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인권의 뿌리를 찾아서
서양의 ‘인권’과 동아시아의 ‘인권’
인권 오디세이, 이 여정을 인권이라는 말의 유래를 찾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인권과 유사한 인도적 정신은 세계 여러 문명권과 종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인간의 ‘권리’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서양에서 처음부터 ‘human rights’라고 한 건 아니다. 처음에 ‘자연권natural rights’이라 부르다 나중에 ‘사람(남성)의 권리rights of man’라고 쓴 적도 있었다. 토머스 페인*이 1791년에 내놓은 《인권》의 원 제목은 ‘Rights of Man’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도 남성형 ‘사람homme’이 쓰였다. 중립적으로 ‘인간human’이라는 말은 누가 맨 처음으로 썼을까? 여러 주장이 있지만 1849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의 《시민 불복종》에 ‘human rights’가 나오는 건 확실하다. “사람을 부당하게 투옥하는 국가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진정한 장소는 감옥뿐.”이라는 유명한 구절 직전에 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엔헌장에 드디어 ‘human rights’가 공식적으로 포함되었고 그것이 1948년의 ‘세계 인권 선언’으로 구체화되었다.
인간human이라는 말보다 권리right라는 말은 더 복잡하다. 서양 사람에게도 ‘right’ 개념은 어렵다. 여러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동아시아 사람에게는 더 어렵다. 번역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덧씌워진 탓이다. 영어로 ‘right’, 네덜란드어로 ‘regt’, 독일어로 ‘recht’, 프랑스어로 ‘droit’로 쓰이는 이 말은 고대부터 객관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어떤 상태를 뜻하는 어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은 질서, 즉 선이 이기고 악이 단죄되는 상태를 ‘디카이온Dikaion’이라고 했다. 그러다 중세 이후 ‘right’의 의미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마땅히 행사하고 요구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어떤 특별한 자격이라는 주관적 의미가 덧붙은 것이다. 14세기의 윌리엄 오컴* 혹은 17세기의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흐로티위스*가 ‘right’를 그런 식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보면 ‘right’가 인간 행위의 정당성과 한계, 제도와 정부의 구조 및 형태를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인간을 어떻게, 어느 정도로 대우하느냐를 정하는 존재론적 기준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영어 ‘right’에는 독일어나 프랑스어와는 달리, ‘법’이라는 의미가 없다.
‘right’의 뜻이 이처럼 여러 갈래였지만 워낙 핵심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때 이 말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서구 문화를 수입하는 데 국운을 걸었던 일본이 대표적인 경우다. 하지만 동서양 사이에 크고 작은 오해와 충돌이 끊이지 않던 상황에서 이질적인 외래 문물을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좋은 예가 있다. 1862년 요코하마의 나마무기라는 마을에서 말을 타고 지나가던 두 일행 사이에 시비가 붙어 일본인이 영국 상인을 찔러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제국의 기세가 등등했던 영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일본에 공식적인 배상을 요구했고 10만 파운드(현재의 화폐 가치로 약 1천억 원 이상)라는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받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다음 해에 가고시마에 함포 공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여담이지만 몇 년 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일본 막부의 고위 인사가 “아, 또 물어줘야 하는가!”라고 장탄식을 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서양 사람을 해쳤다 하면 사무라이 짓이겠거니 하고 여기던 때였으니 말이다. 서로 생소한 두 문명의 만남이 얼마나 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철저하고 광범위한 번역에 몰두했는데, 메이지 시대의 번역 작업을 연구한 학자들은 한결같이 ‘right’라는 단어의 번역이 특히 어려웠음을 지적한다.
