못지않게 무덥고 습했다. 하늘은 곧 비가 쏟아질 듯 흐렸지만 경기장 주변은 활기찼다. 입장을 기다리며 경기장을 에워싸고 있는 팬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핸드메이드 굿즈를 늘어놓고 파는 팬들. 이런저런 주장을 담은 선전물을 나눠주는 팬들…… 이 모두를 취재하는 기자들, 핫도그나 우비를 파는 상인들조차 들떠 보였다. 외국인도 대단히 많았다. 물론 나도 외국인이었지만, 나보다 ‘더 외국인’이 잔뜩이랄까. 우습지만 그런 긴장이 있었다. 월드 투어 공연장마다 설치되는 거대한 풍선 지구본을 실물로 마주하니 기대 이상으로 설렜다. 십삼만 명이었다. 무엇을 위해 모였든, 사람이 그 정도로 많으니 현장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벅차오르는 게 있었다.
세모바를 아이돌이라고 부르는 건 역시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잠실은 록 페스티벌 혹은 평화롭고 즐거운 집회 현장처럼 보였다. 『타임』의 평대로, 세모바는 블랙핑크만큼 매혹적일 뿐 아니라 U2만큼 사회적인 그룹이기도 했으니까. ‘Roses are red, Violets are blue, and I am who I am’이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팬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오래된 시를 차용해, 인종과 무관하게 당당해지라는 메시지를 담은 세모바의 데뷔곡 가사. ‘장미는 붉고, 제비꽃은 푸르고, 나는 나다’. 인파 속을 걸으며 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하는 배지와 폐식용유로 만든 재생비누 샘플을 기꺼이 받아들었다. 아프리카 기아 문제에 개입을 촉구하기 위해 스티커를 붙였고 얼마간의 기부금을 통에 넣었다.
잠실에 모인 이들은 인권과 환경에 대하여 세모바가 보여준 꿈을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 ‘88올림픽 이후 잠실이 가장 세계적인 순간’이라고 트윗했던 것이 기억난다. 88올림픽은 군사정권이 꾸며낸 꿈이었지만, 지금의 잠실은 자발적으로 이뤄낸 것이기에 아름답다는 의견이 수만 번 리트윗되기도 했다. 나는 1990년대에 일본에서 태어났으므로 한국의 88올림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그 감각에는 분명 공감했다. 그룹의 세계관대로, 세상의 모든 바다는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달까.
굿즈 숍에서 세계지도가 그려진 플래그를 고른 것은 그래서였다. 그룹을 가장 잘 상징하는 기념품 같았다. 가로 백이십 센티미터, 세로 구십 센티미터의 미색 세계지도에는, 호주의 대산호초나 멕시코의 바키타돌고래처럼 위기에 처한 자연 유산과 동물들이 곳곳에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천연 염료를 사용한 친환경 면직물, 깃대는 포함되지 않았는데 왜 상품명이 ‘플래그’인지는 의아했지만 상관없었다. 밖에서 흔들 계획은 없었으니까. 이미 대부분의 굿즈가 품절된 후였고, 그건 플래그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었다. 가격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그거 사실 거예요?”
내가 그렇게 열렬한 ‘덕후’는 아니라고 스스로 여겨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반사적으로 플래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라고. 약간은 당황했고, 글쓰기에 비해 발음은 아무래도 서투르니까, 영록의 귀에는 ‘겐찬수무니다’쯤으로 들렸을까.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의 소년이었던 영록은 말했다.
“오 외국인? 일본인이에요?”
그런 질문은 내겐 괜히 까다로웠다. 나의 부모님은 모두 재일 교포 3세다. 나는 스물두 살 때 자이니치 4세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나로서는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부모님도 반대하지 않았다. 재일 한국인에서 한국계 일본인으로 변신한 셈인데, 이러나저러나 ‘그런데’라는 단어가 자주 필요했다. ‘일본인이야. 그런데……’ 혹은 ‘한국인이야. 그런데……’. 언젠가부터 설명하기 귀찮았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배신자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아주 일본인인 편이 차라리 나은 대접을 받았겠다 싶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어쨌든 법적으로 일본인이었고 태어나고 자란 곳도 일본이므로 그냥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Yes. I’m from Japan.”
솔직히 말해서 한국어로 대답하면 대화가 길어질 듯했다. 영록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투박한 운동화와 어정쩡한 핏의 청바지. 스포츠 브랜드의 로고가 커다랗게 박혀 있는 땀에 젖은 티셔츠. 바싹 올려 멘 백팩에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안경. 어째서 세계 오타쿠들의 패션은 같은 방향으로 수렴하는 거야, 라며 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마이 네임 이즈 백영록. 나이스 투 미츄!”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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