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폴라
스무 살 때 폴라를 만났다. 폴라는 무릎을 가슴에 끌어안은 자세로 친구 집 소파에 앉은 채 생아몬드를 먹으며 “난 폴라야.” 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온기와 다정함이 배어 나왔다. 눈을 빛냈다고 표현하기보다는 그녀의 두 눈이 나를 찾아낸 것에 가까웠다. 폴라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리플렉션스’로 향했다. 내가 처음 간, 그리고 내겐 오랫동안 마지막이 되었던 퀴어 바였다. 나는 플러팅에는 끔찍하게 소질이 없었다. 하고 싶을 때는 못 하고, 의도치 않을 때 하는 식이었다. 폴라와 나는 가까이 다가섰지만 지나치게 가까울 정도는 아니었다. 공기는 묵직했고 나는 그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친구의 배를 타고 무인도에 캠핑하러 갔다.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환각버섯을 즐기고 알루미늄 포일에 싼 연어를 구웠다. 별들이 문장을 이루는 것처럼 고동치며 가까워졌다. 나는 버섯을 먹을 때마다 울었지만 폴라는 버섯을 좋아했기에 결국 내 불안한 눈물도 기쁨의 눈물로 바뀌었다. 폴라가 자기 몸에 대해 가진 확신이 부러웠다. 우리는 해변에서 춤을 췄다. 한 대 있는 기타로 돌아가며 엉망진창으로 커버 곡을 연주했다.
어린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 마크와 한 달간 동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막 돌아온 때였다. 우리는 프라하에서 여행을 시작해 기차를 타고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그리고 부카레스트로 향했다. 쭉 호스텔에서 지냈지만 부카레스트에서는 마크가 아팠던 바람에 하루는 에어컨이 있는 호텔에 묵었다. 나는 낱개 포장된 슬라이스 치즈를 사 와서 작은 호텔 방의 작은 냉장고 안에 넣어 두었다. 치즈가 차가워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젖은 수건으로 마크의 목 뒤부터 척추를 따라 문질러 주었다. 치즈가 꽁꽁 얼자 마크의 열을 조금이라도 식혀주려고 온몸에 치즈를 올려놓았다. 호텔 방에는 자쿠지가 있어서, 물을 채우지 않은 자쿠지 안에 나란히 앉아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우연히도 자쿠지 안을 배경으로 한 포르노를 찾았다. 마크는 치즈를 먹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가이드북 한 권에 의지해 기차며 호스텔, 사람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두고 온 사람들에게 “안녕, 우리 살아 있어.” 하고 메시지를 보내러 인터넷 카페에 가곤 했다. 그리운 폴라에게 이메일을 썼다. 끊임없이 폴라를 생각했다. 기차에 몸을 싣고 오스트리아를 횡단하며 해바라기의 바다를 바라볼 때, 우리의 첫 키스이자 마지막 키스였던 그때처럼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으로 베오그라드의 지하 술집에서 블루베리 맥주를 마시며 입술을 보라색으로 물들일 때도. 수십 년 만의 폭염 속에서 베오그라드에서 부카레스트까지 기차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마크와 나는 이층침대의 같은 칸에 나란히 누운 채로 열어둔 창문에 머리를 최대한 바짝 붙여 더위를 견뎠다. 열차 안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우리에겐 물이 없었다.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꽂고 캣 파워의 음악을 들으며 압생트를 홀짝였다. 너도 지금 듣고 있을까? 내가 널 위해 만들어 준 CD를? 그 말이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올 정도로 나는 궁금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밤을, 미동도 없는 세르비아의 시골 풍경 속 드문드문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폴라를 생각했다.
리플렉션스라는 퀴어 공간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즐기는 경험은 새로웠다. 아주 어릴 때부터 수치심은 내 뼛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있었으므로 나는 오래 묵은 독을 품어 썩어 들어가는 골수를 내 몸에서 빼내고 싶어 몸부림쳤다. 그럼에도 리플렉션스에는 기쁨이 있었고, 설레는 마음에 내 입가에도 불가항력적으로 미소가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다. 춤을 추느라 등을 타고, 가슴을 타고 땀방울이 뚝뚝 흘렀다. 한없이 가벼운 동작으로, 혼란스럽지만 절도 있고, 관능적이며 강렬한 춤을 추는 폴라의 머리카락이 휘어지고 나부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를 보는 폴라의 눈빛이 보였다. 아니, 그 반대였을까? 우리는 서로의 눈빛에 붙들리고 싶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만난 사슴처럼. 흠칫 놀랐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
“키스해도 돼?”
나는 그렇게 물으면서 나 자신의 대담함에 충격을 받았다. 일렉트로닉 음악에 담긴 해방감이 마치 내게 자제력은 바깥에 두고 오라고 명령하기라도 한 듯, 꼭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말처럼 들렸다.
그렇게 나는 다음 순간 폴라에게 키스했다. 퀴어 바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랑을 노래하는 온갖 시들이, 그 야단법석이 다 무슨 뜻이었는지 비로소 서서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온 세상은 차디차고, 미동도 없고, 무감했다. 내가 사랑한 여자들 중 아무도 그 사랑을 되돌려 주지 않았으며, 누가 나를 사랑했다 해도 그 사랑의 방식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나와 키스하고 싶어 하는 여자와 댄스플로어에 서 있는 그 순간, 내가 욕망을 느낄 때마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적대적이고 잔혹한 목소리는 침묵했다. 잠깐이라도 나 자신에게 기쁨을 허락해도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입술이 스칠 만큼 바짝 얼굴을 마주한 채 혀끝을 시험하듯 살며시 맞댔고, 충격이 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우리는 다 안다는 눈빛으로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는 절벽 끝에 서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떠날 줄 모르던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자기혐오 없이 내 욕망, 내 꿈에 다가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몇 달이란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몇 달 뒤, 「주노」의 최초 상영이 있을 예정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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