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구별 짓기 속 구별 짓기
피에르 부르디외와 장 클로드 파세롱은 『상속자들』과 『재생산』에서 위계질서와 사회적 지배 관계가 어떻게 교육 제도들을 통해서 영속화되는지를 분석한다. 교육 시스템이 기성 질서를 재생산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공립학교의 해방적 가치를 믿는 이상주의자들의 연못에 파문을 일으킨 바 있으며 오늘날 그 주장은 널리 알려지고 또한 인정 받고 있다. 교육 시스템은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의 자녀들이 최상위의 학력을 획득하게 해줌으로써 그 문화 자본에 힘입어 사회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학벌 그리고 개인의 성공이나 실패가 개인의 내적 자질과 재능에 달려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 결과를 정당화하는데, 이로써 사회적 선별의 효과를 개인의 부족함에 대한 처벌인 것처럼 뒤바꿔 둔다.
그러나 학교는 가족적·사회적 세습 자산patrimoine을 아주 일반적인 방식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하는 데 기초하는 재생산의 톱니바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는 이 상속물이란 재산avoir, 지식savoir, 권력pouvoir의 트릴로지로 요약되지 않는다. 실제로 부르디외는 경제 자본, 문화 자본, 사회 자본, 상징 자본이라는 네 가지 유형의 자본의 전승에 재생산 이론의 토대를 두었다. 한 개인에게 부富와 이론적 혹은 실천적 지식 그리고 사회적 특혜의 획득에 필요한 관계망을 수여해 주는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자원에는 재산, 지식, 권력 외에 다른 모든 형태의 (경제적·문화적·사회적 등등) 자본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본들은 역관계rapports de force를 의미 관계rapports de sens로 변형시키며 지배적 위치의 정당성에 대한 타인의 인정 및 피지배적 위치의 내면화를 일으키는 상징적 효과를 산출한다.
재생산은 그것을 유리하게 하고 영속화시키는 제도와 절차들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비투스habitus에도 역시 의존하는데, 아비투스는 사회적 계급 및 개인의 실존적 조건들과 관련한 주입과 조건화 작업을 통해 도야된다. 아비투스는 습득된 후로 한 개인이 계속해서 지니게 되는 것이자 특정한 표상과 실천을 생산하는 성향disposition 체계가 한 개인에게 체화된 것으로서 나타난다. 이 점에서 아비투스는 재생산의 힘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부르디외의 1972년 논문 「실천의 이론 초고」L’Esquisse d’une théorie de la pratique에서 처음으로 정의되고 난 뒤로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보완된다.
1980년, 『실천감각』에서 부르디외는 개인들이 자신의 실존의 조건들에 적응하기 위한 행동과 생각의 규칙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의식하고 있거나 의도된 방식으로 따르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미래의 품행을 지배하게 될 규칙들을 체화하도록 개인들을 이끄는 사회화 과정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특정 계급의 실존적 조건들과 연관되어 있는 조건화 작업은 아비투스, 지속적이고 다른 영역에도 적용되는 것이 가능한transposable 성향들의 체계, 구조화하는 구조로서, 다시 말해서 실천과 표상들의 목적에 대한 명확한 의식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작용들에 대한 신속한 통제를 전제하지 않고도 객관적으로 적용되며 또한 규칙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산출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객관적으로 ‘규제’réglées라는 규칙적이며 또한 지휘자의 지시 없이도 집단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실천과 표상들을 발생시키는 원리로서 기능하도록 설정된 구조화된 구조들을 산출한다.
사회적 세계와 체험한 경험들의 반영물이자 행동의 모체인 아비투스는 개인의 행동 전략을 지배하고 또한 주로 계급의 구별에 입각한 삶의 양식을 규정하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노동자나 사장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에서 아들로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다… 대개는.
그러나 부르디외와 파세롱이 그 메커니즘을 엄밀하게 분석한 이 준엄한 재생산의 논리는 예외 사례를 그늘 속에 모호한 채로 내버려두고 있다. 하지만 정작 위대한 재생산 이론가 본인은 재생산의 논리를 실지로 벗어나 있는 예외라는 점은 결코 작지 않은 역설이다. 부르디외 본인이 원래의 사회적 계급에서부터 빠져나온 혹은 빠져나왔던 사람이지 않은가! 우편배달부 아버지와 농민 가정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부르디외는 그의 출신 환경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궤적을 밟았다. 그렇다면 부르디외처럼 자신의 사회적 계급의 행동들을 응당 재생산하지 않고 오히려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이행한 개인들에 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변칙 상황은 재생산 이론의 맹점으로 남게 되며 이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된다.
