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바닷마을 언니의 소식을 들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내게 그런 언니가 있다는 사실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오래전 언니의 결혼식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친척들만 모인 작은 웨딩홀에서 큰아버지는 내게 “너는 결혼 계획 딱히 없지?”라며 비아냥댔다. 아빠는 큰아버지에게 헛기침을 하며 “어허, 아직 대학생인데 무슨 소리요” 응수했다. 그뒤로도 큰아버지는 내게 결혼식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왔다며 “멋쟁이셔 아주”라는 둥, 커피믹스를 한 잔 타오라고 시키더니 물이 많다며 “사랑이 넘치셔 아주”라는 둥 말끝마다 이기죽대었다. 그를 알아 온 이후 단 한 번도 그가 말을 곱게 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지만 그날따라 유난하다고 생각했다. 신랑과 신부가 입장할 때 큰아버지는 죽상을 하는 걸로도 모자라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신랑 신부의 얼굴은 여느 신혼부부와 다를 바 없이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했는데, 정작 그 결혼을 주도한 사람은 못내 심술이 났고 그걸 감추지 않았다.
언니를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말하자면 언니는 ‘새언니’, 정확히는 ‘사촌새언니’였다. 그러나 결혼식 날 언니를 부를 일은 없었고 이후에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으니 입에 붙어본 적 없는 말이다. 돌아가신 할머니였다면 오빠의 이름을 붙여 ‘장훈이네 거시기’라고 불렀겠지. 그렇게 생각하다 어렸을 때부터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말, ‘새큰엄마’란 말도 떠올랐다. 얘, 너희 큰엄마는 새큰엄마야. 어린아이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즐기던,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함부로 내뱉기를 즐겨하던 인간이 속삭이던 말.
바닷마을 언니는 그날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자기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부 대기실에서 생각이라는 걸 할 시간이 난다는 건 얼마나 난처한 상황일까. 이제 나도 그날 언니의 입장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언니와 만나는 날까지 나는 그녀와 직접 연락하지 않았다. 기왕에 소식을 전해준 사람도, 만남을 주선한 사람도 아빠였다. 아빠는 내가 취직한 뒤로 전에 없이 자주 큰아버지네 집에 놀러갔다. 자랑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야야, 이제 더는 자랑할 사람이 남아나질 않는다”며 아빠는 눙쳤지만 실없는 소리란 걸 알았다. 아빠는 차를 몰고 한 달에 두어 번 인천에 갔다. 그렇게 불편해하던 큰아버지네를 가벼운 걸음으로 오갔다. 아빠는 걱정하던 것과 달리 자식 잘 키웠다는 말을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으니 인생의 한시름을 던 것 같았다. 야 야, 어디 가서 우리처럼 공짜로 교수 자식 얻은 사람 구경이나 하겠냐, 란 말을 아빠는 입에 달고 살았다. 주책이 지나치면 엄마가 한마디했다.
“공짜는 무슨 공짜야. 얘는 죽어라 일해야 하는데.”
임용된 지 며칠 안 됐을 때, 주차장에서 마주친 학생처장이 ‘역시 요즘 공채 교수들은 다르다’면서 연식이 오래된 내 중고차를 가리키며 웃던 걸 아빠는 몰랐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왜 학교 주차장에 몇억씩이나 하는 외제차가 줄 서 있는지 나도 알 수 없는 것처럼.
바닷마을 언니 역시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자존심이 상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은 자기 자식에게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큰아버지는 시집와 자식만 키우던 애가 무슨 교수냐며, 요즘엔 교수 되기도 참 쉬운 것 같다는 소식을 덧붙여 아빠의 속을 긁었다. 아빠는 평소 볼 일이 없던 남의 며느리에게 연락을 하고는 대체 어떤 경위로 임용이 되었는지 물은 후 나와 만나보라고 했다. 그 얘길 듣고 나는 기가 막혔다.
