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만약 윌리엄 해즐릿William Hazlitt이 매일 아침 불쾌한 기분으로 깨어나지 않았다면 「미워하는 즐거움에 관하여On the Pleasure of Hating」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삶에 대한 애착을 쉽게 찾았다면 「나방의 죽음The Death of the Moth」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제임스 볼드윈이 자기 안의 흑과 백을 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투를 벌이지 않았다면 「미국의 아들의 기록Notes of Native Son」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글들은 에세이와 가장 깊은 차원의 관계를 맺은 작가들의 작품이다. 에세이라는 형식 자체 덕분에 작가의 깊숙한 내면으로 과감히 파고들었다. 이 글들은 구색 맞추기 식으로 설명을 이어가거나, 사유와는 무관한 이미지들을 전개하거나, 서정적인 사색에 빠지거나 하며 지면 위를 방황하지 않는다. 시점은 신경계에서 생겨나 서술자의 형태로 농축된다. 서술자는 독자가 첫 장에서 바로 알아챌 수 있는 내적 충동을 동력 삼아 에세이를 착착 전진시킨다. 글에 추진력을 제공하여 내적 결단으로 이끌어갈 연상들을 구축하는 데에만 그 서술하는 자아를 이용해야 한다. 이 작가들은 자신을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즉 우리만큼이나 자기 이해가 부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들 모두 글을 쓰는 순간에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당면 주제와 관련하여 명료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 의무를 이행한다.
작가가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집필을 한다면―다시 말해,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없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동기에 휘둘린다면―이런 글은 결국 거짓이 되거나 심각하게 편협해질 가능성이 높다. 로런스D. H. Lawrence의 에세이 「여성은 변하는가Do Women Change?」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얼핏 현대 역사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현상에 대한 고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920년대의 페미니스트들을 규탄하는 글이다. 내 생각에 이 에세이가 실패작인 이유는 거기에 담긴 견해 때문이 아니라, 로런스 자신이 잘 모르는 바를 쓰려 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망친 것은 작가의 무지다. “현대 여성은 새로운 부류라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빈정대는 어조로 그는 입을 뗀다.
정말 그럴까? 과거에도 그런 여성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난 그렇게 확신한다. …… 여성은 여성이다. 단계가 있을 뿐이다. 이삼천여 년 전에도 로마, 시라쿠사, 아테네, 테베에는 오늘날의 여성들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린 아가씨들과 부인들이 있었다. …… 현대성이나 모더니즘은 우리가 이제 막 만들어낸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문명의 끝마다 찾아온다. 가을에 나무 잎사귀가 노란빛을 띠듯, 모든 문명―로마, 그리스, 이집트 등등―이 최후를 맞을 때마다 여성들은 현대적이었다. ……
어느 독일 신문에서 우스운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현대의 젊은 남성과 현대의 젊은 여성이 밤에 호텔 발코니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남성: “요동치는 검은 대양으로 지고 있는 저 별들을 봐!” 여성: “닥쳐! 내 방은 32호야!”
이런 것을 두고 아주 현대적이라고들 한다. 아주 현대적인 여성. 그러나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의 카프리섬에 살던 여성들 역시 로마와 캄파니아의 연인들에게 ‘닥쳐’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시대 알렉산드리아의 여성들 …… 그들은 똑똑했고, 그들은 세련됐으며,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오, 닥쳐, 자기! …… 내 방은 32호야! 그냥 요점만 말해!” 하지만 결국 그 요점이라는 것은 아주 휑하고 작은 방, 아주 무미건조하고 보잘것없는 정사에 불과하다. 막상 이르고 보면 기이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요점이다. …… 연필에도 뾰족한 심이 있고, 주장에도 요점이 있으며, 발언에도 날카로운 요점이 담길 수 있다. …… 하지만 인생의 요점은 어디에 있는가?
자, 남성보다 여성이 이 사실을 잘 이해했었다. …… 인생이란 …… 점들의 문제가 아니라 흐름의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흐름이다. …… 오직 흐름.
