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보
아침 햇살에 비친 눈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뽀드득. 유주는 밤새 내린 눈 밟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걸었다. 강당 입구에 걸린 현수막을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날개학교 제1회 입학식〉
분홍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돌출된 문구를 보자 절로 콧등이 찡했다. 그렇다고 감격스럽거나 새 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넘친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라고 일반 학교와 특별히 다를까? 기대는 말자.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클 테니.’
유주는 내면의 소용돌이를 드러내지 않으려 일부러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 밤 늦게까지 친구들과 강당을 꾸밀 때도 앞장섰다. 유주는 꼼꼼히 작업했던 것들을 살폈다. 중앙 통로에 빨강, 노랑, 파랑 풍선으로 알록달록 만든 꽃길이 축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손님이 앉을 의자에 오색 리본을 묶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무대 중앙 위의 탁자에 꽃병을 놓던 나은이 유주와 눈이 마주치자 윙크를 했다.
“역시 우리가 한 달간 합숙한 보람이 있어. 입학식 행사를 학생들이 모두 맡아서 하는 학교는 여기밖에 없을 거야. 엑설런트! 완전 멋져!”
나은이 한 손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청머루처럼 톡 쏘는 목소리가 매력적이다. 유주는 유쾌 발랄한 나은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일찍들 나왔구나. 어제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 같던데…. 강당 디스플레이도 멋지고. 대단한 인재들이야. 헛허.”
호탕한 웃음의 주인공 나침반 선생님이 강당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 청바지 차림이던 선생님이 감색 개량 한복을 입은 모습이 영 낯설다.
“쌤. 폭설 때문에 학부모님들이 못 오시면 어떡해용? 히잉!”
나은이 나침반 선생님 앞에서 콧소리 섞인 애교를 부렸다.
“음… 너희를 여기까지 보내신 부모님들이라면 날아서라도 올 거다. 미리 걱정은 금물! 그냥 물 흐르듯 편하게!”
“그냥 물 흐르듯 편하게.”
학생들이 나침반 선생님의 구수한 말투를 합창하듯 따라 했다.
“역시 나침반 쌤, 짱!!”
나은이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장단을 맞추며 좋아했다. 잠시 후, 강당 안으로 남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니들은 이제야 오는 거냐? 여학생들은 새벽부터 나와 준비 중인데…. 어서 정문 앞 눈 좀 말끔히 치워라. 손님들 닥치기 전에.”
말을 마친 나침반 선생님은 앞서 교문 앞으로 갔다. 대여섯 명의 남학생들이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기숙사 정문 앞에 있던 누렁이 두 마리도 겅중거리며 뒤를 쫓았다. 혼자 눈을 치우던 지킴이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 남학생들에게 빗자루를 넘겼다. 나침반 선생님과 남학생들은 운동장 바닥의 흙이 보일 정도로 박박 눈을 쓸었다. 운동장 한가운데 쌓인 눈 더미 위에서는 누렁이 한 쌍이 술래잡기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눈을 치우다 잠시 허리를 펴던 남학생들이 강아지를 툭툭 치며 장난쳤다. 곧이어 자동차들이 교문 안으로 들어왔다. 빗자루를 든 남학생들이 호텔 보이처럼 정중한 자세로 인사했다. 몇몇 여학생들이 달려나와 손님들을 강당으로 모셨다. 환한 미소로 손님을 맞는 나은이 모습이 눈꽃처럼 빛났다. 유주는 남의 잔치에 온 손님처럼 우두커니 서서 나은을 보며 생각했다.
‘나은은 오래된 셔츠를 입은 것처럼 편안해 보이네… 난 여기도 내가 설 자리 같지 않아 낯선데…. 난 언제까지 아웃사이더로 살아야 하나….’
유주가 멍하니 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학교 운동장은 순식간에 주차장으로 변했다. 대부분 외부 손님들이었다. 유주는 아빠의 차를 찾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다. 모두 강당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갈색 지프 한 대가 들어섰다. 급하게 차에서 내린 여자는 럭셔리한 차림만큼 화려해 보였다.
“아이쿠. 우리 꼭끼꼭 껴안다의 속어…안 본 사이에 허벌나게 커 버렸구먼. 입학 축하해!”
청재킷에 독특한 유럽풍 롱부츠를 신은 여자가 나은을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나은도 외국 영화에서처럼 엄마와 뜨겁게 포옹을 했다. 나은 엄마는 열일곱 살짜리 딸을 둔 엄마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동안이었다. 나은은 젊고 멋진 엄마가 자랑스러운 듯, 어깨 동무를 하며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유주는 자매같이 다정한 모녀의 뒷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유주는 엄마와 친밀하지 못한 편이다. 오히려 아빠와 더 잘 통했다. 일반 학교에 자퇴서를 낸 뒤, 아빠와 오지 여행을 하면서 더욱 친밀해졌다. 유주는 아빠의 차가 보이나 싶어 교문 밖을 내다보았다.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눈을 치우던 은우와 눈이 마주쳤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은우는 반대표답게 리허설은 물론 모든 일에 앞장섰다. 그것도 말없이 끝까지. 유주는 그런 은우에게 은근히 관심이 갔다. 하얀 눈길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만큼.
“왜 거기 서 있어. 혼자!”
은우는 빗자루를 든 채 유주에게 말했다.
“음… 그냥… 오늘 행사 잘 마칠 수 있을까? 좀 걱정이 되네.”
유주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딴소리를 했다.
“잘될 거야. 우리가 뭐 프론가. 그냥 편하게! 편하게!”
은우가 나침반 선생님 특유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유주가 동감한다는 뜻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은우가 씩, 웃으며 강당으로 들어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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