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 시를 찾을 것이다
시가 있는 이유는, 시를 찾는 여정이 시작되는 이유는 바로 일반적인 방식으로 기록하고 남길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정보와 느낌이 우리 삶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특수한 형식적 의의를 갖추고 있어서 다른 형식들이 효과가 없고 무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시에 도움을 청한다.
물론 이건 나만의 편견, 구제 불능의 편견이다. 내가 보기에 갖가지 다양한 장르를 일렬로 세우면 한 장르 뒤에 다른 장르가 있고 각각 고정된 순서, 고정된 기능과 제한이 눈에 띈다. 평이하고 직접적인 일상 언어와 일반적인 매체 보도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하려 할 때 우리는 문학적 언어에 의존하고, 사유와 느낌을 모색하는 산문에 의존한다. 그러다 산문도 필요한 의미를 충분히 담아내는 도구가 돼 주지 못하면 할 수 없이 허구의 소설에 도움을 요청해 색다르고 다채로운 서술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에게 더 큰 공간을 마련해 주고자 한다. 만일 소설조차 힘을 못 쓴다면? 다행히 우리에게는 시가 남아 있다.
시의 가장 다른 점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데에 있다. 시는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야기하면 바로 파괴되고 말 경험과 심정을 보존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는 건 때로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가장 우회적이면서도 유일한 길이다. 이와 관련해 카프카가 쓴 우화를 한 편 떠올릴 수 있다. 어느 황량하고 기묘한 아침에 무엇 때문인지 급히 길을 가다가 길가의 경찰에게 시간을 묻는, 꿈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이야기다.
시와 가장 가까운 건 이성에 의문을 제시하는 철학이다. 예컨대 장자처럼 꿈에서 나비를 보고 잠에서 깼지만 깬 후에 자기가 본래 나비인데 지금 사람이 된 꿈을 꾸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하는 철학이다.
시가 하나의 장르 형식으로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 있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시와 관련된 기이한 결핍감이다. 실제로 구체적이고 자구와 자구, 행과 행이 정연하게 연결된 시는 우리가 밤낮으로 찾아 헤매는, 존재해야 마땅한 상상의 시보다 훨씬 적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산문이나 소설이 모자라다고 느끼는 일은 없다. 하지만 어떤 내적인 공허와 갈증을 만날 때마다 한편이나 한 구절의 시가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왜 그런가 하면 나에게 시는 이미 완성된 작품의 나열이 아니라 끝나지도 중단되지도 않는 탐색이기 때문이다.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황천까지 이 시공간의 특정 지점에 새겨 넣기 가장 적합한 시를 오매불망 찾아내려 한다.
그래서 유일한 시란 있을 수 없다. 그토록 방대한 공허와 갈증에 대응할 수 있는, 이미 다 쓰인 한 편의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 삶에 유일한 시가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난 솔직히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난 시가 만들거나 이끌어 낸 방대한 공허와 갈증 속에 살면서 결코 만족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만족할까 봐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얼마 전 물난리가 난 해변에 다녀왔다. 도로가 무너지고 누런 진흙이 다 노출된 광경 외에도 해안으로 밀려온 유목流木 더미가 자주 눈에 띄었다. 그 황폐함과 위험함 나아가 인간과 대자연의 공존에 관한 성찰을 어떻게 묘사하고 서술할지, 또 어떤 논리로 교훈을 남길지 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 유목을 통해 시가 나를 강력히 소환하는 걸 느꼈다.
시 한 편, 적어도 한 구절로 유목과 우리의 관계를 드러내야 했다. 어떤 시가 될지는 잘 몰랐다. 그래도 뤄푸洛芙*가 쓴 다음의 「떠도는 나무」 같은 시일 리는 없었다.
(……)
이 나뭇조각은
이미 오늘의 옳음이 아니고
어제의 그름도 아니다
머지않아 썩어 버릴
단순하기 그지없는 나뭇조각, 한때는 밤마다
거울을 쥐고 스스로를 비춰 보며
대들보가 될 꿈을 꿨지만
나이테를 쫓다 끝내 시간 밖에서 길을 잃은
나뭇조각
*세계 중국어 시단의 태두로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된 바 있는 타이완의 시인. 대표 시집으로 『석실의 죽음』 『어제의 뱀』 등이 있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리미가 있는 풍경」에 나오는 ‘자유의 불’과 다소 비슷할 것 같았다. 유목이 타는 불은 가스 난로의 불, 라이터의 불, 일반적인 모닥불과 다르다. 자유로운 장소에서 타오르는 자유로운 형상의 불이며 자유로운 까닭에 불을 지켜보는 사람의 심정을 반영해 나타낼 수 있다.
유목이 타는 불에서 유목의 자유를 구상해 냈다. 이렇게 해서 그 해변에서의 내 심정과 딱 맞아떨어지는 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난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탐색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시를 찾을 것이다. 물론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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