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인용에 관하여
이 책에 인용한 성서 구절은 영어 성서에서 내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내가 주로 참고한 영어 성서는 《포괄적 신약성서The Inclusive New Testament》, 그리고 《신개정표준번역 성서The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RSV》이다. NRSV는 개신교 주류 교단들이 사용하고 있으며, 바티칸이 인정한 영어 성서는 《The NRSV-Catholic Edition》이다. 이 세 가지 성서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이 책의 참고문헌에 나와 있다.
내가 한글 성서를 인용하지 않고 영어 성서를 번역해 사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의 시도다. 한국어 성경에 익숙한 이들에게 새로운 번역으로 성서와 만나게 함으로써 상투적 이해를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성서 구절을 접하게 하기 위해서다. ‘낯설게 하기’는 익숙함을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그 구절이 담고 있는 세계와 만나도록 한다. 이전에 ‘읽었다’, 또는 이 구절을 ‘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구절에 담긴 세계의 복합적인 결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낯설게 하기의 시도로 나의 번역만이 아니라, 영어 성서의 원문도 함께 넣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읽는 것은 번역의 한계를 최소화하는 장치이기도 하고, 낯설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둘째, ‘평등 언어 사용’의 시도다. 대부분의 한글 성서에서는 여전히 반말과 존댓말이라는 언어적 위계가 화자와 청자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관계의 위계주의’를 자연화한다. 예수는 누구에게든지 ‘반말’을 하는 존재인 반면, 예수와 함께하는 이들은 예수에게 ‘존댓말’을 하곤 한다. 어른은 아이에게 무조건 반말을 하는 한국의 언어 세계는 모든 이가 평등한 존재라는 ‘존재론적 평등성’의 가치를 일상 세계에서 실천하기 매우 어렵게 한다. 적어도 이 책에서라도 언어 세계 속에서 예수와 청자들이 위계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관계 설정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도 청자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번역을 했다.
셋째, ‘포괄적 언어inclusive language 사용’의 시도다. 한글 성서는 신에 대한 상징이나 주요 청중을 ‘하나님 아버지’, ‘아들들’ 또는 ‘형제들’ 등 남성중심적으로 그대로 재현한다. 포괄적 신약성서가 시도하는 것은 현대의 독자와 청중이 남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가능한 한 포괄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God”을 ‘하나님’이나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고, 가능하면 ‘신’이라고 했다. ‘하느님’ 또는 ‘하나님’으로 할 경우 God이 기독교의 독점물로 생각되기 쉽기 때문이다. ‘신God’은 기독교라는 종교적 범주를 넘어서는 존재의 의미를 지니는 이름이라는 것을 상기하기 위한 의도적 사용이다. 《포괄적 신약성서》는 “형제들”을 “형제와 자매들”로, “아들들”을 청자로 설정한 곳에는 “아들과 딸들”로 바꾸어 쓴다.
넷째, ‘일상 언어 사용’의 시도다. 한글 번역 성서들은 많은 경우 매우 구태의연한 어투로 구성되어서 일상 세계와 동떨어진 표현들이 많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하거나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러한 어투에서 아무런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투에 익숙하지 않거나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성서가 담은 메시지의 핵심을 만나기 어렵게 하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어투와 이질감이 안 느껴지는 언어와 표현으로 번역했다.
철학자 예수와의 만남,
새로운 여정을 열며
〈예수의 말〉
어떤 씨앗 중 일부는 길가에 떨어져서 새들이 와서 먹었습니다.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져서 흙의 깊이가 얕아 곧 싹이 났으나, 해가 뜨자 타서 그 뿌리가 없어 시들어버렸습니다. 어떤 씨앗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가시가 자라며 기운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어떤 씨앗은 옥토에 떨어져서 키가 크고 튼튼하게 자라 삼십 배, 육십 배, 심지어 백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들을 귀가 있다면, 들으십시오. ―예수마가 4:4~9
Some of the seed fell on the edge of the 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it. Some seed fell on rocky ground where it found a little soil, and sprang up immediately because the soil had little depth-but then, when the sun came up and scorched it, it withered for lack of roots. Some seed fell into thorns, and the thorns grew up and choked it, and it produced no crop. And some seed fell into rich soil and grew tall and strong, producing a crop thirty, sixty, even a hundredfold. If you have ears to hear, then listen.
새로운 책을 쓸 때마다 나는 늘 묻곤 한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한 가지 이유로 시작한다. 일기나 저널이든, 학회에서의 발제나 강연문이든, 또는 출판되는 책을 위한 글이든, 글쓰기는 나에게 ‘고향’을 느끼게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나는 나의 쓰기에서 고향을 발견한다I find home in my writing”라는 구절을 처음 접했을 때, “아!” 하는 탄성을 내었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참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나라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오지 않았다. ‘우편번호’로 상징되는 ‘돌아갈 고향’의 개념이 내 마음속에 고정되는 삶을 살지 않았다. 한국, 독일, 미국, 영국 등의 나라를 옮기며 살아오면서, 나는 불확실성의 미래를 품고 지내며 그 어느 지리적 공간도 내게 편안함을 주는 ‘고향’이라고 느끼기 참으로 어려웠다. 내가 태어난 자랐던, 지리문화적 익숙함이 있는 한국에서조차 다른 종류의 ‘이방인’이 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내가 2006년 이후 지금까지 살고 있는 텍사스의 거주 공간에서도 각기 다른 익숙함과 이방인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익숙함’과 ‘낯설음’은 더 이상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 그 두 가지 상반되는 것 같은 감정은 실제로 우리의 내면과 외면 세계를 동시적으로 감싸고 있는 경험 세계임을 나는 나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몸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향’이란 무엇인가.
이 ‘고향’에 대한 질문은 나의 개인적인 삶만이 아니라 나의 학문 세계에서 지속해서 관심하는 주제어가 되어왔다. 내가 끌린 자크 데리다, 에드워드 사이드, 한나 아렌트와 같은 사상가들의 공통분모가 있다. 그들 모두 ‘뿌리 뽑힌 삶uprooted life’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내가 배우는 것이 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뿌리 뽑힘”의 경험을 좌절과 절망이 아니라, 중심부와 주변부를 동시적으로 보는 ‘이중 보기 방식double mode of seeing’을 구성하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심부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 세계를 바라보는 복합적이고 섬세한 시선을 복합화하면서 자신들의 개인적 삶과 공적 세계를 연결시킨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하는 통찰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제 만나고자 하는 예수 역시 ‘뿌리 뽑힌 삶’,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뿌리 내리기를 거부한 삶’을 살았다고 본다. 이 ‘뿌리 뽑힌 삶’이란 이중의 의미가 있다. ‘육체적인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다. 예수는 육체적으로 고정된 거주지가 없는 떠도는 삶을 살았다. 또한 그의 가르침과 삶은 언제나 사회 중심부에 대한 비판과 주변부 사람들에 대한 연대와 환대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주변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일상적 삶을 함께 나눔으로써 ‘상징적 의미’로 ‘뿌리 내리기를 거부하는 삶’을 살았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