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감춰졌던 ‘읽기’의 세계를 찾아서
이 책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독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신경학적 조건이 활자를 이해하는 능력에 끼치는 영향을 살펴본다. 처음으로 신경다양인neurodivergent, 일반적인 뇌신경 체계의 발달이나 연결과 차이가 있는 사람―옮긴이의 읽기가 거쳐온 역사를 따라가면서, 전통적인 읽기의 역사에서 비켜나 있던 사람들의 개인적 증언을 바탕으로 인지차이cognitive difference가 책 안팎에서 인간의 경험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밝힌다. 이 책의 핵심 전제는 ‘읽기’라는 단일한 활동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읽기라는 말을 쉽게 사용하고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읽는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읽기 또는 이 책에서 다루는 읽지 않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읽기’라는 말의 뜻을 잠시 떠올려보자. 읽기의 개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읽기를 잘 안다고 생각하든 아니든, 지금부터 여러 가지 사례를 살펴보며 읽기의 범위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목표는 읽기를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에 나오는 조 가저리처럼 자세를 바로잡고 “읽기란 얼마나 흥미로운지!”라고 감탄할 수 있게 말이다.
서번트증후군savant syndrome을 안고 살던 킴 픽Kim Peek, 뛰어난 기억력으로 유명했던 천재 서번트이자 학자―옮긴이은 읽기의 독창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인물이다. 픽은 책의 양쪽 페이지를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 왼쪽 눈으로는 왼쪽 페이지를, 오른쪽 눈으로는 오른쪽 페이지를 읽었다. 책을 옆으로 돌려놓든 뒤집어놓든 거울로 비춰 보든 상관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읽는 사람이었던 픽은 톰 클랜시Tom Clancy의 벽돌책 《붉은 10월호The Hunt for Red October》를 90분도 안 되어 다 읽었다. 문고판 소설 두 페이지를 거의 완벽하게 암기하는 데는 15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독서가보다 스캐너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킴퓨터Kimputer’였다. 픽은 계산능력이 뛰어난 서번트savant, 엄밀하게는 자폐성서번트증후군autistic savant syndrome이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서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레인 맨Rain Man〉에 영감을 줬다. 이 영화에서는 서번트의 능력뿐 아니라 장애에도 주목한다. 실제 ‘레인 맨’은 샤워하고 옷 입고 양치질할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요컨대 픽은 책 전체를 암기하는 천재성과, 신경다양인에게 우호적으로 설계되지 않은 세상에서 겪는 고초 모두를 통해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역동적인지 보여준다. 오늘날에는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신경학적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질환을 장애가 아닌 다양성으로 보는 관점―옮긴이이라는 렌즈를 통해 픽처럼 보통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상과 만나는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신경다양성이라는 개념은 뇌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다양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1990년대에 등장했다. 장애인 권리 운동가들은 이 용어를 도입해 정상적인 뇌normal brain라는 개념을, 사람마다 다른 신경학적 차이의 연속체라는 개념으로 대체했다. 뇌가 단일하지 않고 다양하다고 본 것이다. 사람들의 뇌는 모두 다르며 이 차이 때문에 사고방식도 달라진다. 심지어 신경전형인neurotypical, 뇌신경 체계가 전형적으로 발달한 사람―옮긴이이거나 인지 구조가 서로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차이가 나타난다. 신경과학자였다가 소설가로 거듭난 로라 오티스Laura Otis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놀랄 만큼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경다양성 운동에서는 신경학적 다양성을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 제5판》 곧 DSM-5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5th edition 진단표에 나오는 결함이나 병리적 증상이 아니라 그저 차이로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이런 움직임은 자폐증autism, 저자는 광범위한 자폐성 질환을 포괄하는 용어인 ‘자폐스펙트럼장애autistic spectrum disorder’와 ‘자폐증’을 통용했다―옮긴이에서 보이는 인지적 차이를 인정하자는 운동으로 시작해 읽기능력에 영향을 끼치는 질환을 포함하여 여러 질환까지 확장되었다. 나는 잠재적인 강점보다 결함이나 문제를 강조하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되도록 읽기장애reading disability라는 말 대신 읽기차이reading difference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다.
이제 신경다양성에 주목하며 읽기라는 개념 자체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한다. 신경과학자들은 뇌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뇌에 대해 가장 많이 알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읽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예상을 뒤엎는 극단적인 사례에 주목하면 읽기의 복잡함, 다양성, 무궁무진한 풍성함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깨어난 뒤 혀로 글을 읽게 된 사람 같은 예외적인 사례에 주목하며 읽기라는 개념의 풍경을 다시 생각해볼 것이다. 이런 예외적인 사례‘텍스트를 거슬러 읽기’보다는 ‘뇌를 거슬러 읽기’라고 할 수 있다는 관습적인 읽기를 할 수 없게 되자 대안적 읽기 방법을 고안한 수많은 사례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는 전형적인 독자그런 것이 있다면를 넘어서는 읽기를 대담하게 탐색하며 난독증dyslexia, 과독증hyperlexia, 실독증alexia부터 공감각synesthesia, 환각hallucination, 치매dementia까지, 다양한 신경질환 때문에 활자를 접할 때 문제를 겪는 신경다양적 독자들의 증언을 되살린다. 우선 세 가지 읽기문제를 비롯해 몇 가지 진단명을 설명하겠다. 먼저 난독증이 어린이의 읽기 학습을 방해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후천적 문맹acquired illiteracy이나 단어맹word blindness, 지능이나 표현 언어는 손상되지 않았지만 문자를 인지하고 읽는 능력에만 문제가 생긴 상태―옮긴이으로 불렸던 실독증이 뇌졸중, 질병, 뇌 외상의 결과로 발생해서 글을 읽을 수 있었던 성인의 읽기능력을 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과독증은 자폐스펙트럼장애와 관련된 증상으로, 말을 익히기도 전에 단어를 해독decoding, 문자를 소리로 변환하는 정신적 과정으로, 개별 글자나 철자를 알아보고 의미와 짝짓는 단발적인 과정―옮긴이하거나 이해comprehension, 읽은 내용을 조합해 전체 맥락을 파악하고 내용을 소화하는 종합적 과정―옮긴이하지도 못하면서 책을 통째로 외우는 어린이가 보이는 조숙한 능력을 일컫는다.
인지cogniton, 감각적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처리하는 일련의 정신적 과정―옮긴이는 다른 방식으로 읽기에 영향을 끼친다. 어떤 사람은 검은색으로 인쇄된 글자도 각기 다른 색으로 본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는 《말하라, 기억이여Speak, Memory》에서 a가 오래된 나무색으로 보이는 등 글자가 총천연색으로 보인 기억을 인상 깊게 묘사한다. 글을 읽으며 촉각, 청각, 후각, 심지어 미각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감옥’이라는 단어를 보면 베이컨 맛을 느낀다. 비전형 지각atypical perception은 책이 지닌 평범한 힘을 뛰어넘어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뇌의 시각단어형태영역visual word form area, VWFA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실제 활자를 보고 있는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든 어휘 환각lexical hallucination이 일어난다. 이 환각은 종교적 환상예컨대 다니엘서 속 벨사살왕의 연회 도중 벽에 나타난 글자부터 현실과 단절되는 조현병적 환각까지 다양하다. 마지막으로 치매 환자는 기억을 잃으며 읽기를 어려워한다.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에서 “문장 시작부터 끝까지 기억을 끌고 갈 수 없어서” 책을 던져버리는 불사인간 스트럴드블럭이 떠오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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