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의 어린이와
내 안의 어린이가 만난다
어린이에게는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한이 없다. 종종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집 안에 발이 묶이기도 한다. 필리퍼 피어스의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김석희 옮김, 시공주니어, 1999의 주인공 톰 역시 동생 피터가 홍역에 걸리자 갑자기 이모 집에서 지내게 된다. 톰은 여름 방학에 동생과 정원에 놀이집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쫓기듯 이모 집으로 가야 했다. 혹시 벌써 감염됐을지 모르니 당분간 꼼짝없이 집 안에 격리되어야 하는 상황인데 이모 집은 정원도 없는 공동주택이다.
“차라리 피터랑 함께 홍역에 걸리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톰의 외침이 합리적으로 보일 만큼 갑갑한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우리도 불현듯 닥친 신종 바이러스로 사회적 거리두기며 자가 격리, 재택근무를 한 경험이 있으니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는 톰은 이모부가 때리기라도 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까지 해 보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모가 날마다 한껏 솜씨를 발휘한 음식이 너무나 맛있기만 하다. 아마 톰은 온갖 달콤한 음식에도, 이모와 이모부는 홍역에 대한 면역이 있어 자기를 돌볼 수 있단 사실에도 부아가 났을 것 같다. 어른들의 결정에 꼼짝없이 따라야 하는데 거부할 명분이 하나도 없다.
그러던 톰은 어느 날 밤 이모 집 뒤뜰에서 자기 집 정원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고 아름다운 정원을 발견한다. 물론 이 정원은 괘종시계가 열세 번 종을 치는 한밤중에만 열리는 환상 속 정원이다. 고물차와 쓰레기통으로 비좁은 뒤뜰은, 밤이면 히아신스 향기가 가득하고 아스파라거스가 자라나는 정원으로 변한다. 동생과 나무집을 짓고 여름 내내 정원에서 놀고 싶어 하던 톰의 간절한 마음이 환상 속 정원의 문을 열었다. 온종일 집 안에 격리되어 갑갑하게 지내던 톰은 이제 밤 13시에 열리는 마법의 정원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게 됐다.
13시, 환상과 현실의 경계
환상 속 정원은 한밤중에만 들어갈 수 있다. 새벽 1시, 한 번 울려야 할 괘종시계가 열세 번 울릴 때 환상으로 넘어갈 수 있는 틈새가 삐걱, 열린다. ‘시간’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C. S. 루이스, 햇살과나무꾼 옮김, 시공주니어, 2001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J. K. 롤링, 강동혁 옮김, 문학수첩, 2019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공간’으로 그려지는 것과 비교된다. 어마어마하게 큰 옷장에 걸린 털옷들을 헤치며 걷다 보면 눈 덮인 나니아가 펼쳐지고, 킹스크로스역 9와 4분의 3 플랫폼을 지나면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도착하듯 열세 번 종이 울리면 환상 속 정원으로 가는 빗장이 열린다.
이처럼 ‘시간’이라는 경계에서 톰은 환상의 공간과 아울러 환상의 시간까지 만들어 냈다. 톰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구속당했기 때문이다. “너만 한 나이에는 열 시간은 자야” 한다던 이모부와의 약속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놀기 위해서는 마법의 공간과 함께 마법의 시간 또한 필요했다. 톰의 간절한 열망이 정원을, 그리고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밤 13시를 만들었다.
“밤 9시부터 아침 7시 사이에 어디엔가 13시가 있다면 그건 열 시간이 아니라 열한 시간이 되는 거야. 그렇다면 열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한 시간을 여분으로 가질 수 있어. 자유로운 한 시간을…….”
―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29쪽
이렇듯 밤 13시에 열리는 정원은 어른들이 톰에서 일방적으로 규정한 시간과 공간의 규칙을 뛰어넘으며 생겨났다. 원대한 여름 방학 계획을 포기하고 이모 집으로 갔다, 온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다, 고열량 음식과 운동 부족으로 밤에 잠이 올 리 없는데 억지로 열 시간씩 침대에 누워 있다……. 이때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하나,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일이다.
그러니 아동문학의 판타지는 낭만 넘치는 상상이나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니다. 세상 물정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거나 현실 세계의 엄혹함을 몰라도 되는 어린 시절에 한시적으로 부여된 나른한 특권이 아니다. 아동문학의 판타지는 어른이 규제한 현실 세계의 시공간을 뛰어넘으려는 어린이의 욕망이고 의지다. 어린이가 새로운 세계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자신의 현실을 전복하는 행위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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