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버린 것들은 나를 기다린다
‘자기만의 방’, 그리고 어느 소설가의 초기작
어린 시절 한 집에서 일 년 이상을 산 기억이 없다. 가난하고 병치레가 잦은 데다 이사를 자주 다니니 친구가 없었다. 유일한 친구가 책이었다. 그걸 눈여겨본 담임선생님은 문예반장을 시키면서 내게 책을 읽고 정리하는 일을 맡겼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학급문고를 만들 테니 책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대부분 책을 살 여력이 없었다.
무성의한 어른들은 이가 빠진 『한국단편문학전집』이나 성인소설을 보냈다.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나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있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일본 소설가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이었다. 학급문고 도서목록에 간단한 책의 내용을 적어야 했는데, 남자가 생식기로 문풍지를 뚫는 장면에서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그 책을 폐품수거함에 넣어버렸다.
그나마 『한국단편문학전집』은 점잖은 편이었다. 선우휘의 「불꽃」에서 왜 모자가 번갈아 허벅지를 찔러대는지 이해가 안 가서 머리를 싸맸다.
이호철의 「닳아지는 살들」과 이범선의 「오발탄」은 강렬했다. 혼자 해가 지는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 귀에서 소리가 들렸다. ‘가자!’ 절규이거나 끝날 것 같지 않은 규칙적인 굉음이었다. 내 독후감을 읽고 기묘한 표정을 짓던 담임의 표정이 생각난다. “누가 써준 거니?”
나만의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학창시절 백일장에서 상을 곧잘 받으니 커서 작가가 될 거란 덕담도 들었다. 모두 당연히 내가 문학을 전공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작가가 아닌 독자가 되리라 결심했다. 여고 시절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나는 나무에 기대어 울었다. 혹독했던 그녀의 시대가 나의 시대에도 별반 달라질 게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돈과 자기만의 방’이 없는 가난한 여자가 무슨 글을 쓰겠는가?
읽고 싶은 책만 살 수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문예반 지도 선생은 《창작과비평》, 《문학사상》의 정기 구독자였는데 그런 내게 읽기를 강권했다. 당시 꽤 알려졌던 책들도 본인이 읽고 나면 내게 전달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운이 좋았다. 그때 써냈던 나만의 독후감이 밑거름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가정교사를 전전할 때, 가는 집마다 서재가 있어 ‘가난 속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내가 입주한 집의 학생들은 거의 이과생들이었다. 나의 독서는 인문학을 넘어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들게 되었다.
내가 사회인이 되었을 때 건조체를 구사하는 직장생활이 힘겨웠다. 가난했던 학창시절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과부하가 걸린 내 인생에 공황장애가 찾아왔는데 여러 병원을 전전해도 낫지 않았다.
그때 다시 나를 구원한 건 ‘읽고 쓰는’ 것이었다. 해외 출장길이었는데 공항 음식점에 약병을 두고 챙기는 걸 잊었다. 숨을 쉴 수 없어 죽을 것만 같은 절박감에 비행기 창문을 열어줄 수 없냐 물었고, 선량한 승무원이 황당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공기 많은(?) 넓은 자리로 옮겨줘 글을 쓸 수 있었다. 쓰기에 집중하자 숨이 쉬어졌고 작은 노트 한 권이 채워졌다. 그 후 책을 읽고 독후감 쓰는 일이 습관으로 굳어졌다. 건강문제로 명퇴를 하고 ‘자기만의 방’을 꾸몄다. 읽고 싶은 책은 모조리 주문했다. 평생의 소망이었던 ‘마음껏 책을 읽는 일’에 몰입할 수 있었다.
젊은 날 내게도 지적 치기가 있었다. 편집과정이 허술하거나 비문이 보이고 내용이 부실하면 가차 없이 책을 버렸다. ‘준비되지 않은 자의 책이 인쇄되는 불행’이라고 함부로 지껄였다. 돈을 주고 책을 사서 시간을 들여 읽는 독자는 ‘갑’이었다. 특히 작가의 꿈을 접은 독자는 터무니없이 눈이 높다. 그러다 어느 날 나의 사고가 전환되는 일이 생겼다. 유독 잘 쓴 소설을 만났는데 문체가 익숙했다. 작가의 초기 작품을 읽고 집어던졌던 기억이 났다. 기다릴 줄 몰랐던 것이다.
나는 책을 읽었지만, 문체나 가독성에 치중해서 정작 작가를 읽지 못했다. 작가가 작품에 몰입했던 것처럼 독자에게도 인내심이 필요했다. 작가가 간절하게 말하려 하는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도 독자의 몫이다. 내 어린 시절 나를 일으켜 세워준 건 작가들인데, 왜 그리 혹독하게 굴었던 걸까? 나는 독자도 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 1929. 원제 A Room of One’s Own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