언어는 강렬하고, 감정은 생생하며, 관점은 일관성 있지만,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더 강해지지도 더 약해지지도 않는 단 하나의 어조로 비난과 책망을 퍼붓고 있다. 현대 사회의 병폐와 불만의 원인을 찾아 쭉쭉 거슬러 올라가 보면,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부터 발산된 듯한 행동을 하는 ‘해방된’ 여성들의 음흉하고 천박한 의도가 있다. 단 한 순간도―단 한 단락이나 단 한 문장에서도―서술자는 서술 대상에 공감하지 않는다. 현대 여성의 관점에서 현대 여성을 바라보지 않으며, 현대 여성이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할 마음이 없다. 글에서 내적 움직임을 자극하는 데 꼭 필요한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공감이다. 소설에서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들―『아들과 연인』에 등장하는 난폭한 아버지가 가장 유명하다―에게까지 공감하는 모습을 보이는 로런스가 이 에세이에서는 끈질기게 ‘다른’ 존재로 남은 여성들 때문에 퇴락한 세상을 끊임없이 관조할 뿐이다.
「여성은 변하는가」 같은 글을 썼을 법한 또 다른 작가 해즐릿과 로런스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해즐릿이 썼다면 장황하게 말을 쏟아내는 가운데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고해했을 것이다. 해즐릿 자신이 여성에게 품고 있는 불안감을 드러낼 글줄, 문장, 이미지를 거듭 토해냈을 것이다. 분노 뒤의 두려움을 보여줬을 테고, 그 결과 로런스의 글과는 완전히 다른 에세이가 탄생했을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자신이 인정한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려 고투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러한 고투만으로도 서술 대상은 역동성을 얻었을 것이다.
해즐릿의 경우, 그의 머릿속은 피로 가득 차 있을지 몰라도 글은 그렇지 않다. 그는 신경증에 시달리지만, 에세이를 쓸 때는 자신의 분노를 인정하고, 그럼으로써 소재를 받아들인다. 반면에 로런스는 분노에 휘둘려 머리와 글이 피로 가득하다.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성에 대한 묘사는 여전히 감정적이고 적대적이지만, 아주 풍부한 상상력이 가미되어 저절로 상황이 조성되고 모든 인물이 인간적으로 이해된다. 『사랑에 빠진 여인들Women in Love』과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에서는 현대 여성―남자가 되고 싶어 하고, 의지가 강하며, 혈통이 최고라는 믿음을 거부하는 현대 여성들―에 관한 장광설이 되풀이되지만 그것이 작품을 장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품의 주제인 남성과 여성의 투쟁을 더 깊이 파고드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결국 인물들은 상황을 공유하고, 모두가 얽혀들어 있기에 우리는 그런 상황의 위력을 훨씬 더 강하게 느낀다. 소설이라는 장르를 쓸 때 로런스의 내면은 확장된다. 이는 그가 타고난 소설가는 맞지만, 훌륭한 에세이스트는 아니라는 증거이다. 「여성은 변하는가」에서 로런스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성은 역동적이지 못한 ‘그들’로 남는다. 에세이가 정적이고 밖으로 확장되지 못하는 까닭은 역동성의 부재 때문이다.
로런스와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소설은 잘 쓰면서 논픽션에는 서툰 작가가 또 있다. 나이폴V. S. Naipaul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은 인간적인 온기가 전혀 없어 근본적으로 차갑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이 차가움이 녹아내린다. 관점은 여전히 암울하지만, 작품은 독을 품은 꽃처럼 활짝 벌어지고, 불가사의한 공감이 가동되며, 상황이 이야기를 불러오고, 인물들이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논픽션에서는 기함할 정도로, 그리고 치명적으로 공감이 결핍되어 있다. 나이폴의 소설 『게릴라Guerrillas』를 에세이 「트리니다드의 학살The Killings in Trinidad」과 함께 읽어보면 그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두 작품 모두 어느 광인에 대한 신문 기사에서 비롯되었다. 이 광인은 자칭 흑인 급진파 지도자가 되어, 그의 마력에 사로잡힌 한 상류층 영국 여성을 비롯한 다수의 추종자를 신에게 바친다는 명목으로 살해한다. 소설의 경우엔 공포의 위력이 글에 속속들이 신비롭게 스며들어 몽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상황은 은유적으로 변한다. 에세이에서는 주요 인물들―피해자든 가해자든―이 표본 상자에 꽂힌 벌레들처럼 쪼그라들고, 옴짝달싹 못 하고, 위축된다. 나이폴은 서술 대상을 노골적으로 혐오하며 치를 떤다. 혐오감에 움츠러든다. 움츠러들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 결국 독자들의 뇌리에는 작가의 끔찍한 감정만이 남는다. 나이폴은 너무 멀찍이 물러선 나머지 대상과의 교류에 꼭 필요한 적절한 거리감을 얻지 못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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