『자기-분석을 위한 초고』에서 부르디외가 자신은 자기의 가족 모델modéle familial을 재생산하지 않은 이유들에 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인상적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자신의 지적 이력과 그가 철학보다는 사회학 쪽으로 진로를 선택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부르디외는 고등사범학교에 합격했을 때 그리고 교수 자격시험에 붙었을 때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러한 자신의 학업적 성공과 사회적 신분 상승ascension sociale을 설명할 수 있는 선행 원인들에 관해서는 탐구하고 있지 않다. 그의 성찰은 1950년대 파리의 지적 배경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해서 대학 세계에서의 그의 이력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자전적 요소들만을 동원하고 있다. 부르디외 자신이 태어난 사회적 환경은 그의 지적 실천의 결정에 작용한 출신 위치와 관련된 성향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서술하기 위해 저작의 막바지에서 단 한 차례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부르디외는 그의 유년 시절과 탈주의 경험을 암시적으로 연상시키면서 초보적인 설명을 개진하고 있기는 하다. 부르디외 자신의 말에 따른다면 그는 초등학교 시절 자신이 사귀었던 농부의 아들, 기술공 혹은 상인의 아들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으며 그들과는 달리 학업적으로 성공했고 또한 자신의 동창들과는 다른 사회적 궤적을 밟았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결코 어째서 자신만은 그럴 수 있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부르디외 그 자신의 경우가 구별 짓기 속 구별 짓기를 사유할 필요성의 선명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자, 이제 그렇다면 문제는 혁명 혹은 근본적인 개혁적 집단 운동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사회적 비-재생산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그리고 똑같은 일의 반복처럼 보이는 역사 속에서 예외들의 독특성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저 반대를 일삼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부르디외가 의도적으로 이 문제를 은폐했다고 믿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그의 이론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르디외 역시 이 예외 사례의 존재에 관해 고려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부르디외가 자유의지라는 관념과 이에 뒤따르는 주의주의적voluntarism 가상들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그가 재생산을 마치 운명이나 혹은 철칙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목표는, 비록 본인도 항상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적 결정론으로부터 우리를 더 잘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도구들을 제공하기 위해 사회적 결정론을 이해하는 것이었지 정적주의靜寂主義, guiétisme나 체념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다. 『상속자들』의 두 저자는 계급들을 차별화하는 사회적 요소들의 영향이 기계적 결정론의 형식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정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두 가지 예외 유형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이 유형들은 오히려 사회적 재생산의 규칙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첫째로, 문화적 세습 자산이 그 혜택을 보는 이들에게 자동적이고 누구에게든 늘 똑같은 방식으로 유리하게 작동한다고 믿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상속물은 결실과 탕진이라는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결실의 방식으로서 상속자들은 문화적 세습 자산을 단순한 고된 재생산 노동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창조성을 표현하는 여유로움과 축복으로 쌓아 올리는 데 더해 그것을 즐기면서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탕진의 방식은, 학교의 딜레탕트들과 사회의 도박꾼들의 태도가 보여 주는 것처럼, 상속자들의 파멸로 이어진다.
둘째로, 부르디외와 파세롱은 불우한 배경의 몇몇 아이들은 수월성 교육의 선별 과정에서 도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 현상을 그 아이들이 지닌 교육 환경과 더 유리한 가족 환경의 요구 사항에 스스로를 맞출 수 있는 적응력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들은 이 점에 관한 연구를 더욱 심화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예외적 인생들을 결정하는 원인 혹은 이유를 더욱 정확하게 연구할”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아이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이것이 재생산 이론의 논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외들의 지위와 그 범위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반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까닭이다. 비-재생산이라는 관념은 실제로 신중하게 다뤄지고 더욱 상세히 검토될 만한 자격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때 비-재생산에서 ‘비’non의 가치와 범위가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부정négation은 상반성contrariété을 표현할 수도 있고 모순contradiction을 표현할 수도 있다. 만약 비-재생산이 모순 유형의 대립opposition 사례라면 재생산과 비-재생산은 공존할 수 없다. 그 경우에는 둘 중 하나가 참이라면 결과적으로 다른 하나는 필연적으로 거짓이다. 반대로 상반 유형의 대립이라면 두 가지 테제가 양립 가능하며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요컨대 관건은 비-재생산이라는 예외가 재생산의 규칙을 파기하는지 혹은 확증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동시에 이를 알아내기 위한 탐구의 이면에는 인간 역량의 본성과 자유의 영역 확장이라는 논점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비-재생산은 사회적 전복 혹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에도 기성 질서의 내부에서 새로운 존재가 발명될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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