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달
답
너는 모든 사람이 묻는 질문에 대한 답과 함께 깨어난다. 그 답은 ‘그렇다’, 그리고 ‘여기와 비슷하지만 더 심하다’이다. 네가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영원히 그것이 전부다. 그러니 다시 잠드는 것이 차라리 낫다.
너는 심장이 뛰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안에서 생명을 건졌다. 부처가 나무 아래 앉아서 결국 깨달은 것을, 너는 태아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애당초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이 낫다. 태어나자마자 들어간 유리 상자 안에서, 직감에 따라 그냥 꼴까닥했어야 했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다.
어른들이 시키는 게임을 모조리 때려치웠다. 체스는 2주 만에, 컵스카우트는 한 달 만에, 럭비는 3분 만에. 너는 팀과, 게임과, 그런 것들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에 대한 혐오를 안고 학교를 떠났다. 미술 공부와 보험 판매, 석사 과정도 그만뒀다. 하나같이 애쓸 가치가 없는 게임들. 네 벌거벗은 몸을 본 모든 사람을 걷어찼다. 추구한 바 있는 모든 대의를 저버렸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짓을 수없이 저질렀다.
네게 명함이 있다면,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말리 알메이다
사진작가, 도박꾼, 걸레.
묘비가 있다면,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말린다 앨버트 카발라나
1955-1990
하지만 네게는 둘 다 없다. 이 도박판에 더 걸 칩도 없다. 그리고 이제 너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이다. 죽음 뒤에 삶이 있는가? 그것은 어떠한가?
곧 너는 깨어날 것이다
시작은 오래전, 1천 세기 전이었지만, 그 세월은 모두 건너뛰고 지난 화요일부터 시작해보자. 거의 매일 그렇듯, 숙취에 절어 아무 생각 없는 텅 빈 머리로 잠에서 깬 날이다. 너는 끝없이 넓은 대기실에서 눈을 뜬다. 주위를 둘러보니 꿈이다. 너는 어쩐 일로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대로 기분 좋게 기다릴 생각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니까, 특히 꿈에서는.
너는 사파리 재킷과 빛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고,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신발은 한 짝뿐, 목에는 체인 세 겹과 카메라 한 대가 걸려 있다. 믿음직스러운 니콘 3ST, 하지만 렌즈가 깨졌고 몸통에도 금이 갔다.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지만, 시야에는 진흙뿐이다. 이제 일어나야지, 잠꾸러기 말리. 몸을 꼬집어보니 아프다. 쿡 찌르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모욕당하는 공허한 아픔에 가깝다.
제정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너는 안다. 1973년 스모킹 록 서커스가 열린 위하라마하데위 공원에서 LSD에 취해 세시간 동안 아랄리아 나무를 껴안고 있었을 때의 기분. 장장 90시간 동안 포커를 치면서 17라크Lakh,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의 국가에서 10만을 뜻하는 단위. 17라크는 170만 스리랑카 루피이고, 한화로 약 700만 원이다.를 따고 다시 15라크를 잃었을 때의 기분. 1984년 물라티부에서 처음 경험한 폭격, 겁에 질린 부모들, 소리 지르는 아이들과 함께 방공호에 틀어박혔을 때의 기분. 열아홉 살 때 암마Amma, 스리랑카어로 엄마.의 얼굴도, 그 얼굴을 얼마나 혐오하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의 기분.
너는 줄을 서서 안내 카운터 유리 뒤에 앉은 흰 사리 차림의 여자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카운터 앞에 서서 안내원에게 화를 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나? 당연히 처음은 아니다. 스리랑카인들은 대체로 말없이 속으로 삭이는 편이지만, 너는 목청 높여 항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쪽 잘못이라는 게 아닙니다. 내 잘못이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실수가 있을 수 있잖습니까. 특히 관공서에서는. 어떻게 하면 돼요?”
“여긴 관공서가 아니다.”
“상관없어요, 아주머니. 제 말은, 전 마냥 여기 있을 수가 없어요. 전달해야 하는 사진도 있고, 사귀는 사람도 있다고요.”
“난 그쪽 아주머니가 아니야.”
너는 주위를 둘러본다. 등 뒤에, 기둥을 돌고 벽을 따라 줄이 늘어서 있다. 연기나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사람이 없는데도 공기는 뿌옇다. 마치 자동차 없는 주차장, 파는 물건이 없는 시장 바닥 같다. 높은 천장, 광활한 공간에 콘크리트 기둥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서 있다. 커다란 엘리베이터 문처럼 보이는 것이 저 멀리 끝에 있고, 인간의 형체가 무리를 지어 거기 타고 내린다.
가까이 가서 보아도 인간의 형체는 윤곽이 흐릿하고 피부는 가루를 바른 듯 뿌옇다. 눈은 갈색 피부를 지닌 인종에게 흔하지 않은 색깔로 타오른다. 어떤 사람은 환자복을 입고 있다. 어떤 사람은 옷에 피가 말라붙어 있고, 어떤 사람은 팔다리가 없다. 그들 모두 흰옷을 입은 여자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안내원은 그 한 사람 한 사람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아마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어서일 것이다. 도박사라면네가 그렇듯이 이 모든 상황이 재키의 한심한 약 때문에 일어난 환각일 가능성을 5대 8로 볼 것이다.
여자는 커다란 명부를 펼친다. 관심도 아니고 멸시도 아닌 눈빛으로 너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일단 신상을 확인하지. 이름은?”
“말린다 앨버트 카발라나.”
“한 음절로.”
“말리.”
“음절이 뭔지 모르나?”
“말.”
“좋아. 종교는?”
“없습니다.”
“어리석군. 사인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사망한 지 얼마나 지났지?”
“모릅니다.”
“아이요.”Aiyo, ‘저런’ 등의 의미를 가진 스리랑카어.
영혼들은 떼로 몰려와서 서로 밀고 밀리며 흰옷 입은 여자에게 성난 목소리로 항의하고 끊임없이 묻는다. 너는 창백한 얼굴들을, 퀭한 눈과 깨진 머리, 분노와 고통과 혼란으로 일그러진 눈들을 바라본다. 동공은 온갖 멍과 딱지가 앉은 색깔이다. 갈색과 청색, 녹색이 뒤엉킨 눈동자, 그 눈들은 모두 너를 무시한다. 너는 난민수용소에서 지내봤고, 대낮에 노상 장터에도 가봤고, 붐비는 카지노에서 잠들기도 했다. 북적이는 군중은 절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다. 인파는 이쪽으로 밀려와 너를 안내 카운터에서 밀어낸다.
스리랑카인은 줄을 설 줄 모른다. 진입점이 다수인 무정형의 곡선을 줄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여기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질문할 것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같다. 카운터는 여러 곳이고, 성난 고객들은 철창 너머에 있는 몇몇 안내원을 향해 떠들썩하게 욕설을 외치고 있다. 사후세계는 모두가 환급을 원하는 세무서다.
어린아이를 허리춤에 받쳐 안은 암마가 너를 한쪽으로 밀어낸다. 아이는 자기가 아끼는 장난감을 네가 부수기라도 한 것처럼 이쪽을 쳐다본다. 어머니의 머리카락에는 피가 엉겨 있고 드레스와 얼굴도 온통 핏자국이다. “우리 마두라는? 어떻게 됐나요? 우리와 같이 뒷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운전사보다 그 애가 먼저 버스를 봤어요.”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합니까? 아드님은 아직 살아 있어요. 검정 마시고 마음 놓으세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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