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들을 품에 안고 있으면,
누군가의 아들인
국군 포로들이 어른거렸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여기자가 10년 동안 귀환 국군포로들을 궁금해한 이유는 뭘까?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2013년에 이 문제를 취재해보겠다고 결심했는데, 시간이 흘러서인지 초심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전쟁과 군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 이유를 찾고 싶다. 영웅 행세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나온 여정을 나누며 진심을 전하고 싶다.
전쟁 세대가 아닌 나는 전쟁의 흔적만 느끼고 자랐다. 1982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가끔 군인들을 봤다. 얼굴에 뭔가를 칠한 (훈련 중인) 군인이 나무 뒤에 숨어 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마을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기에 그 공포는 오래 가지 않았다. 북한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삐라전단’도 이따금 산에서 찾았다. 아빠가 예비군 훈련을 다녀오면서 사다 주신 건빵을 먹고 ‘우리 아빠도 군인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반공교육은 1989년 서울 송파구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뒤 받았다. 나이 지긋한 여선생님이 전쟁 경험을 들려줄 때면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매년 6월 호국보훈의 달을 기념해 포스터를 그리고 독후감을 쓸 때는 북한의 만행을 떠올려야 했다. 책에는 공산당당원 얼굴이 교활하게 그려져 있어서 나도 모르게 북한 괴뢰군이 무서워졌다. 할머니가 “피란 중에 아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업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신 터라 생명을 앗아간 전쟁이 그저 싫었다.
고등학생 때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읽고 북한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을 거두었다. 북한 사람들이 악당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을 수 있겠다 싶었다. 월북한 사람에게도 그 나름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국어사전에서 ‘이데올로기’의 뜻을 찾아봤다. ‘사회 집단에 있어서 사상, 행동,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 이것 때문에 남과 북이 싸웠다는 걸 알게 됐다. 소설을 읽고 ‘북한이 사상을 현실에 잘 적용했다면 더 좋은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대학교 1학년 때 값싸게 여행할 수 있는 나라를 고르다 폴란드에 갔다. 유럽에서 아름다운 도시로 꼽힌다는 크라쿠프를 찾아 낭만을 즐겼다. 그러곤 길에서 만난 사람의 권유로 근처에 있다는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들렀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만든 그곳에서 유대인, 동유럽인 등 400만 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수용소 한켠에 가득 쌓인 구두만 봤는데도 학살을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대학교 2학년 때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한겨레계절학교에서 2주 정도 통일연구원에 머물며 탈북 어린이들의 사회 적응을 도왔다. 나는 그곳에서 또래보다 심하게 왜소한 아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은 앞다퉈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 적나라하게 알려줬다. 북한에서 인민으로 살아가는 일은 녹록지 않아 보였다.
대학생 때 만난 진덕규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매번 ‘약자를 보살피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알려주셨다. “타인에게는 관대한 사람이 돼라. 베풀어라. 세상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는 늘 베풀어야 한다. 너희는 수혜자다. 사회에서 엄청난 이득을 누리고 있다. 이곳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있다는 거다.” 그때만 해도 출세하고픈 욕망이 강한 인간이었는데,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내 안의 나를 타일렀다.
사회를 고루 살피는 기자라는 직업이 마음에 들어 언론사 입사 시험을 준비했다. 그사이 〈한겨레〉 인턴기자가 되어 자이툰 부대에 파병됐다가 돌아온 이들을 만났다. 취재는 이라크 파병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찾는 과정이었는데, 내가 만난 대다수는 영장이 나오는 게 부담스러운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이었다. 이라크 파병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징병제 국가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의 고충을 들었다.