“아니, 그 언니가 교수가 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
아빠는 언니 이야기를 들어보니 참 세상이 천지개벽할 일이구나 싶었다며, 여하간 남도 아닌데 같은 여성으로서 뭐라도 도와줄 일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당시 나는 친형제라고 해도 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나란 사람의 일인분 몫을 하기도 버거울 때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바닷마을 언니라는 데에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장훈 오빠와의 사이에서 연년생 둘을 낳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애들이 벌써 고등학생이라는 소식도 신기했다. 내겐 장훈 오빠가 백팩을 멘 채 풀죽은 얼굴로 현관을 들어서던 모습이 생생했으니까. 엄마는 자식을 그만큼이나 키워놨으니 취직도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게다가 지방대라는데 말이야. 애들 어렸으면 너희 큰아빠가 행여 보냈겠다.”
그렇게 나는 언니가 지방 사립대에서 강의를 시작하기 두 달 전, 급한 행정 업무를 끝내고 그녀를 만나러 갔다. 운전을 하며 나는 내가 왜 그녀를 ‘바닷마을 언니’라고 부르게 됐는지 생각했다. 내가 초등학생일 적에 큰아버지는 조카인 나와 자기 자식들을 모두 지프에 태우고 바닷마을에 갔다. 큰아버지나 아빠는 땅이나 집을 사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자식들을 차에 태우고 가서 한 바퀴 둘러보길 좋아했다. 조수석에는 대학생인 장훈 오빠가 타고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큰아버지는 동네 입구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큰아버지를 따라 가파른 경사를 걸어올라갔다. 걷다 돌아보니 차를 세워둔 곳이 까마득할 만큼 경사가 심했다. 마치 캐리비안베이 미끄럼틀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큰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 동네에 집을 두 채나 사놨다고, 우리 아들 결혼하면 붙어살 거라고 했다. 마치 너는 결혼해도 집 걱정은 없으니 얼마나 좋냐는 듯이 내성적인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껄껄 웃던 큰아버지. 그 말을 들은 장훈 오빠는 입도 벙긋 안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살면서 자신의 뜻대로 안 된 게 하나도 없는 큰아버지답게 그 바람도 이뤄냈다. 결국 시간이 흐른 후 결혼한 아들과 이웃해 살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런 언덕배기에 사는 게 좋을까 생각하며 동네를 둘러봤는데 뜻밖에 시야에 바다가 들어왔고, 마침 파란 하늘에 뽀얀 구름이 걸려 있었고, 여름 햇살을 받은 물빛이 반짝였다. 그 순간 내게 그 동네는 바닷마을이 되었다.
언니는 공영주차장 입구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옛날 큰아버지가 동네 입구에 차를 아무렇게나 주차하고 우리더러 냉큼 내리라고 했던 기억에 나는 주차장을 미리 알아봤다. 그 언덕을 차로는 도저히 못 올라갈 것 같아서 평지에 있는 주차장을 검색한 뒤 언니에게 그곳에서 만나자고 문자를 보냈다. 언니는 내 차를 단번에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물론 나도 언니를 단번에 알아봤다. 언니를 보자 씁쓸한 기억들이 머리를 스쳤다. 세 치 혀로 지은 죄를 생각하면 골백번 죽어서도 못 갚을 여자가 영락없이 그날도 신나서 내뱉었던 말.
“저 물건, 드레스 안 어울리는 것 좀 봐. 피부가 좀 우리처럼 깨끗하고 뽀얗기라도 해야 드레스가 어울리지.”
‘그럼 당신에게는 어울리겠니?’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그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언니가 좀 까무잡잡하긴 했다. 여전히 그랬다. 결혼식 때로부터 이십 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늙었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었다. 언니는 명품 브랜드의 밀짚 선 캡을 쓰고 있었다. 나도 가지고 있는 모델이었다. 언니는 내게 “아가씨,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아이고 어떻게 해, 운전하느라고 힘들어서, 근데 이제는 길 좋아져서 집 근처에다 댔어도 되는데, 하긴 뭐 여기다 대도 괜찮다 그치, 여긴 주차비가 진짜 싸서” 하면서 쉴새없이 말을 늘어놨다. 언니는 팔짱을 끼고 걱실걱실 말을 붙이며 나를 식당 쪽으로 데려갔다. 문자로 동네에 괜찮은 식당이 있다고 했을 때 나는 내심 집에 초대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도 딱히 조심스러워하지 않는 태도도 좋았다. 다만 언니가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가씨라니,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호칭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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