그 시대에 나왔던 여러 사전을 보면 ‘right’가 무척 다양한 한자어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엔 염직廉直 또는 정직이라 하다, 아예 음역하여 그냥 ‘라이트’로 쓰기도 했고, 그다음엔 도리, 당연, 면허, 권 따위로 옮겼다. 그 후 진직眞直, 권의權義, 공평, 공도公道, 진실, 조리條理, 권세, 통의通義 등 요즘엔 잘 쓰지 않는 난해한 단어들이 여럿 등장해 서로 겨루었다. 오늘날 널리 사용하는 권리權利라는 말은 1885년 처음으로 사전에 등장했다. ‘right’를 덕권德權, 천권天權, 법권法權, 권리 등의 의미가 섞인 복합 개념으로 인식한 것이다. 같은 해 출간된 또 다른 사전에서는 권리權理라는 번역어가 제시되기도 했다. 결국 ‘권리權利’ 혹은 그냥 ‘권’이 번역어 경쟁에서 최종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말 역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원래 도덕적이고 반권력적이고 장중한 어감을 지닌 ‘right’ 개념이 권력과 이익과 힘의 느낌을 주는 ‘권리’로 번역되면서 본뜻이 왜곡되어 전달되었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에서는 ‘권리’가 1880년대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최경옥에 따르면 처음에는 《실록》 같은 공식 문헌에서 조금씩 사용되다 1890년대 들어 일반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민소학독본》에 “칭호는 각각 다르나 상대하는 권리는 차등이 없느니라.”라는 표현이 나오고, 《서유견문》에도 권리란 말이 등장한다. 1896년 <독립신문>에는 “님군(임금)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요, 백성에게 권리를 주는 것이니.”라는 표현도 보인다.
오늘날에는 ‘human rights’가 ‘인간의 권리’라는 뜻으로 완전히 일반화되어 굳어졌지만 필자는 권리란 말을 다시 번역할 수 있다면 어떤 표현이 좋을까 자문하곤 한다. ‘정당하고 옳다’는 의미와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뜻이 잘 배합된 새로운 말이 없을까? 개인적으로 ‘의권義權’이 비교적 본뜻에 가까운 번역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이 질문은 단순한 탁상공론이 아니다. 실제로 인권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right’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의 문제로 귀결되곤 하기 때문이다.
차별 금지법을 둘러싼 논란을 들어보자.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고 믿는 쪽에서는 그 누구도 이유 없이 차별받아선 안 되는 것이 인권의 원칙이라고 본다. 그런 입장이 정당하며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차별 금지가 정당하고 옳기 때문에, 당연히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차별 금지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편에 선 이들은 이유 없이 차별받아선 안 되는 것이 정당하고 옳다는 원칙 자체를 아주 협소하게 해석한다.
물론 이들이 모든 차별을 찬성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차별받지 말아야 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나 행동만이 차별 금지 원칙을 적용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남한 체제를 비판한다고 의심되는 사람은 애초 차별 금지 원칙을 적용받을 자격이 없으므로 그들에게 차별을 가하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 논리로, 동성애 지향을 가진 사람 역시 애초 차별 금지 원칙을 누릴 자격이 없으므로 차별을 받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이런 식의 선별적 가치관은 원칙적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고 옳다’라는 인권의 기본 전제에 어긋난다. 차별 금지를 반대하는 이들을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 재산이 없다는 이유, 여성이라는 이유,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 식민지 주민이라는 이유, 장애인이라는 이유,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정당화하면서도 그것을 인권 침해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허위의식과 연결된다. ‘right’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인간의 권리 운운하는 건 이처럼 위험천만한 일이다.
인권 운동에서도 ‘right’에 내재된 두 측면이 동시에 발현되곤 한다. 첫째, ‘정당하고 옳은’ 대상이나 행위는 계속 발견되고 발굴되므로 인권 운동은 필연적으로 확장되는 경향이 있다. 인권을 윤리적인 어떤 절실한 포부로 이해할 때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불의와 비정상과 억압을 무너뜨릴 만병통치약으로서 인권을 호명하려는 열망이 끊임없이 분출하기 때문이다. 둘째,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으로서 인권에서는 입법화와 제도화를 강조하는 경향이 생긴다. 어떤 근거로 주장하는지, 그 요구를 들어줄 의무를 지닌 상대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규정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권리의 객관적 규범성과 주관적 요구 자격의 결합, 이 점이 인권 개념을 여타 인도적 개념과 구분하는 핵심이다. 이러한 인권의 발전 과정을 이모저모 살피는 여행, 그것이 인권 오디세이의 올레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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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에 참여한 영국 혁명가.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한 팸플릿 《상식》(1776년)과 프랑스 혁명을 사상적으로 지원한 《인권》을 썼다. (편집자 주)
*윌리엄 오컴(William Ockham, 1285?~1349?) 영국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 신의 존재나 종교적 교의는 이성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철학은 신학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베이컨, 홉스를 비롯한 영국 경험론자에게 영향을 끼쳤다. (편집자 주)
*휘호 흐로티위스(Hugo Grotius, 1583~1645) 네덜란드의 법학자. ‘국제법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1625년 《전쟁과 평화의 법》을 발표해 근대 자연법 원리에 기초한 국제법의 틀을 확립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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