3년 준비 끝에 2007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신동아〉, 〈주간동아〉에서 ‘사회 변방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여기며 줄기차게 사회 저변을 취재했다. 그러던 중 2010년 3월 말, 천안함 실종자 가족들을 만났다. 경기도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 앞에서 성성이던 나는 한 촌부에게 다가가 “실종자 가족이냐?”고 물었다. 그분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지도 않은 채 말씀하셨다. “아들이외다. 큰아들. 하사.” 나는 그때 돌아오지 않은 군인을 아들로 둔 부모의 얼굴을 봤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젠가부터 전쟁 이야기에 마음이 갔다. 이희자 태평양 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회장, 정혜경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조사과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강제 동원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2011년 아들을 낳고 생명의 가치에 눈뜨면서 그 마음은 더 깊어졌다. 2012년,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국가의 무관심 탓에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한 러시아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취재하고자 그들의 무덤가를 거닐었다. 그날 그 무덤가에 흩날리던 빗방울이 피해자들의 눈물처럼 보였다. 이들의 흔적을 찾지 못해 헤매던 중 내가 머문 민박집 사장님이 사진첩에서 이분들의 사진을 꺼내주셨을 때 ‘영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주교인인 나는 엄마가 암송하던 ‘구원을 비는 기도’ 구절을 자주 떠올렸다.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그즈음 팔라우공화국를 찾아 위안부 취재를 시도했다. 그곳 시내를 열심히 걸으며 피해 당사자는 물론, 목격자를 수소문했다. 피해자 대부분은 사망한 상태라서 차선책으로 현지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피해자가 사과를 받지 못하는 현실’보다 ‘실태조사가 미흡한 현실’이 더 슬펐다. 이 지역의 실태를 조사한 연구자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 인력과 실태조사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상황이 안타까웠다.
2013년 귀환 국군포로를 만났다. 국군포로를 취재하면서 이들의 증언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이판과 팔라우에 살았던 위안부를 비롯해 사할린 억류자들을 취재한다지만, 피해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황에서는 할 일이 없다’며 절망하던 나는 희망을 찾고 있었다. 생존해 있는 귀환 국군포로들을 인터뷰해 연재기사를 쓰고 그 기사를 묶어 책으로 내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몇 차례 기획회의 시간에 “국군포로 인터뷰 시리즈를 쓰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기획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나도 안다. 정전협정일7월 27일이나 전쟁기념일6월 25일이라면 모를까. 급박한 사안이 매일 발생하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주는 언론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생존자가 사라져가고 있으니 이들의 삶을 기록해야 했다. 아들을 품에 안고 있으면, 누군가의 귀한 아들인 국군포로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귀환 국군포로 인터뷰 시리즈를 쓸 수 없는 현실을 한탄하는 내게 한 선배가 “대학원에 가서 논문을 써보라”고 조언했다. 그해 둘째를 낳고 2014년 육아휴직을 받아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이듬해 복직한 뒤에는 밥벌이에 매달렸다. 논문 계획안을 작성하려고 2016년 서울은 물론, 경기도 이천과 안산에 사는 귀환 국군포로들을 찾아가 인터뷰했다. 나는 혼자서 50여 명에 달하는 국군포로 생존자를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사이 2016년 진행한 인터뷰 녹음파일도 잃어버렸다. 데이터가 없어지자 그야말로 자포자기했다. 두 아이를 돌보면서 일하기도 버거우니 논문을 쓰겠다는 계획을 접었다. 이때는 국군포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일본 군함도에 강제동원된 사람들을 취재하게 됐다. 영화감독이 영화 〈군함도〉, 소설가가 소설 《군함도》를 쓰니, 기자가 논픽션 ‘군함도’를 써보자는 마음이었다. 생존자가 6명밖에 되지 않아 취재하기도 수월할 것 같았다. 사실 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우에무라 다카시 일본 기자가 “취재를 왜 꼭 돈을 받고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기에 ‘상황만 탓하고 움직이지 않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 취재하기로 했다. 평생에 걸쳐 조선인 강제 동원 문제를 취재했다는 하야시 에이다이 작가의 추모식에 참석하면서 그분의 삶의 태도를 ‘잠시’ 본받기로 했다.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군함도 내용을 취재해 2018년 첫 책 《기록되지 않은 기억 군함도》를 썼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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