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쿠라 덴신
‘조선은 원래,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
침략에 눈이 어두워진 어리석은 자화상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 1862~1913은 메이지기 일본 미술계의 리더로서, 또 당시 굴지의 국제인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다.
덴신은 당시 유럽문화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던 일본인에게 일본 미술과 문화의 우수성을 역사적으로 예를 들어 증명하여 크게 계몽에 힘쓰고, 또 미술 문화를 통해서 국수주의를 고취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덴신의 일본 미술 및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논지가 조선 민족에 대한 멸시와 조선·일본관계사에 대한 심한 왜곡을 토대로 해서 성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쿠이福井 번사인 아버지 가쿠에몬覺右衛門, 어머니 고노의 차남으로서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본명은 가쿠조覺三. 아버지는 후쿠이 번의 요코하마 상관商館의 데다이手代, 지배인으로서 요코하마에서 살았다. 개항 직후의 막말, 그리고 메이지 초기의 요코하마다. 덴신은 7, 8세에 영어를 처음 접하고 서양인의 영어 사숙에 다니면서 영어 실력을 닦았다. 이 시기 덴신은 장연사長延寺에 맡겨져, 주지 현도화상玄導和尙에게 한문 서적을 철저히 공부했다. 1875년메이지8 도쿄의 개성학교에 들어가는데, 2년 후 개성학교는 도쿄의학교와 합병하여 도쿄대학이 된다. 다음 1878년메이지11 미국인 페노로사Emest Francisco Fenollosa, 1863~1908가 고용외국인으로 도쿄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어 내일하고, 정치학, 철학 등을 담당했다. 그는 미술연구가로서도 유명하고 특히 일본 미술 연구에 주의를 기울였다. 덴신이 그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말할 여지도 없다. 1880년메이지13 덴신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도쿄대 문학부를 졸업한다. 졸업논문은 「국가론」이었는데, 부인과의 싸움으로 불타버려, 2주간 만에 「미술론」으로 바꿔 쓰게 되었다고 한다. 졸업 후 문부성에 취직하고, 이후 각지의 옛 신사와 사찰을 방문한다. 특히 페노로사의 통역사로써 교토·나라奈良의 옛 신사와 사찰을 탐색하고 이후 그와 교우한 것은 그의 미술사가로서의 지위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1884년메이지17 6월 덴신은 교토와 오사카 지방의 옛 신사와 사찰 조사를 명받는데, 이 때 호류지法隆寺의 유메도노夢殿의 문을 열고, 비불秘佛이라고 하는 구세관음에게 절하게 된다. 덴신은 나중에 쓴 『동양의 이상』의 「아스카시대」라는 문장 중에서, 일본의 불교가 서력 552년, 조선에서 정식으로 전래했다는 기술부터 시작하는 장이면서, 조선, 혹은 조선인의 손에 의한 미술품에 언급할 경우, 당시 객관적으로 기술하거나, 혹은 일단 얕보는 기술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893년메이지26 7월에 청국 출장을 명령받고 중국 미술을 조사했을 때, 도중 배에서 내려 조선을 방문한 후 기록한 것이 있다. 7월 29일자에 “오전 부산포에 들어가다. 산색이 마르고 늙은 것 같다.” 30일자에는 같이 배를 탄 사람 ‘한공사 권재형權在衡’에 대해서, “권, 글을 잘 쓴다. 배 안에서 한시를 주고받았다. 권은 자못 동방의 근심을 안고 있다”고 썼다. 7월 31일자에 인천 도착, “인천부 및 화도花島를 향해 가다”라고 되어 있고, “①산의 모습이 평온하여, 나라奈良와 비슷하다. 이 주변의 조선은 산수가 좋고, 고대의 묘와 같은 분위기를 느낀다. 야마토와 비슷한 분위기가 있다. ②조선은 중류사회가 없기 때문에 쇠하는 것이 아닌가. 납작한 집을 보는데 견딜 수가 없다”『지나여행일지』라고 있는데, 여기에는 동정은 있지만, 멸시관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은 유사 이전부터 일본의 식민지
그의 추문醜聞을 포함한 경력상의 문제는 여기서는 생략하고, 정통으로 덴신의 조선관의 핵심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동양의 이상』, 『동양의 각성』 등에 있지만 『일본의 각성The Awakening of Japan』은 1904년메이지37 11월에 뉴욕 센추리 사에서 출판되었다. 그 책의 10장은 「일본의 평화」라는 제목인데, 내용은 조선·일본관계사다. “조선반도는 아마도 유사이전을 통해 원래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에서 고고학적 유적은 우리나라의 원시적 고분류와 정확히 같은 것이다. 조선의 언어는 금일이라도 모든 아시아 언어 가운데, 우리의 언어에 더욱 가깝다. 우리나라의 최고 전설은 우리 천조대신天照大神의 동생 스사노오노미고토素戔嗚尊가 조선에 정주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초대국왕 단군은 어느 역사가의 생각에 의하면 그의 자식이었다고 한다.”
단군이 스사노오노미고토의 자식이었다는 것은 드물게 듣는 진기한 설로서 웃어 던지다고 해도, 조선이 유사이전부터 일본의 식민지였다, 이하의 설명은 역사 왜곡은커녕, 역사의 역전이다. 그 위에 신공황후의 조선정벌 이후, “우리 연대기는 8세기까지[즉 500년간] 식민지 보호의 기록으로 채워졌다”고 되어 있다. 또 히데요시 군대의 조선원정은 13세기의 몽골의 일본 침략을 조선인이 인도한 것에 대한 보복조치였다고 하여,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는 도쿠가와 쇼군을 임명할 때 마다, “조공하는 국왕으로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반도를 어딘가의 적국이 점령한다면, 일본에 육군을 용이하게 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조선이 비수와 같이 일본의 심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즉 정치적으로도, 경제적·군사적으로도 일본이 조선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것은 “조선이 본래 일본의 영토였기”때문이라고 강변한다.인용은 전부 평범사 『오카쿠라 덴신 전집』
“아시아는 하나”『동양의 이상』의 첫머리라는 덴신의 명문구는 유럽의 아시아 침략에 대해서, 아시아는 하나가 되어 대항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발표한 것이지만, 그 때에도 “조선은 일본의 영유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적 모순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나중에 ‘일본의 지배하에 아시아는 하나’라고 야유를 받았지만, 본래 덴신 자신에게 그 사상적 토양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국제적 대지식인의, 침략에 눈이 어두워진 바보 같은 자아상이 여기에 응축되어 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